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창단 준비 (2)
의뢰를 마친 뒤 에단은 곧바로 영지를 나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휴고는 아직도 찝찝함을 지우지 못한 듯 에단을 지그시 응시했지만, 에단은 해명을 바라는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에단이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 안에는 음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에단이 인상을 구겼다.
“얘들 상태가 왜 이래?”
에단이 헨리를 향해 묻자, 헨리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에 남아 있을 사람들이랑 나갈 사람들이 나뉘면서 저렇게 됐네요.”
“허, 그렇다고?”
한쪽은 씰룩이는 입술과 한쪽은 침울하기 그지없는 어두운 표정.
척 봐도 남아 있는 이들이 입술을 씰룩이는 쪽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묘하게 괘씸했다. 에단이 줄리엔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나눴는데?”
에단의 질문에 줄리엔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큼큼, 게임은 공평하게 팔굽혀펴기로…….”
“이긴 사람들이 남아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핫. 어쩌다 보니까 저도 남아 있게…….”
“미쳤냐?”
“네?”
줄리엔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이긴 놈이 남아 있어?”
“저희끼리 정하라고 하셔서…….”
“말대꾸를 해?”
에단이 쌍심지를 켜며 바라보자, 줄리엔이 곧바로 찌그러졌다.
“이긴 놈들이 따라와.”
에단의 선언에 순식간에 희비가 엇갈렸다.
음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산적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희희낙락거리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에단 앞에서 불만을 토로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산적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애들은 그만큼 성과를 보여야겠지?”
에단이 가문의 대장장이에게 의뢰했던 물건들과 그것들을 이용한 훈련법들을 전달했다.
“만일 여기서 훈련은 안 하고 놀고먹었다는 게 밝혀지면…….”
에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산적들이 침을 삼켰다.
“그,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래? 확실하지?”
“확실합니다!”
산적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믿어 줄게 그 정도로 자신하는 만큼 성과도 보여 주겠네?”
“……성과 말입니까?”
“야, 너 얘들 기록 외우고 있지?”
에단의 물음에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얼추 알고 있긴 합니다.”
“그거의 두 배.”
에단의 말에 산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두 배 말입니까?”
“왜 못 하겠어?”
“하, 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으면서 왜 약한 소리야?”
“…….”
악마 같은 새끼!
산적들이 이를 갈며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산적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다녀올 때까지 열심히 하고…….”
에단이 줄리엔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슬슬 움직이자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 * *
에단은 일행과 산적들을 이끌고 가문에 들렀다. 말과 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에단이 다시 가문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간만에 봐도 우락부락한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룬이었다.
“……오랜만이다.”
모룬이 최대한 위엄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꼴에 무게 잡기는.’
하지만 에단이 느끼기에는 같잖을 뿐이었다. 에단이 뚜벅뚜벅 모룬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과거에는 머리 하나 이상의 큰 차이가 났던 모룬과 에단이었지만, 어느새 눈높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에단이 모룬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장자인 모룬에게 하는 언행치고는 가벼웠지만, 모룬은 그것을 지적할 수 없었다.
“……가문에는 무슨 일이지?”
“볼일이 있어서. 왜, 궁금해?”
알려 줄까?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모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됐다. 뒤에 있는 녀석들은 뭐지?”
“아, 이 녀석들?”
에단이 뒤에 서 있는 산적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산적들은 얼어 있는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하인들?”
“하인이라고?”
모룬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하인들을 저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닌단 말인가.
“일단은 하인이라고 할 수 있지.”
“……이상한 짓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워?”
에단은 조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모룬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로를 노려봤다. 에단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이상한 짓을 꾸미면 뭐 어쩌려고?”
명백한 도발이자, 비아냥.
과거 같았으면 거칠게 분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룬은 에단을 향해 분노를 토해 낼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기사부터 가문의 수행원과 사용인까지.
모두가 모룬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눈이었다. 이 정도의 모욕을 당했다면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 됐다. 그게 바로 블란테였다.
하지만 모룬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모룬의 발을 붙잡았다.
모룬이 제자리에 서서 부들거리고 있자, 에단이 모룬을 지나서며 어깨를 두드렸다.
“시비를 털고 싶으면 확실하게 털어.”
“…….”
빠드득.
모룬의 이가 부서질 것처럼 갈렸다.
에단이 모룬을 스쳐 지나가자, 산적들도 덩달아 긴장하며 에단의 뒤를 따랐다.
‘……저 새끼는 미친놈이 분명해.’
저 객기가 가문에서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룬이 에단의 형이라는 것은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까불지 말자.’
가문의 적통, 그리고 심지어 장자로 보이는 모룬에게도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을 보며 줄리엔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나름대로 파란만장하고 거친 삶을 보냈다고 자부하는 줄리엔이었다.
