◈ [165화] 붉은 곰 (1)
‘뭐야 저건?’
페온의 주먹과 그로 인한 상황.
하지만 여유롭게 관망할 시간은 없었다. 에단이 곧바로 죽은 마나를 흡수했다.
딱히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바다에 물 한 바가지를 넣은들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에단이 눈을 번뜩였다. 소녀의 호흡은 안정을 되찾았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개짓거리하던 것 좀 치웠을 뿐이야.”
에단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헨리.”
“네, 대장님.”
“그냥 편하게 불러.”
“음…… 알겠어요, 도련님.”
“얘 좀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가. 휴고도 곧 정신 차릴 거야.”
“알겠습니다.”
소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별걸 다 하네.’
확실히 전보다는 쓸모가 많아진 것 같았다.
“자, 가자.”
우쭈쭈.
뭔가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은 제스처로 휴고를 불렀다. 휴고가 눈을 끔뻑이다가 헨리를 따라나섰다.
“…….”
에단이 고개를 가로젓고 한니발을 바라봤다.
“야.”
“네, 네?”
한니발이 퍼뜩 얼굴을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한니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쟤는 데려간다.”
“그, 그게…….”
“내가 보호조치 해 주겠다는 거잖아. 왜, 불만 있어?”
한니발이 참담함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반박이나 반론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없……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제야 갱생의 여지가 보이네. 여지가 안 보이면 여기서 그냥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벽에 박혀 죽어 있는 싸늘한 주검들이 한니발의 눈에 띄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른 대화를 좀 나눠야겠지? 보호비는 어떻게 할 거야?”
“보호비라고요……?”
“그래. 설마 그냥 손 털고 끝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순간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한니발이 격하게 얼굴을 저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드려야죠!”
“이제 대화가 좀 잘 통하네.”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더니 쪼그려 앉았다. 에단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보니 더욱 소름 끼쳤다.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키며 에단의 눈을 바라봤다.
“헨리 빚이 어떻게 되지?”
“……이자까지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리자 한니발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자가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없던 것으로 쳐야죠.”
“그렇지? 그래서 얼마인데.”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에단의 말에 대답했다.
“……500골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500골드라고? 얼마 안 되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럼 보호비랑 양육비는 1,000골드 정도면 되겠다. 헨리 빚은 청산해야 되니까. 500골드는 제하고 줘도 돼.”
“……네?”
한니발이 말을 되물었다. 계산이 어딘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해? 아, 그리고 정신적 피해 보상도 이번에 받아야겠네.”
에단이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쟤랑, 쟤, 쟤. 젠장, 일일이 세기도 힘드네. 쟤들 가지고 나 죽이려 든 거. 그리고 우리 가문도 모함하려고 들었지?”
에단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수고비까지 더해야 하니까. 어디 보자…….”
에단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대충 만 골드는 받아야겠는데?”
“마, 만 골드…….”
한니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액수였기 때문이다. 만 골드라는 거액은 한니발에게도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무슨 이런 날강도 같은.’
하지만 그 날강도의 손에 지금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한니발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에단이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뜯어내고 싶은데 내가 마음이 여려서 말이야. 너도 계획하던 것들이 있잖아? 내가 좀 도와줄게.”
“…….”
한니발의 표정이 돌변했다. 빛바랜 눈이 총기를 되찾았다.
‘거상이란 이름값을 하는군.’
돈이 될 것 같은 냄새를 순식간에 맡는다.
“이번 영지전에 중앙 정계와 국왕이 나서지 않는 이유는 입막음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한니발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여기서 괜히 말장난을 해 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정도라면 영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수지 타산을 계산해 본 결과…….”
“좋아. 아주 만족스러워. 아주 천하의 개 쓰레기 같은 대답이야.”
에단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한니발이 고개를 숙였다.
“좋게 좋게 가자고. 이미 돈도 많은 새끼가 괜히 원한만 늘려서 어디 써먹으려고?”
“……맞는 말씀입니다.”
“마석이니 레벨린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신경 꺼. 보아하니 너도 작업당했을 것 같은데.”
에단이 한니발의 목을 붙잡았다. 당황한 한니발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모가지 분질러지기 싫으면.”
한니발의 몸속에도 죽은 마나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었다.
수인족 소녀와 같이 머리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경우는 아니었기에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스스스.
