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야수의 눈 (1)
블란테의 맹약.
철혈의 사자에게 채워진 목줄.
‘나도 잘 몰라.’
그 맹약에 관해서는 에단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맹약에 대한 떡밥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
블란테의 맹약은 가주에게 국한되어 있었고, 굉장히 편의주의적인 약조였다.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말뿐인 약조.
하니 에단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에단이 해야 할 일은 블란테라는 이름을 십분 활용하는 것.
‘신의 따위는 필요 없지.’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다.
블란테의 맹약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언급하면 무언가 반응할 줄 알았지만, 페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흐음.’
페온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웠다. 그간 페온이 내뱉었던 말들은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으니까.
그런 페온을 낚아 내기 위해 여러 미끼를 뿌렸지만, 페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뭐, 시간은 많아.’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페온은 에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해를 끼칠 만한 이유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에단은 말없이 고민에 잠겨 있는 빈센트를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에밀라와 리사는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빈센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뭐지?”
“계획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의뭉스러운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끝까지 본색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더냐?”
“본색이라뇨. 누가 보면 제가 아버지에게 해를 끼치는 줄 알겠습니다. 정말로 별거 없습니다. 이게 다 가문의 위상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라서요.”
에단이 말을 내뱉은 그때,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빈센트는 대번에 이 굉음의 주범이 누군지 알아챘다.
‘렉사르.’
빈센트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에단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 지금 더 늦으면…….”
“휴고는 그런 막돼먹은 망아지한테 죽을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 아닙니다.”
빈센트는 에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하에 대한 애정은 인정한다. 그것이 바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의 덕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만함은 다른 문제였다.
렉사르는 위험했다. 무력이 아닌 위험도로만 따지면 블란테에서 가장 위험한 녀석이 렉사르였다.
빈센트가 지그시 자신을 노려보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혹시 의심되시면 내기 한번 하시겠습니까?”
“……내기?”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검을 들었다. 검집 없이 덩그러니 있는 검이었다.
빈센트와 첸의 시선이 돌아갔다. 처음 에단이 들어왔을 때부터 눈에 밟히던 물건이다.
예사롭지 않다.
딱 그 표현이 옳았다.
“검 한 자루만 주시죠.”
에단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듯 에단에게 물었다.
“검? 네 손에 들린 것도 검이 아니더냐?”
“검이기는 하죠.”
조금 시끄러운.
에단은 말을 삼켰다. 지금도 카이나는 에단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제 성검의 쓸모는 다했고.’
물론 추후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나, 성검의 용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기는 안 하시는 겁니까?”
“…….”
* * *
절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친 목소리. 렉사르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토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통제했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 교전이 벌어지는 것은 확실했다.
기사들도 말릴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직계 혈족 간 싸움도 말리지 않는 것이 블란테다.
불만이 있으면 힘으로 푸는 것이 바로 블란테의 방식이었고, 오랜 시간 수습 기사 생활을 해 온 가토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학생들을 현장에서 떨어트린 가토가 주변을 둘러봤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학생들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가토의 얼굴은 학생들보다도 어려 보였고, 그런 녀석이 자신들을 통제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을 수행했기에, 학생들은 반항하지 못한 채 가토의 통제를 따랐다.
가토가 학생들의 정리를 끝낸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엔 블란테 진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토, 조금 살 만한가 보지?”
“도련님 뒤에 붙어 다니면서 안색이 조금 좋아졌다?”
“하긴 어떻게 얻은 기사직인데 말이야. 큭큭큭.”
대놓고 들리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들. 하지만 가토의 안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눈 하나 까딱이지 않는 가토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기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토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한 삶은 아니었다.
에단과 함께하면서 보낸 시간은 고됐고, 그 고된 삶은 가토의 양분이 되었다. 가토가 싸늘한 눈초리로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들의 실력은 훌륭했다. 블란테의 기사답게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같잖네.’
가토가 느끼기에는 같잖게 느껴졌다. 가토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저따위 말을 듣는 것보단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후드를 눌러쓴 남자.
저자가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토는 휴고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난입할 생각이었다.
‘잘해라.’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가토가 말을 삼켰다.
렉사르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의 하룻강아지가 지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송곳니였다. 그래서인지 황당하기까지 했다.
‘저런 녀석을 교육시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렉사르가 휴고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봐주도록 하지.”
