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뜻밖의 수확 (1)
휴고가 연무장 밖을 나섰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카데미는 넓었다. 광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헨리 씨는 도대체 어딜 가 계신 거야.’
헨리를 향한 원망도 조금 들었다.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대체 어떻게 찾…….’
킁킁.
휴고의 코가 벌렁거렸다. 헨리를 찾으려고 마음먹으니 그녀의 채취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풀 내음 같은 풋풋함과…….
‘……술 냄새?’
코를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가 느껴진다.
“설마…….”
휴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큰일 났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사실을 에단이 알게 되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불똥이 튈 거야.’
헨리가 혼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에단이 버릇처럼 말하는 ‘연대책임’이 문제였다.
휴고가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저기……!”
그때 한 여학생이 휴고의 곁으로 다가왔다. 휴고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힐긋 옮겨졌다.
평소의 휴고라면 다가온 학생의 말을 들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타닷!
휴고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휴고의 신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학생은 눈을 끔뻑이며 사라진 휴고를 바라봤다.
* * *
‘슬슬 그쪽 일들도 정리해야지.’
가시가 박힌 것처럼 찝찝했다. 진작에 뽑았어야 할 잔가시였지만, 다른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대충 묶어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잘된 일이었다. 하나씩 따로 해결하려 들었으면 머리털이 빠졌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엿 같네.’
원래라면 자신이 아닌 주인공이 개처럼 굴러야 했다.
그런데 주인공이란 놈은 온데간데없고 자신만 지금 뭐 빠지게 일하고 있었다.
‘대충 틀어막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요행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지 못했다.
‘렉사르가 벌써 움직일 줄은 몰랐어.’
추적하는 사자.
렉사르는 주인공을 괴롭게 하던 악역 중 하나였다. 존재 자체가 떡밥이며 이질적인 캐릭터.
‘생각 없는 작가 놈.’
어째 제대로 회수한 떡밥이 없었다. 던지는 건 작가 놈이고, 회수하는 건 주인공의 몫이었는데 그 사이에 낀 애먼 자신만 고생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가토에게 시선을 던졌다.
에단이 물끄러미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가 흠칫하며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가토야.”
“네.”
“좋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가토를 바라봤다. 가토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리사를 이긴 게 꽤 흥분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실력 많이 늘었던데?”
“감사합니다.”
“그래, 성장한 것은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지.”
가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갑작스러운 금칠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기쁘기보다는 불안이 먼저 들었다.
“오랜만에 나랑도 몸 좀 풀어 볼까?”
“……네?”
“잘 안 들렸나? 간만에 몸 좀 풀자고.”
가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토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이미 몸은 충분히 풀린 것 같습니다. 구태여 더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가토야.”
“네, 도련님.”
“시끄럽고 그냥 검 들어.”
“…….”
가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토가 어두운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우득, 우드득.
에단이 히죽 웃으며 손을 풀었다.
‘……제기랄.’
가토는 휴고가 원망스러웠다.
* * *
“크으으……. 이거지!”
헨리가 입술을 닦아 내며 탄성을 내뱉었다. 비록 변두리로 좌천되었다고는 하나, 헨리도 아카데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과거에는 그 시간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 같았다. 취업을 기념하며 큰맘 먹고 질렀던 고급술.
아카데미 안에 꽁꽁 숨겨 뒀던 녀석이다.
‘보고 싶었다.’
그동안 이 녀석을 얼마나 되찾고 싶었단 말인가?
하지만 명분과 기회가 없었다. 아카데미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실적도 없었기에 자포자기한 상태로 여관이나 주점을 전전했다.
‘꼴좋다! 레벨린 그년 그럴 줄 알았어.’
이번 일에 대해 대략적인 경위를 들었다. 레벨린이 저지른 악행들과 수작질.
‘……제기랄.’
통쾌하기보다는 입맛이 썼다. 헨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에 술병을 갖다 댔다.
술이 목울대를 넘어가려는 찰나, 덜컥 문이 열렸다. 헨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문을 열고 등장한 자는 휴고였다.
“헨리 님! 여기서 대체 뭘 하고……!”
휴고가 큰소리를 내며 갑자기 들이닥치자, 헨리는 놀라 목을 부여잡았다.
“커, 커헉!”
사레가 크게 들린 것인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휴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헤, 헨리 씨! 괜찮으십니까?!”
휴고가 안절부절못하며 급히 다가가려 했지만, 헨리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무력한 그녀가 아니었다. 이까짓 상황쯤은 충분히 대처할 수가 있었다.
