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또 다른 앙숙 (1)
“그런데 애당초 블란테인 걸 숨긴 게 잘못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하, 진짜 어이가 없네…….”
학생들의 반응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기보다는 회피하기 급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정말로 블란테의 자제였을 줄이야.’
혹시나 했던 가정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리사의 검술 실력은 동급생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다.
뛰어난 재능만으로는 이룩하기 어려운 성취였다.
아카데미를 몇 년 다니는 것만으로 그 정도 성취를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라프가 진짜 망한 거 아니야?”
“……그렇네? 라프 너 괜찮아?”
학생들의 시선이 라프에게로 돌아갔다. 최근 리사와 가장 큰 다툼이 있었던 것은 라프였다.
라프가 큰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리사가 아무 배경 없는 평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란테라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리사에게 얻어맞은 얼굴이 욱신거렸다. 그 통증보다도 동급생들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그 가면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위세 떨 때부터 알아봤다.’
‘제대로 걸렸네. 쯧쯧.’
라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라프가 살벌한 눈초리로 동급생들을 노려봤다.
“블란테인데 뭐 어쩌라고?”
대놓고 하는 도발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직 블란테의 기사들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라프는 이미 분노에 잠식되어 있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매서운 시선에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희가 한 말 아니에요……!”
라프가 학생들의 어깨를 밀쳐 냈다.
“나도 꿀릴 거 없어. 우리 가문도 카이제르 소속이라고.”
라프의 아버지는 카이제르에 소속된 기사였다. 비록 직계는 아니었지만, 라프의 말대로 카이제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는…….”
라프가 더 입을 열려고 하자, 학생들이 라프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입을 열게 놔두면 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블란테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학생들이 침을 꼴딱 삼켰다.
“하, 하하……. 이 녀석이 원래 입이 조금…….”
학생 한 명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때 절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질척이는 불쾌함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카이제르……?”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거친 목소리였다. 학생들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침을 삼켰다.
몸이 굳은 것은 라프도 매한가지였다. 분노에 이성을 잃어 내지른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큭큭……. 머저리 같은 카이제르 놈이 여기에도 있었나……?”
렉사르가 손을 뻗었다. 라프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학생들은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하실 수 없으십니까?”
드레이가 렉사르의 앞을 막아섰다. 렉사의 표정이 굳었다.
“……너는 뭐지?”
“학생입니다.”
스스스.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그 또한 긴장감에 몸이 떨려 왔다. 저 소름 끼치는 존재 앞에 서는 데에도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자기가 보는 앞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좌시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라프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 파장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드레이는 공포라는 감정을 억눌렀다.
렉사르는 말없이 드레이를 응시했다. 누런 동공이 드레이를 훑었다. 맹수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감각에 드레이가 침을 삼켰다.
‘제기랄…….’
이렇게까지 나선다면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렉사르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끈적이는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드레이의 시선이 다른 기사들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블란테의 기사들은 렉사르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둘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드레이는 재차 각오를 다졌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게끔.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겨뤄 보지 않아도 기량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날고 기어 봤자,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저편에서 에단과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산한 미소를 걸친 채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에 드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아카데미에 돌아온 에단은 박살 난 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익숙한 기운이 발목을 잡았다.
죽은 마나.
이건 죽은 마나의 잔재였다. 낭자한 선혈, 반파된 문, 그리고 죽은 마나.
‘씨앗을 심어 뒀나.’
예상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레벨린은 에단의 예상보다 더욱더 잔혹해졌다.
‘오판했군.’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면 고메드의 몸에 심어진 씨앗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메드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잔혹한 죽음을 맞이할 녀석은 아니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흩뿌려진 피와 산산조각 난 문을 보니 입맛이 썼다.
‘아버지께서 도착하셨나 보군.’
일행은 눈앞의 광경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렇다고 배려를 해 줄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말없이 박살 난 문안으로 들어서자, 일행들도 따라가기 시작했다.
부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학생과 블란테의 기사들.
“……정말 오셨군요.”