“음……. 죄송합니다. 별로 내키지가 않네요.”
렉사르는 한 차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휴고의 시선이 렉사르의 손을 따라갔다.
“도련님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아서.”
“……명을 재촉하는군.”
렉사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그것이 전투 개시의 신호탄이었다.
후웅!
렉사르의 품에서 톱날 검이 빠져나와 휘둘러졌다. 마나는 서려 있지 않았다. 렉사르 나름의 관용이었다.
휴고가 가볍게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하자, 검의 궤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었다.
렉사르의 야성이 느껴지는 공격.
휴고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걸 본 블란테 진영 측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상대가 안 되잖아?”
“훈련은 안 하고 도련님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비웃음도 있었지만, 몇몇 이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지? 실력은 괜찮은데?”
“마구간 지기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휴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칼날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려나?’
뻑!
휴고의 발끝이 렉사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타이밍을 재다가 던진 발차기다 보니 큰 대미지를 기대하진 않았다.
렉사르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는 걸 본 휴고가 상체를 숙여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타닷!
짐승처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렉사르의 품에 들어간 휴고가 팔을 가격했다.
렉사르도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휴고가 다가오는 순간에 맞춰 칼을 휘둘렀지만, 휴고는 물 흐르듯 공격을 피해 내며 팔을 쳐 냈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유연성과 반사 신경이었다.
검을 놓친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사이 휴고는 무기가 꺼내지기 전에 달려들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근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먹질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흉악했다.
렉사르의 누런 동공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휴고의 주먹을 좇았고, 그러는 한편 반격을 준비했다.
차르르륵.
소름 돋는 쇳소리에 휴고가 순간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사슬낫을 꺼내 든 렉사르가 거리를 벌린 휴고를 바라보며 웃었다.
“감이 좋구나, 꼬마야.”
“……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낫 부분이 아닌, 뒤쪽의 사슬만 던졌을 뿐인데도 강력함이 느껴졌다.
휴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거친 심장 박동에 몸속의 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각이다. 휴고가 낮게 심호흡을 하면서 머리를 식혔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
렉사르는 강했다. 잡생각을 한다면 순식간에 수세에 몰릴 게 분명했다.
다시 상체를 숙인 휴고는 순간적으로 질주했다. 휴고가 달려 나가자, 사슬이 휴고의 앞을 가로막았다.
휴고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사슬을 모두 피해 냈다.
“잡았다.”
렉사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슬의 끝자락이 휴고의 발을 붙잡은 것이다.
“후읍!”
하지만 휴고는 멈추지 않았다.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잠그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차르르!
쇠사슬이 딸려 왔다. 사슬의 무게가 더해진 휴고의 발이 렉사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다.
쾅!
괴성과 함께 지면이 움푹 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분명 하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기사들은 휴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하인 출신, 그것도 마구간 지기였다는 것 정도.
같이 수련했던 수습 기사들의 말로는 체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했다. 체력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지만, 체력만 뛰어나서는 쓸모가 없었다.
한데 정작 눈앞의 휴고는 검 하나 쥐지 않은 채 렉사르와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
입을 꾹 다문 채 휴고를 노려보는 렉사르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스스스.
휴고는 렉사르의 주위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걸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위험한데.’
휴고의 예민한 본능이 경고했다. 이런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껏 교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운에 가까웠다.
렉사르는 휴고의 신체 능력을 예상하지 못했고, 휴고는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제 렉사르는 더욱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풍겨 오는 살벌한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유가 뭐지?’
딱히 긴장되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뛰며 분노가 치밀었다.
휴고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에단이 건네주고 간 작은 보석 파편이었다.
‘밀린다 싶으면 이걸 부숴.’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써야겠지.’
지금이 아니면 사용할 기회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휴고가 한숨을 내쉬며 검은 보석 파편을 움켜쥐었다.
악력이 가해지자 검은 파편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휴고에게 녹아들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순간 휴고의 눈이 누렇게 물들었다. 렉사르의 눈과 매우 흡사한, 짐승의 눈이었다.
“저 녀석 설마……!”
지켜보고 있던 가토가 당황해하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저 모습은 가토가 야수화할 때의 모습이었다.
“잠시 지켜보도록 하죠.”
네이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고가 야수화를 사용한 것에는 에단의 지시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우선 지켜보는 게 옳았다.
‘도련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