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서열 정리 (2)
렉사르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에단이 렉사르를 비웃으며 사슬을 움켜쥐었다. 마치 짐승의 목줄을 움켜쥔 것 같았다.
‘제기랄!’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에단의 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안했다. 마나 또한 최대한으로 활용했건만 대처할 수가 없었다.
렉사르가 사슬을 놓았다. 품 안에서 섬뜩한 외향의 톱날 검을 끄집어냈다.
“하여간 겉멋하고는.”
에단이 피식 웃으며 사슬을 놓았다. 렉사르의 검격이 벼락처럼 에단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마나가 넘실거리는 일격이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저것은 명확한 살초였다. 설마 가문의 적통인 에단을 향해 살초를 던지다니.
쾅!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 에단이 지면을 내려찍었다. 에단의 발에는 마나가 실려 있었다.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진이 인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에단이 왼쪽 손등으로 칼날 검을 후려쳤다.
쾅!
이번에도 강렬한 굉음과 함께 렉사르의 검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렉사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끝이야?”
그럼 이제 내가 보여 줄 차례인데.
에단이 살벌한 웃음과 함께 렉사르에게 접근했다. 렉사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짐승 같은 누런 동공이 에단의 몸을 주시했다.
“너무 티 내는 거 아니냐?”
에단이 손바닥을 펼쳐 렉사르의 시야를 가렸다.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에단의 손을 피해 시야를 확보하려는 순간, 복부에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커헉!”
렉사르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장이 진탕되는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었다.
퍼엉!
렉사르의 신형이 거칠게 날기 시작했다. 렉사르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에단이 질주했다.
타다다닷!
순식간에 렉사르에게 도달한 에단이,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고 있어?”
후웅!
에단이 멱살을 움켜쥐자, 렉사르의 세상이 반전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을 느끼며 렉사르는 암담함을 느꼈다.
쾅!
렉사르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대지가 다시금 요동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휴고가 눈을 가리며 애도를 표했다.
‘저런 미친 새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에단이 과거보다 성장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달라진 기세만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나 압도적일 줄이야.
전투의 양상은 에단이 압도적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렉사르의 가슴팍에 에단의 발이 올라갔다.
꾸욱.
에단이 발을 지그시 누르자, 렉사르가 입을 벌리며 신음성을 토해 냈다.
“뭐야, 너 이거밖에 안 돼?”
실망한 듯한 에단의 어조에 렉사르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다.
“노려보면 어쩌려고.”
꼬우면 좀 세든가.
콰직!
에단이 발로 렉사르의 배를 밟았다.
“크억!”
렉사르의 입이 벌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에단이 쓰러져 있는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렉사르와 에단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렉사르의 눈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사납고 끈적이는 안광으로 에단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마음에 드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렉사르를 노려봤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렉사르는 에단을 알고 있다.
한번 먹잇감은 영원한 먹잇감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에단은 자존심만 강한 피식자였다. 블란테와 어울리지 않는 약자, 그게 바로 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렉사르의 원초적인 질문에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난 원래 더럽게 셌어.”
이 몸뚱어리의 주인이 약했을 뿐이지.
류태신은 단 한 번도 약자의 위치에 선 적이 없는 포식자였다. 그것은 지구에서도, 여기서도 매한가지였다.
감히 자신에게 어금니를 드러내는 상대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에단이 움켜쥔 멱살을 놓자, 렉사르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섰다.
“자, 아직도 만족 못 했지?”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털며 말했다. 그 모습에 렉사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믿을 수 없었다.
렉사르는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신의 본능을 부정했다.
렉사르가 다시 한번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너 무슨 도라이몽이냐?”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무슨 놈의 무기가 끝도 없이 나온단 말인가.
“…….”
렉사르는 대답 없이 날붙이를 꺼냈다. 이번에 꺼낸 건 이전과 비교해서 꽤나 단출한 무기였다.
짧은 톱날 단검.
‘톱날 한번 더럽게 좋아하네.’
에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뒤 자세를 갖췄다.
“어디 납득할 때까지 한번 해 보자고.”
여기서 죽여 버리기는 아까운 녀석이다. 가주와 첸, 네이드를 제외한다면 가문 내에서 최상위 전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매가 약이지.’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서열 정리. 그러기 위해서는 렉사르가 먼저 나서서 굴종해야만 했다.
‘그러면 어디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렉사르가 말없이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고, 두 사람 모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지루한 대치 상황에 에단은 권태감을 느꼈다.
“에휴.”