헨리가 마나를 끌어올렸고, 휴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풀 내음 같은 풋풋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마나가 흘러나왔다. 헨리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며 휴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깜짝 놀랐네요…….”
“놀란 건 휴고 씨가 아니라 저 아닌가요? 그런데 대체 여기는 어떻게…….”
“큼, 크흠. 에단 도련님께서 헨리 씨를 찾습니다.”
“저를요? 대체 왜……. 어? 근데 저건 뭐죠?”
헨리가 벽 쪽을 가리켰다. 벽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휴고도 그제야 발산하는 빛을 눈치챘는지 눈을 끔벅였다.
“……저게 뭐죠?”
헨리가 술병을 놔두고 몸을 일으켰다. 올라오던 취기는 마나를 이용해 모두 날려 버렸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벽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뭐지?’
느껴지는 기운.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했다. 헨리가 가진 기운은 복합적이었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지지 않았다. 헨리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마나를 주입했다.
덜컥.
벽이 쑥 하고 들어갔다. 옆에 다가온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헨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떼자 공간이 생겼다.
헨리가 긴장과 흥분 가득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설마 숨겨진 금은보화가?’
당당해질 수 있는 기회.
더 이상 에단에게 책을 잡힐 이유가 없었다.
‘혹시라도 빚을 갚고 남는다면…….’
꿀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헨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작은 공간이 보였다.
“아…….”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본 헨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작은 공간에 있는 것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럼 그렇지. 뭐야 이게.”
하아.
헨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었다.
그사이 휴고는 책을 꺼내 읽어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서류들이었지만, 휴고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다.
“뭔데 그래요? 그래 봤자 돈 안 되는…….”
헨리가 책을 건네받아 눈으로 훑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본 책의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게 무슨……?”
헨리의 입이 천천히 벌려졌다.
* * *
가토가 바닥에 엎어진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가토의 몸이 가늘게 경련했다.
‘괴, 괴물…….’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수준은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극명한 실력 차이. 진검을 들고도 에단의 옷자락조차 건들지 못했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곡소리가 절로 나오게 얻어터졌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에단의 폭력은 예술에 가까웠다.
이렇게 죽을 것같이 아픈데 다친 곳은 없었으니까.
가토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그때 헨리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에, 에단 님!”
달려오던 헨리와 휴고가 엎어져 있는 가토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
헨리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지?”
“그, 그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호오, 지금 말을 돌리는 거야?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
“죄, 죄송…… 앗, 잠깐만 이것부터 봐 주세요!”
헨리가 몇 권의 책을 에단에게 건넸다. 에단은 헨리를 흘겨보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에단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에단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이거 어디서 찾았냐?”
“그게…… 꿍쳐 뒀던 술을 마시다 보니 어쩌다……. 아, 그게 아니라……!”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잘했어.”
에단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도 좋을 정도로 책에 적힌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뜻밖의 선물을 주고 가는군.’
레벨린이 급하게 떠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쉽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장부였다.
그것도 뇌물과 비자금 등의 거래 내역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더럽게 많이도 해 먹었네.’
받은 것도 있고, 매수한 것도 있었다. 장부에 적힌 이름들은 하나같이 거물들이었다.
‘아주 태평하시구먼.’
중앙 정계 귀족을 시작으로, 왕족과 신성 왕국의 주교들.
‘딱 이용해 먹기 좋은 놈도 하나 있네.’
한니발.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려 했던 녀석의 이름까지도 적혀 있었다. 오고 간 금화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발 걸치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깊게 들어와 있었네.’
안전한 곳인 줄 알고 머리를 들이민 곳이 사자의 아가리 속이었다.
에단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때, 휴고가 손가락으로 가토의 몸을 쿡쿡 찔러봤다.
‘……살아 있나?’
조금 걱정스러웠다.
* * *
교직원들이 보충되었다. 그것도 블란테의 정예이다. 검증이 필요하지 않은 인원들이다.
학생들의 불만도 사그라들었다. 블란테의 기사들 앞에서 볼멘소리를 내뱉을 만큼 간 큰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라의 부담이 크게 해소되었다.
‘정말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어.’
아카데미는 빠르게 정상화가 되어 갔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이 등장하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혼자서 모든 것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
에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밀라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대뜸 전하는 감사 인사에 에단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내가 말했지? 걱정하지 말라고. 뭐, 아직 안심하기는 이른 상황이지. 이제 시작이니까.”
“……네.”
에단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블란테가 나섰기에 얻은 안정화.
‘블란테이기에 얻을 수 있던 평화이지만…….’
블란테이기에 많은 반발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