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얘기 한번 들어 볼까? (1)
후웅!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녀의 팔을 휴고가 몸을 젖혀 피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휴고가 소녀의 눈을 향해 팔을 찔러 넣었다.
소녀가 고개를 비틀어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휴고의 팔을 낚아채려 들었다.
휴고의 눈이 소녀의 팔을 빠르게 좇았다. 팔이 닿으려는 순간 도약한 휴고는 천장을 발판 삼아 가속했다.
탓!
혈전을 벌이는 두 괴물을 바라보는 한니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 저게 무슨…….”
둘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왜? 당황스러워?”
그때 들려오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한니발이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니발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스스스!
그의 손에 검은 기운이 맺혔고, 곧이어 손을 휘둘렀다.
“그래, 발악 한번 해 봐.”
콰앙!
날아오는 손을 에단이 가볍게 패링했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한니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는 대체 뭐지?”
원론적인 질문에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대충 빚을 갚으러 왔다고 하면 될 거 같은데?”
“……빚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한니발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묻어 나왔다.
“내가 또 빚을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거든. 일로 와 봐.”
에단이 저만치에서 구경하고 있는 헨리에게 손짓했다. 헨리가 쭈뼛거리다가 슬그머니 에단의 곁에 다가왔다.
한니발이 미간을 좁힌 채 헨리를 바라봤다.
“……기억이 나는군.”
한니발은 금전 관계가 얽혀 있는 자는 거의 잊지 않았다. 당연히 헨리에 관해서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헨리는 레벨린과 연관된 자였기에 더욱더 잊을 수가 없었다.
“……레벨린이 보냈나? 이유가 뭐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만한 짓을 벌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구나?”
웃음을 흘리는 에단의 반응에 한니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지?”
“말했잖아. 빚을 청산하러 왔다고. 원래라면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고 했는데.”
에단이 오른손 손가락 하나를 한니발에게 보여 줬다. 에단의 손가락 끝에는 가느다란 생채기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떠야지 보일 상처에는 작은 피가 한 방울 맺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크게 다쳐 버렸네?”
“와…….”
― ……허.
헨리와 페온이 짙은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니발이 미간을 좁혔다.
“같잖은 말장난을 하는구나.”
“말장난?”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내가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아?”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납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휴고.”
휴고를 부르는 에단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휴고의 귀가 쫑긋했다. 휴고의 눈빛이 돌변했다.
홱!
휴고가 벽을 박차며 질주했다. 휴고의 신형이 순간 소녀의 눈에서 사라졌다.
후웅!
휴고가 팔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격이었지만,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퍼억!
하지만 던진 팔은 미끼였다. 소녀가 팔에 집중한 사이 휴고의 발이 그녀의 배에 꽂혔다.
휴고는 공중에 붕 뜬 소녀를 뒤쫓고는 두 손을 모아 그대로 내려쳤다.
꽈앙!
강렬한 소리와 함께 소녀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착지한 휴고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휴고의 눈이 에단을 바라봤다. 피어오르던 귀화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 상태가 돼도 반항을 안 하는구나.’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에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헨리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휴고의 입장은 달랐다. 휴고는 에단에 대한 공포가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휴고가 머뭇거리다가 곁으로 다가왔다.
크르르.
아직 굶주려 있다는 듯 휴고의 눈이 노랗게 번들거렸다.
“시끄러워.”
뚝.
에단의 한마디에 휴고의 으르렁거림이 귀신같이 멎었다.
“너 되게 무서운 놈이구나. 아주 손속에 자비가 없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저런 어린애를 패냐?”
“…….”
에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아이도 저렇게 무자비하게 패 버릴 정도면 건장한 성인은 말할 것도 없겠네.”
에단의 시선은 한니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니발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협상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에단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새끼.”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아직도 고개가 빳빳하네.”
에단이 살기를 일으켰다. 한니발이 저항하려고 발버둥질했지만, 에단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에단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한니발의 눈에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제야 눈이 좀 마음에 드는데?”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이미 손가락의 상처는 아물어 핏방울의 흔적만 보였다.
“뭘 원하냐고?”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빚 변제.”
“…….”
황당함이 치밀었다. 헨리가 얼마만큼의 빚을 졌는지 한니발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택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으로 모자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래, 지금 상황만 모면하면.’
얼마든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한니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벌써부터 구라를 치네?”
화악!