이동하면서 블란테가 찾아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블란테의 정규 기사들을 보자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휴고는 긴장했는지 침을 삼켰다.
“……쟤는 뭐지?”
에단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대치 상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인물,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드레이.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에단의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에단은 거침없이 발을 옮겨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학생에게 뭐 하는 거지?”
“……학생?”
렉사르의 목소리를 들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따구야? 뭐 잘못 처먹었냐?”
대놓고 시비조인 에단의 어조에, 드레이와 기사들이 헛숨을 삼켰다.
“……네가 에단인가?”
렉사르의 목소리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뭐지?’
저 질문은 자신이 블란테의 직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저런 방자한 태도라니…….
또한 말투와 생김새부터 개성적인 녀석이다. 이 정도로 뚜렷한 개성이면 원작에 묘사가 되었을 테니 에단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블란테의 일원이면서 특이한 차림새라…… 아, 그 녀석인가?’
딱 짚이는 곳이 있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그런데 너 말이 짧다?”
“……정말 많이 바뀌긴 했군.”
“몸이 무거워서 살 좀 뺐지. 왜 놀라워?”
호의라고는 찾기 힘든 날 선 대화가 오갔다.
에단은 렉사르 앞에서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는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너 우리 반장한테 뭐 하려고 했냐?”
“저놈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저 뒤에 있는 녀석의 입을 조금 찢어 줄 생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듣기 불쾌한 목소리.
에단이 고개를 돌려 드레이 뒤에 움츠리고 있는 라프를 바라봤다.
“쟤는 누구냐?”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자, 드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B반의 라프라고 합니다.”
“그게 누군데?”
“…….”
드레이는 할 말을 잃었고, 에단은 다시금 눈살을 좁히며 기억을 되짚었다.
‘대충 떠오를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 보니, 주인공한테 깨지는 녀석인 게 기억났다.
“아, 네가 그 좆도 아닌 가문 믿고 나대는 그 새끼구나?”
에단의 신랄한 욕설에 라프의 눈이 부릅떠졌다.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토가 이마를 쳤다.
“도련님은 여기서도 마찬가지구나…….”
“그러게…….”
둘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의 천성과 언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에단이 결코 입으로만 나불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침없는 에단의 언행은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기에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가, 같잖은 가문?”
라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이런 처우를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라프가 알기로 에단은 평민이라고 했다. 그런 자가 자신의 가문을 모욕하다니. 라프가 치욕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했다.
“대충 상황은 예상이 가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봤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알 거 같고.”
에단의 말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사이로 보이는 입꼬리가 비틀렸다.
“왜? 몸이 근질거려?”
에단은 렉사르 같은 녀석을 많이 봐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책에서의 묘사와 지금 보이는 모습을 통해 어떠한 성격인지 알 수 있었다.
“큭큭……. 확실히 많이 달라지긴 했군. 과거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너도 혀가 기네. 닥치고 본론만 말해.”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렉사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결국 한바탕 붙고 싶다는 거 아니야?”
에단의 검은 동공이 렉사르의 눈과 마주쳤다. 누린내가 넘실거리는 렉사르의 눈앞에서도 에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큭큭,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마음 같아서는 어울려 주고 싶긴 한데 지금 조금 바빠서 말이야.”
에단이 휴고를 향해 손짓했다. 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누굴 부르겠냐?”
“옆에 가토도…….”
“뒈질래?”
에단의 겁박에 화들짝 놀란 휴고가 후다닥 뛰어갔다.
‘쌤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토는 고소함을 느끼며 웃었다. 가토는 작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세계수 때문에 개고생할 때 휴고는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다.
에단의 곁에 다가온 휴고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휴고의 머리칼을 휘저었다.
“야.”
“네, 도련님.”
“쟤 눈 한번 봐봐.”
휴고가 렉사르의 눈을 바라봤다. 렉사르의 눈빛은 지금 더욱더 사나워졌다. 불쾌한 심기가 반영된 탓이다.
“어때, 무섭냐?”
“아니요……?”
빠드득.
휴고의 말에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너 따위는 발라 버릴 수 있다는데?”
에단이 장난기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