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피는 속이지 못한다 (1)
키이잉.
빈센트의 칼집에서 검이 뽑혔다.
해일 같은 마나가 덮쳐 오고 있음에도 빈센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정작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포악했다.
마나의 해일보다, 검 하나 들고 있는 빈센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숨을 더 막히게 만들었다.
‘……괴물이 따로 없군.’
이런 괴물이 원작에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단 말인가?
문장의 나열로 보는 느낌과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각은 천지 차이였다.
후웅.
빈센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기세 좋게 검을 휘두른 게 아니다. 그저 여유롭게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뚝.
하늘과 땅의 위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구역감이 치밀었다.
후우웅!
마나의 해일이 허공으로 역류했다. 마치 역천(逆天)하는 폭포를 보는 것 같았다. 막대한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었다.
이게 바로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빈센트의 진면모라고.
― ……이번 가주는 꽤나 쓸 만한 놈이구나.
페온의 퉁명스러운 말에 에단은 기가 찼다.
‘이게 쓸 만한 수준이라고?’
마스터의 경지를 얕게 본 것은 아니었다. 편법을 이용했다고는 하나 에단도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증명은 결국 결과로 하는 것이고, 에단은 지금껏 결과를 창출해 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 누가 와도 기가 눌린 적이 없던 에단은 지금 처음으로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했다.
그 괴물 같은 ‘지하’의 리치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 ……페온, 너보다 강하지 않냐?
― 닥쳐라.
카이나와 페온이 티격태격하며 나누는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을 되찾은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만있으셨어도 제가 정리했을 텐데요.”
“……고얀 놈.”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허황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검을 이용해 적절하게 마나를 방출하고, 세계수의 목걸이를 활용하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설령 된다고 해도 굉장히 많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빈센트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사태를 정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방금 느낀 압도감을 떨쳐 내려는 듯 에단이 툴툴거리면서 말하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빈센트가 에단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경지. 그리고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마나의 총량.
모든 것이 놀라웠다.
‘더군다나 저 검.’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에단이 어떤 경로로 저 검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만한 물건을 들고 있으면서 왜 검이 필요하다는 거지?”
에단이 내기의 상품으로 원한 것은, 검 한 자루였다. 저런 검을 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검이 필요하다니 의아함이 들었다.
“아, 이거요?”
에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애 줄 거예요.”
“……뭐라고?”
빈센트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 ……뭐라고 이 새끼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이나의 걸걸한 욕설이 에단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 * *
렉사르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첸이 무력을 행사할 것도 없었다.
순순히 제압당하면서 별다른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에단과 휴고를 노려보며 사라졌다.
‘뭘 꼴아 봐?’
당연히 에단은 콧방귀를 뀌며 넘어갔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에밀라와 크러쉬가 나서서 학생들의 인도를 시작했다.
크러쉬는 최선을 다해 에단의 눈을 피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애쓰는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조금 골려 주고 싶지만.’
시간을 할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카론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 귀여운 동생.”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다가가자, 카론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최대한 에단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에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으음, 형 말을 개무시하는 건가?”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자,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내, 내가 언제 무시했다고…….”
“그래. 잘 들리나 보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그 모습을 본 카론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아까는 바빠 인사도 못 해서 말이야. 어때, 요즘 살만은 해?”
히죽히죽 웃는 에단의 말이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카론은 렉사르에게 에단의 정보를 넘겼던 것이 내심 걸렸다.
“모, 못 지내지는…….”
“너 그런데 말이 짧다?”
“……않았어요.”
“그래, 보기 좋네. 오랜만에 리사 얼굴이라도 보러 온 거야?”
“그 싸가지 없…….”
카론의 시선이 리사에게로 돌아갔다. 멀리서 리사가 사나운 눈초리로 카론을 노려봤다.
“……지 않은 누나가 생각나더라고요…….”
카론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리사는 그에게도 버거운 존재였다. 리사의 실력은 가문에서도 유명했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옛적에 카론을 넘어섰고, 실력주의가 만연한 블란테이기에 카론은 리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껄끄러운 인간이 둘이나…….’