에단의 손이 순식간에 한니발의 멱살을 붙잡았다. 한니발이 저항하기 위해 죽은 마나를 끌어올렸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내가 너를 뭘 믿고. 너 같은 놈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럼 왜…….”
에단이 멱살 쥔 손을 놓음과 동시에 기운을 거뒀다. 가슴을 조이던 기운이 거둬지자 한니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주위는 아직 꽤나 어두웠다.
“일단 불 좀 켜 봐.”
“…….”
한니발이 천천히 움직이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튼짓하려면 어디 한번 해 보든가.”
“…….”
이윽고 주변이 밝아졌다.
헨리가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막았다.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어리잖아?’
그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이 켜지자 에단은 적당한 장소에 걸터앉았다. 한니발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모르겠군.’
에단의 얼굴을 봐도 짚이는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턱을 괴며 물끄러미 한니발을 바라봤다.
“정말 남의 등 잘 쳐 먹게 생겼네.”
“…….”
한니발의 외모는 에단이 예상하던 그대로였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단정하게 기른 콧수염. 계산적으로 보이는 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한니발의 평정심이 지금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단이 오만한 표정으로 한니발에게 턱짓했다.
“뭐 해? 앉아.”
“…….”
한니발이 눈을 질끈 감고서는 에단 앞에 앉았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거상이었다.
돈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다. 일국의 왕도 한니발에게는 예의를 갖추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한니발이 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처음에는 레벨린이 보낸 사자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니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레벨린의 세력을 무너뜨린 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최근 한니발의 행보는 레벨린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 알아차릴 리가 없었으니까.
한니발의 질문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야, 의자에 앉게 해 줬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
“정신 차려. 뒈지기 싫으면.”
“……내가 죽으면 그쪽도 무사하기는 힘들…….”
“시험해 볼까?”
에단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한니발이 헛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
한니발의 대답에 에단이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내가 뭐 때문에 찾아왔냐고 물었지?”
에단이 품속에서 서류 더미를 끄집어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한니발이 서류를 향해 힐긋 보더니 에단을 응시했다.
“읽어 봐.”
에단의 말이 떨어지자 한니발이 서류 더미를 잡고 읽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한니발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세간에 퍼져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 서류 안에 가득했다.
“이것 외에도 꽤나 재밌는 짓들을 벌이고 있던데?”
한니발이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을 응시하는 그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한니발의 감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표정 관리가 안 되네?”
“……이걸로 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내가 뭘 원하는지는 알고 찔러보는 거야?”
“……결국 원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 아닙니까?”
“돈과 권력?”
한니발의 말에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블란테의 위상은 이미 일개 국가와 맞먹었다. 가지고 있는 재화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블란테가 마음먹고 돈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다.
‘제국쯤은 되어야지.’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그따위가 아니었다. 한니발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상대를 간파하는 것이 상인으로서의 가장 큰 덕목이었고, 한니발은 그동안 자신의 안목으로 많은 이득을 취해 왔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지?’
자신이 쥐고 있는 게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지고 오는지를 모르는 건가?
“내가 원하는 건 별로 없어.”
에단이 손가락을 들어 쓰러져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쟤, 붉은 곰이지? 어떻게 한 거야?”
“…….”
“짱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뒈지기 싫으면.”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저 아이 또한 레벨린이…….”
“내가 짱구 굴리지 말라고 했지.”
쾅!
에단이 테이블을 걷어찼다. 테이블이 산산조각 나며 한니발의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
에단의 시선은 한니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레벨린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겠지. 그런데 네가 정말 아무것도 몰라? 지랄하지 마. 그래서 애들 약점을 줄줄이 들고 쟤를 이용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나? 네가 생각하는 게 눈에 훤한데 내가 대신 말해 줄까?”
“…….”
“영지전은 핑계일 뿐이고, ‘지하’의 문을 열려고 하는 거 아니야? 레벨린이랑은 상관없이. 왜? 연락이 두절됐으니까. 아주 좋은 명분이겠지.”
“그, 그걸 어떻게…….”
“왜 몰라. 쓰기 좋은 패도 저기 있고, 돈과 정보, 더군다나 명분까지 있네?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언제 오겠어.”
“…….”
에단의 말에 말문이 막힌 한니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정곡을 찔렸다.
콰악!
에단이 한니발의 목을 움켜쥐었다. 에단의 눈에서 형형한 귀화가 타올랐다.
“그런 주제에 어디서 이빨을 까고 있어?”
뒈질라고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