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묘한 기류 (2)
리사와 가토가 연무장에 마주 섰다. 어느새 관중들도 꽤나 많이 모여들었다. 학생은 물론이고, 리사와 블란테의 기사들도 찾아왔다.
에단 곁에 에밀라와 네이드가 다가왔다.
“……이런 데서 농땡이를 치고 계셨군요.”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잠깐 숨 좀 돌릴 수도 있잖아.”
“하아.”
천연덕스러운 에단의 대답에 에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의 곁에 선 네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리사와 휴고를 바라봤다.
“리사 아가씨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름답게 자라 주셔서 정말 기쁘군요.”
“노인네처럼 말하기는.”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다.”
네이드가 작게 웃었다. 에단은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저 둘을 붙이시다니 의외로군요.”
“동생 자극 좀 시켜 주려고.”
“짓궂은 오빠군요. 아가씨 정도 실력이라면 조금 자만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이는 가토랑 엇비슷하잖아.”
“가토와 휴고는……. 또 자기 자랑이십니까?”
“눈치는 빠르네.”
에단이 씨익 웃었다.
리사의 실력은 출중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엘리트들만 모아 둔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도 적수가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가진 재능만 놓고 본다면 가토보다 윗줄이지.’
리사 자체가 원작의 주연급이니 당연했다. 원래라면 가토는 리사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말이지.’
리사는 아직도 가토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승부에 들어서기 전 오만이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이번 기회에 느낄 것이다.
에단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대련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 허리춤에 검 있잖아.”
“……진검으로 하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위험하실 텐데요…….”
걱정하며 내뱉는 가토의 말에 리사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적당히 손속을 두면서 상대해 줄 테니까.”
“…….”
리사의 태도에 가토는 더 이상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리사의 성격을 얼추 파악한 것이다.
‘후우…….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이런 점에서는 에단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스르릉.
리사가 검을 뽑자, 청명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가토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찬가지로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리사에 비해 비교적 날이 죽어 있는 검이었다. 여행 중에 지속적인 관리를 했지만, 잦은 전투로 인한 대미지는 피할 수 없었다.
리사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고,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리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리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쭈, 지금 여유를 부린다 그거지?’
리사가 에단을 흘겨봤다. 가토의 표정이 눈에 거슬렸다. 저 태연한 태도가 에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금방 울상 짓게 해 주지.’
어디까지나 친선 대련인 탓에 따로 심판을 두지는 않았다.
“선공은 내가 해도 되겠지?”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타닷.
가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사가 달려들었다. 빠르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이내 리사의 검이 화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검을 하나씩 받아 냈다.
챙! 채재재쟁!
기세를 탄 것은 리사였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리사를 보며 지켜보던 학생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리사야…….”
“그러게. 블란테의 기사를 상대로 저렇게 몰아붙이다니.”
학생들의 대화를 듣던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에단이 양옆에 서 있는 네이드와 에밀라를 번갈아봤다.
네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대련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에밀라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자의 솜씨를 보니까 교수로서 어때?”
“나무랄 데가 없군요. 테크닉과 기교가 매우 뛰어납니다. 그렇다고 기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체력 또한…….”
“그래서 리사가 이길 것 같아?”
“…….”
에밀라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런 괴물을 기른 거죠?”
에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검을 맞댈 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 검을 섞는 모습을 보자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둘의 실력 차이는 확실했다. 얼핏 보면 리사가 우세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상이었다.
리사의 검이 휘몰아쳤고,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개중에는 가토를 끌어들이기 위한 허초도 존재했다.
가토는 그런 것에 유혹당하지 않았다.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오롯이 진짜만을 보며 쳐 냈다.
찰나의 순간 몰아치는 수많은 칼날의 폭풍 속에서도 가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런 평정심은 웬만한 기사들도 갖추기 어려웠다.
‘누가 기른 녀석인데.’
에단이 뿌듯한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가토는 고민하고 있었다. 매서운 폭풍 속에도 흐름은 보였다. 가토는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스읍!”
리사가 다시금 호흡을 삼켰다. 그녀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커다란 공격을 퍼부었으니, 슬슬 체력이 바닥나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뭐지 이 녀석?’
뭔가 이상했다. 솔직히 얕잡아 봤다.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고, 그렇기에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을 압도적으로 이겨서 재수 없는 오빠의 코를 눌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세를 탄 것은 자신이었다. 전투에 있어 흐름과 기세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 기세가 인위적이었다. 껄끄러움이 느껴졌고,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은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 차례 멈칫하는 순간.