짧은 한숨과 동시에 에단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렉사르의 눈이 커지며 누런 동공이 에단을 좇았다. 에단의 이동 경로를 향해 렉사르가 단검을 휘둘렀다.
달려 나가던 에단이 순식간에 제동을 걸었다. 에단의 신형이 뚝 하고 멈췄다.
렉사르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스쳐 갔고, 단검이 에단의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빠악!
에단의 다리가 렉사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렉사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프냐?”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카프 킥.
상대가 먼저 자멸하고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이 기술이 가장 베스트였다.
에단은 렉사르를 다리부터 천천히 좀먹을 생각이었다.
쐐액!
렉사르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에단이 렉사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제 좀 예상이 되나?”
렉사르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거리를 벌리려 들었다. 하지만 에단의 발이 더 빨랐다.
푸욱!
이번에 노린 곳은 정강이가 아니었다. 에단의 발끝이 렉사르의 명치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박혔다.
“커헉!”
렉사르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에단은 그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빠악!
사정없이 휘두른 로우 킥,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렉사르가 다리를 절뚝이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에단이 악마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닦달했다.
― 어쩌다가 이런 놈이…….
페온이 에단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에단의 본성에 감탄만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감상도 다르지 않았다. 휴고는 아예 보기가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힘내시길.’
휴고가 렉사르의 명복을 빌었다. 에단이 저 표정을 짓게 되면 만류할 수가 없었다.
빠악!
“커헉!”
빠아악!
“크억!”
빠아아악―!
“어쭈? 발이 멈춘다?”
렉사르가 절뚝이면서 몸을 움직이지만 소용없었다. 최적의 컨디션일 때도 에단을 뿌리치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된 하체로 에단을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퍽!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의식을 집중하고 있을 때마다, 복부에 발이나 무릎이 꽂혔다.
“꺼, 꺼어억…….”
렉사르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호흡에는 제약이 걸렸다.
렉사르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 대신 미약한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에단이 쪼그려 앉아서 렉사르를 내려 봤다.
“뭐 해? 일어서지 않고?”
렉사르가 고개를 들어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렉사르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만족할 때까지 해 주겠다고.”
그 모습에 렉사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공포라는 것을.
* * *
렉사르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에단은 손바닥을 털어 내며 렉사르를 흘겨봤다.
‘대충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면 반항심은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았다. 렉사르의 본성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블란테의 정체성과도 흡사한.
약육강식.
이번에 서열을 확실히 정리하고 입증했으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걸리는 건 나중에 밝히면 그만이야.’
렉사르의 존재는 이질적이다. 원작에서 몇 차례 언급되던 떡밥이 있었으나, 회수되기 전에 류태신은 에단에게 빙의되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니.’
쯧.
에단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에단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표정이 묘했다.
“야, 카론.”
에단이 대뜸 이름을 부르자, 카론의 몸이 움찔했다.
“왜, 왜?”
카론이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이상해?”
“어, 존나.”
‘하다 하다 표정 가지고 난리냐!’
카론이 속으로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만 후볐다.
“쟤 깨우면 알아서 잘 달래고. 나는 먼저 간다.”
“……어디로 가는데?”
“영지로.”
“영지에는 왜?”
카론의 물음에 에단이 살벌하게 웃었다.
“궁금해?”
“……아니, 몰라도 될 것 같아.”
“잘 생각했어. 가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으니까.”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기사들을 훑어봤다.
‘마차를 타고 가면 느리겠지?’
아무리 에단의 체력과 신체 능력이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한들, 뛰어다니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적당한 놈 하나 마부로 부리면…….’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에단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이 몸을 돌려 휴고를 향해 다가갔다.
“돌아가자.”
“……넵.”
휴고는 한 차례 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거침없이 구타를 퍼부었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니…….
경외심을 넘어서 공포까지 느껴졌다. 휴고가 고개를 피한 채 서 있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가자.”
에단이 물끄러미 헨리를 바라보자, 헨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시선을 뜻을 알아차린 헨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또 업혀요?”
“나한테 업힐래?”
“……아, 아니요.”
헨리는 휴고에게 다가가 등 위에 폴짝 올라탔다.
‘……말이 된 기분이네.’
휴고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에단에게 토로할 수는 없었다. 괜히 꼬투리를 잡혀 렉사르처럼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가자.”
에단이 지면을 박차자 순식간에 블란테의 기사들과 멀어졌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단에게 따라붙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쟤네 뭐야?”
……무슨 사람이 말보다 빨라?
셋의 모습이 벌써 점으로 보였다. 카론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다짐했다.
‘진짜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에단과 엮이면 좋은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