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서열 정리 (1)
협상의 탈을 쓴 협박이 끝나자,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에단과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았다. 에단이 언변이나 심계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 그리고 그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
그 두 가지를 갖추고 있었기에 에단과의 협상은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우리가 굽히기도 했고.’
정보 길드는 에단의 휘하에 있었다.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
‘세상은 격동하고 있어.’
그리고 그 격동에는 블란테가, 아니, 에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블란테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세간의 시선은 블란테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이들은 블란테가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저 장부.’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분명했다.
‘판도가 바뀌겠군.’
그 블란테가 명분이라는 검을 들고 휘두른다니. 상상만 해도 섬뜩함이 절로 들었다.
‘……그건 그렇고.’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에단이 물었다.
“왜 갑자기 한숨이야?”
― ……잭슨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 녀석?”
기억하고 있었다. 꽤나 봐줄 만한 격투술을 구사하던 녀석이기도 하고, 에단이 정보 길드와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준 녀석이었으니까.
“기억하고는 있는데 무슨 일이지?”
― 최근 블란테와 접촉을 시켰는데,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연락 두절?”
에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린애나 아녀자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실종을 당한단 말인가.
‘아버지가 처리했을 리는 없고, 산맥을 오르다가 실종됐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만일 그랬다면 빈센트가 먼저 언급을 했을 터.
‘뭐, 별다른 일은 없겠지.’
있어 봤자 동굴 안에서 시답잖은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어차피 한번 들를 생각이었으니까.’
에단이 턱을 긁적이며 생각하다 물었다.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하냐?”
― 네?
“아니, 이제 와서 말하면 어쩌라고?”
― 그게 무슨…….
“쯧, 귀찮게 하네. 어차피 가문에 들를 생각이 있었으니까 가긴 하겠는데, 다음에는 미리미리 잘 좀 하자? 아, 이건 그 녀석 찾으면 건네주든가 할게.”
에단이 그대로 통신을 끊었다.
뚝.
* * *
부들부들.
수정구는 더 이상 에단의 얼굴을 투영하지 않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부들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 개 같은 놈아!”
메이가 괴성을 내질렀다.
* * *
“흠…….”
통신을 끊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가려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가문에 들를 생각이었다.
‘녀석들도 한번 봐야 하고.’
시킨 건 잘하고 있으려나?
동굴 속에서 훈련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가 보면 알겠지.’
시킨 걸 잘하고 있으면 맞지 않을 테고, 탱자 탱자 놀고 있다면 뒈지게 맞을 테니까.
“그러려면 좀 빨리 움직여야겠는데?”
일행은 마차가 없다. 심지어 요리를 담당하던 네이드가 없고, 그를 보조하던 가토도 없었다.
블란테의 영지는 대륙의 끝 쪽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 중심에 가까운 아카데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헨리를 바라봤다. 멀뚱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단이 이마를 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휴고야.”
“네? 무슨 일이시죠?”
“헨리 업어.”
“……네?”
이번에 대꾸한 것은 헨리였다. 헨리의 반응에 에단이 날 선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 굶고 싶어?”
“……아니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헨리가 고개를 숙였다. 이 속도로 움직이다가는 답이 없었다.
“그럼 뛰자고.”
헨리가 군말 없이 휴고의 등에 업혔다.
타닷!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자, 휴고가 그 뒤를 따랐다.
“꺄아아악!”
헨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둘이 질주하는 속도는 어지간한 명마보다도 빨랐다.
‘하아.’
결국 고생은 나만 하는구나.
휴고가 한숨을 내쉬며 에단의 뒤를 따랐다.
* * *
블란테의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움직이고 있었다. 가문으로 복귀하는 무리들이었다.
기사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기사들 사이에 맴돌았다.
들려오는 것은 말발굽 소리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뿐이었다.
‘……더럽게 거슬리네.’
기사들이 한 인물에게 눈총을 주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주범이자, 귀에 거슬리는 소음의 원인이었다.
렉사르.
렉사르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걷고 있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녀석이라 궁금하긴 했는데, 막상 까고 나니까 별거 없잖아?’
렉사르는 전투 내내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심지어 에단에게 목덜미를 잡혀 바닥을 뒹굴었다.
‘추적하는 사자.’
블란테 내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이름. 그 실체는 생각보다 허무했다. 기사들은 저마다 조소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렉사르는 아무 반응 없이 묵묵하게 움직였다.
‘……제기랄 불안한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론은 초조함을 느꼈다. 뭔가가 불길했다. 이대로 놔두면 경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아무 사달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설 수는 없었다. 카론은 불안감을 삼킨 채 걷고 있었다.
‘제발 조용히 가자.’
카론이 보기에 렉사르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불쾌한 심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카론은 최대한 렉사르와 거리를 벌린 채 걷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접점이 없도록 만들고 있던 것이다.