카론은 최대한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에단 오빠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오빠라고?’
리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카론은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리사는 모룬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오빠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없었다.
그련 리사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오다니.
리사가 다가서며 카론을 지그시 바라봤다.
“카론도 있네?”
‘……개 같은 년. 그래도 동생인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그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리사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에단보다 더 무서웠다.
“어, 어……. 리사 누나…….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오랜만이네. 그런데 너 실력은 좀 늘었어?”
“시, 실력? 어떤 실력……?”
“내가 뭐를 물어보겠어? 당연히 검술 실력을 묻는 거지.”
카론도 머저리가 아니었다. 지금 리사는 비아냥대고 있는 거다.
속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건방진 누나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으, 응……. 조금 늘긴 했어.”
“그래? 잘됐네.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실력은 느는구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얘네?’
대화가 아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카론을 좀 골려 주려고 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을 갈구는 실력은 에단보다도 리사가 뛰어났다.
― ……정말 네 핏줄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 잘못된 선입견이다. 카이나.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자.”
“아, 그래. 또 보자, 카론.”
리사가 획하고 몸을 돌렸다. 카론은 부들부들 떨면서 에단과 리사를 노려봤다.
‘……개 같은 연놈들.’
하지만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때 멀어지던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론, 방금 나 욕한 거 아니지?”
“……어?! 아니야! 내가 욕을 왜 해!”
카론이 화들짝 놀라며 말하자, 리사가 물끄러미 카론을 바라봤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해?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물어본 건데.”
“저, 정말 아니야. 내가 왜 네 욕을 하겠어.”
“그렇지? 하나뿐인 귀엽고 멋진 누나인데 말이야. 그럼 갈게.”
리사가 팔을 흔들며 멀어졌다. 카론은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묘한 시선을 느낀 카론이 주위를 둘러봤다. 카론이 고개를 들자, 기사들이 고개를 피했다.
기사들의 시선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카론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제, 제기랄…….’
에단과 리사의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 * *
방금 보여 줬던 빈센트의 모습에 에밀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검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권태로운 움직임. 아래에서 위로 검을 드는 그 행위만으로 막대한 마나를 모두 소멸시켰다.
압도적인 위세를 가진 마나였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고 죽음을 각오한다고 한들 그 마나의 해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실력을 과신한 적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비관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에밀라는 최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꽃이니, 은발의 여검사니, 수많은 별호가 에밀라를 따라왔다. 많은 칭송과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랐다.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객관적인 시선을 키웠다.
학생들은 저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에밀라의 재능은 그 어떤 학생들보다 뛰어난 편에 속했다.
20대 나이에 이룩한 최상급이라는 경지.
교만에 빠진 적은 없었으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조급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밀라는 지금 조급함을 느꼈다. 에단은 그녀보다 어렸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멀어졌다.
마스터까지 한 발자국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과연 한 발자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빈센트를 떠올리자 오금이 저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빈센트의 일 합도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에 허탈감이 들었다. 학생들을 인도하면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한 학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가 순간 당황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교수가 됐으면서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 에밀라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일단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 있겠습니까?”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에밀라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의 상황 정리가 끝나자, 에단 일행과 빈센트와 첸, 그리고 남은 교수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드리죠.”
모두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쏠렸다. 따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아카데미의 중축이 통째로 사라진 사실은 알고 있죠?”
에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유지 인원도 없었다.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뭐 어디 적당한 세력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겠죠.”
직설적인 에단의 말에 에밀라와 리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카데미의 존속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권력 다툼이 시작된다면 아카데미는 본질을 잃게 된다.
균등한 기회는 사라지고, 차별은 더욱 강화될 게 분명했다. 에밀라는 부패한 곳에 교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른 거죠.”
시선이 일제히 빈센트에게로 쏠렸다. 빈센트는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내가 너를 도와야 할 이유는?”
빈센트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블란테의 위상은 이미 드높았다. 구태여 아카데미에 발을 들여 모두의 견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빈센트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리사가 죽을 뻔했다니까요?”
쨍그랑!
빈센트가 들고 있던 찻잔이 산산이 조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