쾅!
가토의 눈빛이 돌변했다. 가토의 발이 지면을 내리찍었다. 순간 몸의 중심점이 단단해지며 지금껏 물러서던 가토가 자신의 영역을 갖췄다.
‘제길, 여유를 줘 버렸어.’
빼앗긴 영역이야 되찾으면 그만이었다. 리사는 여성의 몸이었지만 힘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리사의 검이 가토의 검과 부딪쳤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순간 폭발음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쾅!
밀려난 것은 리사였다. 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가 찢겨 나간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힘 싸움에서 완패했다. 아무리 가토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고 한들, 이 정도 격차는 예상치 못했다.
이를 악문 리사가 튕겨 나간 검을 붙잡았다.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지 못한다.
리사가 검을 붙잡고 그대로 내려찍으려 했지만, 가토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몸을 회전한 가토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리사의 목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리사는 오싹함을 느꼈다.
“오케이, 거기까지.”
그 순간 에단이 연무장에 난입했다. 에단이 왼손으로 가토의 검을 붙잡고, 마나를 두른 오른손으로는 리사의 칼을 붙잡았다.
가토가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가토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져 주려고 했는데.’
몸을 비트는 순간 발이 꼬여 자빠지는 것까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순간 에단이 나타났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그럼 오늘은 무승부로 할까? 또래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에단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반달처럼 휜 에단의 눈이 리사에게로 향했다.
그 눈을 본 리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기랄.’
마음 같아서는 왜 끼어들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리사는 그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아니, 패배를 직감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또래에게 완패한 것으로 모자라, 그런 감정까지 느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리사가 붉어진 얼굴로 가토를 노려봤다.
“너, 이름이 가토라고 했지?”
“……네.”
“두고 봐.”
리사가 몸을 휙 하고 돌리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에단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성질하고는.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 원…….”
에단이 혀를 차며 말하자, 가토가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성격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가토의 시선을 느낀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왜? 뭐 할 말 있어?”
씨익 웃는 에단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낀 가토가 빠르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할 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여동생이랑 대련해 본 감상은 어때?”
“아…… 그게……. 상당하시던데요?”
“풉.”
가토의 대답에 옆에 있던 네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네이드는 애초부터 가토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가토는 그간 많은 실전을 겪었고, 매일같이 성장했으며, 네이드는 그것을 매일 지켜보고 있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그 표정 좀 그만 지으면 안 될까? 뭔가 섬뜩해.”
“……주의하겠습니다.”
“어, 부탁 좀 하자. 그건 그렇고 헨리는 왜 얼굴을 안 비춰?”
“헨리 씨는 따로 할 게 있다고…….”
“하여간 짱 박히는 솜씨하고는.”
에단이 혀를 차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네?”
“……무엇이 말입니까?”
“어떻게 보면 각자 애제자끼리의 대결 아니었나?”
애제자라는 단어에 가토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에밀라의 시선이 가토를 훑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탐나는 인재이기는 합니다만…….”
“욕심내지 마.”
에단이 히죽 웃으며 가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응들 보여?”
에단이 학생들을 가리켰다. 리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가토의 모습에 학생들이 감탄하고 있었다.
가토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고, 휴고는 묘하게 뾰로통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간 애들하고는.’
실력과는 별개로 하는 짓들이 귀여웠다.
‘이쯤 되면 학생들에게 각인은 시켜 뒀고.’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에단이 휴고를 향해 손짓했다.
휴고가 에단 앞에 서자, 에단이 말했다.
“휴고.”
“네, 도련님.”
“우리 어디 좀 같이 가자.”
“……같이 말입니까?”
“어, 헨리도 데려갈 거야.”
휴고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가, 가토는 같이 안 가나요?”
휴고의 발언에 가토가 쌍심지를 켜며 휴고를 노려봤다. 하지만 휴고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누구 하나라도 더 끌고 가는 게 중요했다.
“어. 얘는 여기 두고 갈 거야.”
“왜, 왜요? 왜 저만…….”
“너는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머릿수가 많아 봤자 좋을 거 없는 일이야. 왜? 나랑 가기 싫어?”
에단이 눈살을 좁히자, 휴고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됐네. 그리고 휴고.”
“……네?”
“헨리 좀 찾아와.”
“제가요?”
“그럼 내가 찾으리?”
“……알겠습니다.”
헨리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휴고의 어깨를 두드리자, 휴고는 축 처진 어깨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네 코가 좋잖아.’
휴고는 후각이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