‘제발 무탈하게 복귀하게 해 주세요.’
저 눈치 없는 기사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타다닷!
그때 지면을 박차는 소리에, 행군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렉사르였다. 렉사르가 흉흉한 얼굴로 뒤를 노려봤다.
“아직 이쪽에 있었네?”
다가서던 에단이 히죽 웃으며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여기에 왜!’
“이 새끼가 여기에 왜 있냐는 표정인데?”
웃음기 어렸던 에단의 얼굴이 사납게 돌변하자, 카론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정말이야!”
“농담 한 번 한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하, 하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하자, 카론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죽이고 싶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 할 뿐이지, 그 생각을 에단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에단이 천연덕스럽게 기사들을 훑어봤다. 개중에는 렉사르의 얼굴도 보였다.
‘숨길 생각도 없군.’
에단이 코웃음 쳤다. 렉사르의 표정은 이미 노골적이었다.
자신을 향한 적의.
그리고 뒤늦게 휴고가 다가오자, 휴고에게로 향한 누런 시선.
‘마침 잘됐어.’
실타래를 풀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언젠가는 해소해야 할 테니.’
주인을 무는 개 따위는 기를 가치가 없었다. 렉사르는 주인을 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렉사르의 주인이 에단이 아닌, 빈센트였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 되면 언제든지 반항하겠네.’
그러기 전에 제대로 교육을 해 줄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휴고를 바라봤다.
확실히 헨리를 업은 채 에단을 따라오기는 벅찼는지, 상기된 얼굴로 땀방울을 조금 흘리고 있었다. 휴고가 옷소매로 땀방울을 닦아 냈다.
‘아직은 무리겠군.’
만용을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괜히 휴고가 상처 입는다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뭐, 가끔은 명분을 생각해야겠지만.’
주인을 물려는 개한테까지 그 명분이 필요한가?
필요한 것은 몽둥이가 아니던가.
‘응어리를 푸는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풀려면 응당한 힘이 필요하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조소를 지었다. 에단의 얼굴을 바라보던 렉사르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야, 렉사르.”
에단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에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아, 제발…….’
카론이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가.
카론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에단의 눈이 휘었다.
“너, 인정 못 하고 있지?”
“무슨 말…….”
렉사르 특유의 거북한 목소리가 들리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목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됐고. 어떻게 할래? 이대로 숙이고 들어갈래, 아니면 한 번 더 해볼래.”
“…….”
“이건 기회를 주는 거야. 오늘 여기서 처발리면 그냥 너는 끝인 거고.”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는 건 나고. 너 설마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단이 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알아서들 피해.”
에단의 말이 끝나자, 가장 먼저 카론이 부리나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는지 몸을 피하며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아, 도련님.’
휴고도 한숨을 내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이제 내려 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 네…….”
헨리가 휴고의 등 위에서 내린 뒤 고개를 저었다.
“휴우, 진짜 십년감수한 기분이네요.”
에단과 휴고가 질주하는 속도는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경주마보다도 빠른 속도를 겪다가 내려오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래도 이걸 놓칠 수는 없지.’
헨리가 눈을 빛냈다. 이런 흥미로운 상황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휴고가 묘한 시선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달라졌다. 과거처럼 겁에 질려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뀌었네.’
달라진 것은 휴고도 매한가지였다. 헨리도, 휴고도, 에단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둘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궁금함이 들었다.
에단이 팔장을 풀며 손을 뻗었다. 에단이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뭐 해? 나 바쁘거든?”
“……언제까지 건방을 떨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그래, 기대할게.”
차르르륵.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렉사르의 품 안에서 수많은 칼날이 이를 갈았다.
개중 몇 개의 칼날이 에단을 향해 비산했다. 불시에 튀어나온 공격이다. 에단이 가볍게 고개를 젖혀 피해 냈다.
촤르르르륵!
렉사르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에단을 향해 쏘아진 날붙이에는 모두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금속으로 된 칼날이 마치 올가미처럼 에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사슬과 칼날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거지?”
렉사르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하자,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긴장이 되게끔 만들어 줘야 내가 여유를 부리지 않겠어?”
콰직!
에단이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렉사르의 입가가 비틀렸다. 거칠게 연마된 사슬이다.
이전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마나까지 입혀 놨다. 그런 사슬에 손을 가져다 대다니.
하지만 렉사르의 조소는 금세 무색해졌다. 에단의 왼손이 사슬을 움켜쥐자, 섬뜩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콰드드드득!
불똥이 거칠게 비산했다. 에단이 악력을 가하자 춤추던 사슬이 멈췄다.
뚝.
렉사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는 학습 능력이 없냐?”
꽈악!
에단이 사슬을 움켜쥔 채 끌어당겼다. 렉사르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에단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쭈욱!
렉사르가 허무하게 끌려갔다. 에단과 렉사르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렉사르를 향해 에단이 말했다.
“반갑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