에단이 죽은 마나를 흡수하고 손을 놓았다. 그 순간 한니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게 대체……!”
“뭐, 그런 법이지. 네가 레벨린을 믿지 않듯. 레벨린도 너를 신용하지 않은 거야.”
에단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 마나의 정체가 죽은 마나인 것을 알아챈 한니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너무 멍청했군요.”
“알긴 아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한니발이 에단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좋은 질문이야. 이제야 조금 대화가 통하네.”
“…….”
“먼저 영지전. 이미 판을 벌였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을 것 아니야. 여기서 무르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테니까.”
“맞습니다.”
“계획대로 영지전을 벌여. 대신 피해는 최소화한 다음에 상대도 납득할 만한 보상을 주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어?”
내 영지도 아니고 말이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단은 선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우리랑 협력하는 건 어때?”
“협력 말인가요?”
한니발의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득실을 계산하는 상인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에단이 아니었다.
“눈깔 똑바로 뜨고.”
“……죄송합니다.”
에단의 말에 한니발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레벨린이 잠적한 뒤로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내가 이거 터트리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에단이 서류 더미를 펄럭였다. 워낙 많은 권력가들이 얽혀 있는 장부였다.
퍼지게 되면 수많은 하이에나가 달려들 게 불 보듯 빤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판을 더 키우자고.”
“……어떤 계획이시죠?”
“최근 우리 가문이 일을 벌이고 있거든. 너도 듣긴 했을 텐데?”
“알고는 있습니다.”
한니발도 이미 파악한 정보였다. 블란테가 아카데미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니까.
“당연히 다른 애들은 눈을 뒤집고 난리를 치겠지.”
에단의 말에 한니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는 수많은 이들이 탐내는 과실이었다. 그 과실을 다른 이도 아니고 블란테가 삼키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부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머리는 빨리 돌아가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도 알아.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
에단이 가지고 있는 패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세계수.”
“……!”
한니발의 표정이 돌변했다.
“……세계수와도 연관이 있으십니까?”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말해 주고 싶지만.”
에단의 눈이 진중해졌다.
“확답을 해야 말해 줄 수 있겠는데 말이야.”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에단이 히죽 미소 지었다. 웃음 속에 느껴지는 섬뜩함에 한니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선택지는 없어.’
여기까지 온 이상 에단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수락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한니발은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득실을 따지는 게 바로 상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단은 자신 있었다. 한니발 같은 자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은 에단의 주특기였다.
“엘프, 정보 길드, 성자.”
에단이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잠자코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말한 명분.”
“명분? 설마…….”
한니발이 입을 벌렸다. 에단은 생각보다 더 큰 걸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성자라 함은……. 설마 신성 왕국과 연관이 있으십니까?”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내 명분은 신성 왕국 따위가 아니야.”
“그게 무슨…….”
한니발이 에단의 말을 곱씹었다.
“설마 신성 왕국과 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한니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성 왕국은 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주신이라는 명분과 막강한 무력, 더불어 사람들의 지지까지 갖추고 있었다.
‘제정신인 건가?’
제정신이라면 신성 왕국과 적대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한니발을 바라봤다.
“왜 겁나?”
“그야 당연히…….”
한니발이 대답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그리고 블란테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무력 집단이다.
‘뭘 모르는 자들은 다른 검술 가문이나 마법 가문을 언급하지만…….’
상인인 한니발은 알고 있다. 일신으로 블란테와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신성 왕국도 블란테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란테가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니발이 고개를 저었다. 블란테가 강한 무력을 지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혼자서는 열을 이기지 못해.’
신성 왕국은 많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관계는 이미 신앙과 종교를 넘어섰다.
더군다나 수많은 시민들도 신성 왕국을 향해 큰 믿음을 보였다.
신의 뜻이라는 명분. 그 명분 하나로 신성 왕국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한니발을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내가 말했잖아. 신성 왕국이 아니라 성자라고.”
“성자……?”
“내가 지금 성자를 데리고 있거든.”
그 순간 한니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어, 아무리 신성 왕국이 개 같은 억지를 부리며 억압하려 들어도, 감히 성자가 있는데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어? 뭐, 수가 틀려서 걔네들이 싸움을 걸거나 무력으로 압박을 넣는다면…….”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오히려 좋지.”
꼬우면 덤벼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