게다가 산적 두목 노릇을 하면서 카리스마와 담력 또한 자부했지만.
바들바들.
블란테에 들어서자 모든 게 무의미했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시선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블란테가 어째서 대륙 제일의 무력 집단이라고 불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이런 곳 근처에서 도적질을 하라고?’
붉은 곰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줄리엔만이 아니었다. 산적들도 원망 어린 눈초리로 줄리엔을 노려봤다.
‘뭐? 걸릴 일이 없어?’
‘블란테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 있는 기사 하나만 와도 다 죽었겠다!’
‘저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씹어 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줄리엔은 부하들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휴고에게 찰싹 붙었다.
“……왜 저한테 붙으시는 거죠?”
“에단 님께 붙을 수는 없어서…….”
…….
휴고와 줄리엔이 어색한 눈빛을 교환했다.
* * *
가문에 들른 김에 산적들도 정비했다. 이제 산적이라는 타이틀을 탈피할 예정이니만큼 저런 꾀죄죄한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같이 다니기 쪽팔리기도 하고.’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을 보면 상종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졌었는데, 모두 깨끗하게 씻기고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히니 나름대로 봐줄 만한 모습이 나왔다.
“……너 원래 그렇게 생겼냐?”
“왜, 잘생겨졌냐?”
“아니. 깨끗해지니까 더 못생겼는데? 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자식이!”
티격태격하는 산적들을 보며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냐?”
순식간에 다툼이 멎었다. 에단은 조용해진 그들을 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차를 끌고 왔다.
“자, 여기서 내가 마부를 할 수 있다. 거수.”
에단의 말에 산적들이 재빠르게 손을 들었다. 여행을 걸어서 다니는 것보다야, 마차 위에서 말을 모는 게 훨씬 피로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냥 줄리엔 네가 해라.”
“알겠습니다!”
에단이 대충 지목해 줄리엔을 뽑자, 원망의 눈초리가 줄리엔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고생만 시키고!’
‘두목이면 다야? 정작 자기 때문에 이 꼬라지가 됐는데!’
뒤통수가 따가워질 정도의 시선이었지만, 줄리엔은 최선을 다해 무시했다.
에단과 헨리가 마차 위에 올라섰지만, 이번에도 역시 휴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아.”
휴고가 침울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도보로 움직여야 하는 운명이었다.
“아∼ 역시 마차 위가 최고네요.”
헨리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장시간 휴고 위에 올라타 있었던 만큼 마차라는 것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출발해.”
“알겠습니다.”
에단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고, 줄리엔이 대답했다. 줄리엔이 고삐를 쥐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적들도 마차의 주변에서 따라 걸었다.
에단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열 갖춰 걸어라. 산적 티 내지 말고.”
이제는 도적들이 아니었으니, 그에 걸맞은 행동 양식이 필요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지만 평생을 거칠게 살아온 산적들이었고, 몸에 밴 습관은 한순간에 바꿀 수…….
“할 수 있게 해 줘?”
에단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산적들의 걸음걸이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터벅터벅.
대열을 갖춘 채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리엔은 멍한 표정으로 그런 산적들을 바라봤다.
‘……저게 가능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한순간에 저렇게 바뀐단 말인가.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산적들을 향해 말했다.
“할 수 있으면서 약한 소리야. 이제부터 조금이라도 거친 말투나 행동이 나오면 뒈진다.”
‘……네가 제일 거칠어!’
속에서 욕지기가 튀어 올랐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속의 외침이었다.
줄리엔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저기…….”
“왜?”
“방향은 어디로 잡으면 됩니까?”
“아, 그걸 말 안 해 줬구나. 어디였지? 체이베르였나?”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줄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이베르라면 대충 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왜 가시는 거죠? 듣기로는 최근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심상치 않은 게 아니라 영지전 한다던데?”
“……영지전이요?”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는 했지만, 저 말인즉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리였다.
줄리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런 곳을 도대체 왜 가는 겁니까?”
“왜 가겠어. 우리도 한자리 차지하러 가는 거지.”
줄리엔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전쟁을 하러 간다는 말을 뭐 이리 가볍게 말한단 말인가.
“브, 블란테가 참전하는 겁니까?”
“블란테가 왜 나와?”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왜 데리고 왔는데, 이건 블란테랑은 조금도 상관없어.”
“그,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용병으로 거기에 참전할 거니까.”
“요, 용병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설마 용병으로 영지전에 참전한다니.
“맞다. 슬슬 이름도 생각해야겠지? 이름은 흠……. 뭐, 가면서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지.”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어디, 몸값 한번 올려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