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리사의 부탁
에단은 마차 밖으로 펼쳐져 있는 맑은 하늘이 보며 하품을 했다.
‘슬슬 도착했겠군.’
블란테의 이동속도는 다른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했기에 슬슬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간만의 부녀 상봉인데 천천히 가도 되겠지.’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블란테는 대륙의 끝자락에 있다. 몬스터들의 범람을 막아서는 살아 있는 요새가 바로 블란테였다.
‘위명은 있지만 그것뿐이라는 거지.’
블란테가 이동하면 주위 모든 세력들이 블란테를 견제한다. 블란테가 그만큼 껄끄럽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소리다.
‘그걸로는 안 돼.’
그것만으로는 후일을 대비할 수 없다. 정계에 알을 박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에단은 중앙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명분과 실리.’
득이 되는 것들만 취하면 된다.
위기 시에 블란테만 희생하는 것이 아닌, 타국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한테 미루면 다 뒈지니까.’
급한 불은 껐지만 어디까지나 급한 불이다.
‘지하’에서 놈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터.
‘가지고 있는 패는.’
에단은 객관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먼저 명분이 있었지만,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인들이 도주했다.
‘크게 상관은 없어.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혐의를 입증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엘프들의 지지는 상황을 반전시킬 때 써먹으면 되겠고.’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성검을 바라봤다.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성검…… 성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좋아, 대충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블란테의 입지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보다 확실한 명분과 세력은 없다.
‘이거면 녀석들과 치고받고 싸워도 눈치를 안 봐도 되겠는데?’
사건이 터지기 전 부패한 개자식들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데…….’
에단이 골똘히 고민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다.
‘그건 뭐 리사가 알아서 하겠지.’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은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다만,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음에도 에단의 가슴에는 찝찝함이 남아 있는 것이 걸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
무언가 거슬렸다. 정말 레벨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 게 끝이란 말인가?
툭툭.
에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네이드와 헨리가 그런 에단을 힐끔 바라봤다.
‘찝찝한데.’
에단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 * *
비산한 파편들, 그리고 피어오르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폭발의 파장을 단편적으로 드러냈다.
투두둑.
돌가루와 쇳가루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주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면 빈센트의 몸에는 작은 핏자국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고메드……!”
첸이 보호하고 있던 여학생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죽었다.
여학생이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빈센트는 아무 말 없이 여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소란을 파악하고 멀리서 학생들과 에밀라가 다가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에밀라는 갑작스러운 소란과 참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메드는 시체조차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리에 있던 여학생의 상태는 패닉에 가까웠다.
에밀라는 교수로서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정리해야 했다. 학생을 보호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에밀라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쿵!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미건조한 빈센트의 시선이 에밀라에게 향했다.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에밀라는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실력자였다. 하여 웬만한 마스터를 마주해도 기에 눌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턱이 떨린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에밀라의 물음에도 빈센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자, 기약이 없는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리사는 잘 있나?”
“리사? 설마 당신이…….”
에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강한 위압감에 짓눌려 가려져 있던 시야가 넓어지며 기사들의 행렬이 보였다.
‘블란테.’
헛숨을 삼킨 에밀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낭자한 혈흔, 산산이 조각난 문.
“……당신께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빈센트가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그렇게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진상을 파악해야 해서…….”
에밀라가 서럽게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익숙한 감각이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지?’
꺼림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다.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얼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
‘……레벨린.’
레벨린의 기운이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에밀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은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모든 게 거짓이었군요.’
에밀라는 고메드를 알고 있다. 조금 바보 같고 단순했지만, 순진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잔혹하게 죽을 만한 녀석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만 봐도 그랬다. 고메드는 학생을 좋아했고, 학생들도 곧잘 고메드를 따랐다.
이가 갈렸다. 레벨린의 잔혹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겁니까?’
분노에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에밀라가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는 말없이 에밀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꼴을 보여 줬군요.”
“괜찮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에밀라가 학생을 부축했다. 어느새 첸이 다가와 빈센트 곁에 섰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당시에는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줬다.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온 거니까요.”
첸의 대답에 에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학생을 안아 들고 지나가자, 학생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학생들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메드의 죽음.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죽음이었다.
장성한 성인이 봐도 충격적인 광경을,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학생들이 봤으니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지?”
한 학생이 의구심을 표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사들이었다.
검게 빛나는 갑주, 그리고 강렬한 카리스마.
아카데미에 재학하면서 다양한 기사들을 만났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자들은 없었다.
“저 문양은…… 설마……?”
그제야 학생들의 시선이 갑옷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검은 갑주.
거기에 새겨진 사자 문양.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브, 블란테……!”
“블란테라고?!”
학생들이 일제히 뒷걸음질 쳤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블란테의 명성과 악명은 자자했다.
고위 귀족의 자제가 대부분인 아카데미의 특성상 블란테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블란테는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검사 중의 검사, 기사 중의 기사. 그게 바로 현시점 블란테의 위치였다. 블란테와 대등하다고 알려진 가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 명가 아큐르와 또 다른 검술 명가로 알려진 카이제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블란테와 다르게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블란테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크게 놀랐다.
‘……블란테가 도대체 여기를 왜 찾아온 거지?’
갑작스러운 출현.
심지어 등장한 장소가 아카데미였다. 블란테가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수차례의 초청에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블란테가 도대체 왜?
하지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밝혀졌다.
“아빠―!”
멀리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여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들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등장한 이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쟤 리사 아니야?”
“아빠라고?”
“농담하지 마…….”
학생들이 눈을 비볐다.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싸늘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빈센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는 점이었다.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었다.
빈센트가 팔을 벌리며 리사를 반겼다.
“리사, 오랜…….”
쐐애액!
그 순간 리사가 발을 휘둘렀다.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리사의 발을 붙잡았다.
“너무 천박한 행동은 좋지 않단다.”
“아빠야말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진짜 제가 하고 싶던 말이 얼마나……!”
리사는 쌓인 감정이 많았다. 대뜸 등장한 오빠부터 시작해, 방금 전 소란, 그리고 전쟁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대동한 수많은 기사들까지.
황당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전후 사실을 파악하고 추궁하고 싶었지만,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리사가 발을 내리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다듬으며 다시금 빈센트를 바라봤다.
“아빠.”
“그래, 우리 딸.”
“……일단 할 말이 있어요.”
리사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싫었지만 자존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였다.
“말해 보거라.”
빈센트가 따뜻한 시선으로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 * *
아카데미가 또다시 한바탕 뒤집어졌다.
평민으로 알려진 리사가 블란테의 일원이었다니.
그것도 단순히 블란테 소속이 아닌, 직계 혈통이었다. 그 사실에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간 평민으로 여기고 리사를 깔보고 비아냥거리던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초조해졌다. 웬만한 귀족 가문들은 블란테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블란테가 입김 한 번 불면 가문이 위태로웠다.
“어, 어쩌지?”
“나 리사한테 말실수한 것 같아.”
“나, 나도……. 아니, 그러게 왜 가문을 숨겨서…….”
“……사실 저것도 다 쇼 아닐까?”
“그 사람들이 모두 가짜라고?”
학생들이 시선을 돌리자, 우직하게 서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 그렇지? ……나는 죽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되지 않을까?”
평소 거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몇몇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 걸려도 블란테에게 걸리다니.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