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불쾌한 도발 (2)
정보 길드에 제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는 보고서를 받아 들고 미간을 좁혔다.
‘흐름이 달라지고 있어.’
사전에 확보해 뒀던 정보이기에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꽤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는 속도전이다.
10분의 차이로 모든 걸 뒤엎는 게 바로 선점의 효과였는데, 이번에 세계수와 블란테의 이동이라는 큰 정보를 에단에게 얻은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 흐름은 모두 그자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오랜 시간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그녀였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처음 겪고 있었다.
흐르는 상황이 급박했다. 마치 전쟁같이 시민들과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숨죽여 있던 블란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주축이 사라진 사실, 그리고 그 자리를 블란테가 꿰차려고 한다는 사실로 인해 대륙이 격동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블란테가 강대한 무력 집단이고, 전투를 기피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연합국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개인은 집단에게 패하기 마련이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지?’
그때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정보 길드를 내걸었다.
어차피 실권은 그녀에게 있었기에 걸 수 있던 협상안이다. 하나 지금 보면 그때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아카데미, 세계수, 블란테.
망나니라고 평가받던 에단이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에단의 저의가 어떻고, 얼마만큼의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본명까지도.’
메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데릴라’라는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건 이번 일로 정보 길드는 적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
블란테의 움직임을 미리 알았던 것이 매우 컸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지만 정보 길드는 평화로웠다.
‘이후의 일은.’
에단이 언질을 줄 것이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순간 기가 찼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변하게 됐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왜 안 와?’
잭슨을 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기에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늦어져도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닌가.
‘또 어디 박혀서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이렇게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두고 봐.’
메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블란테의 기사들은 발이 빨랐고, 덕분에 며칠 만에 기사들은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자는 넉넉했기에 거의 대부분은 야영으로 해결했다.
선두에 있던 빈센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아카데미의 외벽과 고메드를 바라봤다.
“한 덩치 하는 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건장하군요.”
빈센트와 첸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냥 건장한 정도야?’
‘괴물들의 기준이란…….’
그때, 혀를 날름거린 렉사르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치울까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렉사르 특유의 쇳소리 같은 소리가 묻어 나와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빈센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옆으로 다가온 렉사르를 바라봤다.
“최근 들어 몸이 근질거리나 보군.”
“……그래 보입니까.”
“그렇게 몸이 근질거린다면 나나 첸 경이 상대해 줄 수도 있는데.”
얼음장처럼 싸늘한 첸의 시선이 꽂히자, 렉사르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사양하도록 하죠.”
렉사르는 과거 첸과 친선 대결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요구한 대결이었기에 승부의 결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생긴 얼굴의 자상이 욱신거렸다. 렉사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빈센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와 기사들이 문 앞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위세에 여학생이 고메드 뒤에 숨어들었다.
고메드는 긴장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나, 지킨다, 학생.’
고메드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이 학생을 보면 여기서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누구냐, 당신들. 정체를 밝혀라.”
고메드의 물음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자신의 주군에게 무례를 끼쳤기 때문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기사들의 기세가 칼날이 되어 고메드의 목을 조였다.
고메드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첸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가서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됐네. 내가 가지.”
빈센트의 대답이 조금 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도약해 말 위에서 내려온 빈센트가 말없이 걸어 나갔다.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공기가 냉각되는 것 같았다.
고메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고메드는 열심히 지원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 언제 오나.’
다가선 빈센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고메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학생 학부모인데 잠깐 들어가도 되나?”
“……흐어.”
고메드가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하, 학부모인가?”
“맞네. 내 딸이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지.”
“그, 그렇다면. 바로 하지 그랬나. 말.”
“음……? 바로 말한 것 아닌가?”
빈센트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고메드가 손을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말았다.
그때 고메드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혹시 학생 이름이 뭔가요……?”
학생의 질문에 빈센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리사라고 하는데 알려나 모르겠군. 혹시 알고 있느냐?”
“아, 리사면 저희 클래스인데? 와, 리사 아버님이세요? 대박!”
여학생이 폴짝거리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고메드가 눈을 끔뻑이며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 죽지 않는 건가?”
고메드의 말에 빈센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자네가 왜 죽나? 이상한 친구군.”
“하, 하하. 맞다. 그렇다면, 문 열어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메드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려고 했다. 에단의 폭력을 겪은 이후 고메드의 성향은 많이 유해졌다.
고메드가 성문에 손을 가져다 댄 그 순간.
꿈틀.
가슴께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고메드의 몸이 멈칫했다.
“……자네.”
빈센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께름칙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네, 지금…….”
빈센트가 고메드에게 말을 건네려던 그 순간, 고메드의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끄어어어어!”
괴성을 내지른 고메드의 주위로 흉험한 마나가 넘실거렸다.
빈센트가 인상을 찌푸렸고, 여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달라진 고메드를 올려다봤다.
“고, 고메드?”
하지만 이미 고메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후웅!
고메드의 거대한 주먹이 여학생에게로 향했다.
“꺄아아악!”
여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숙였다. 가만히 그 상황을 바라보던 빈센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터벅.
한 걸음을 내딛자 빈센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여학생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주먹이 당장에라도 머리 위를 덮칠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빈센트가 손을 들어 고메드의 팔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 꽤나 힘이 세구먼.”
그렇다기에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다. 고메드의 검게 물든 안광이 빈센트를 노려봤다.
“가주님!”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고 뛰쳐나오려 했지만, 빈센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가만히 있도록.”
빈센트는 남은 한 손으로 여학생을 감싸 안았다.
“조금 놀랄 텐데 괜찮겠느냐?”
끄덕끄덕.
여학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후웅!
그 순간 여학생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여학생은 다시금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날아오는 여학생을 첸이 가볍게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까?”
“……아, 안 괜찮아요.”
여학생의 목소리에서 서러움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저보다 저분이……!”
여학생이 시선을 돌렸다. 빈센트와 고메드는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 빈센트였다. 빈센트의 안위는 아무 걱정이 없다. 다만,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면.
‘이 기운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개개인이 가진 포악한 기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첸과 같은 걸 느낀 렉사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일이 재밌어지는군.”
렉사르는 재밌는 사건을 경험한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빈센트는 말없이 고메드를 지켜보았다.
‘아직도 상태가 바뀌고 있군.’
고메드의 육체가 뒤틀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거대하던 육체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외력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
빈센트가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우어어!”
그때 고메드의 반대편 손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빈센트는 붙잡아 두고 있던 팔을 가볍게 밀어냈다.
코끼리와 인간 사이 만큼의 체급 차이가 났다. 힘 싸움이 성립될 것 같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밀려난 것은 고메드였다.
밀려난 고메드가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빈센트는 턱을 쓰다듬었다.
“검을 뽑기도 그렇고. 조금 난감하군.”
그래도 딸이 다니는 아카데미이기에 쓸데없는 유혈 사태는 벌이고 싶지 않았다. 빈센트가 고민하던 사이, 고메드의 골격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끄어어어어어!”
고메드가 또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괴성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찬 절규에 가까웠다.
빈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좀 자고 있게나.”
고메드를 향해 도약하던 그때, 빈센트가 갑작스레 겁을 뽑더니 곧장 마나를 방출시켰다.
고메드의 몸이 꿈틀거렸다. 빈센트가 고개를 돌려 첸을 바라봤다.
“첸!”
첸 또한 이변을 눈치챘는지 검을 뽑아 들고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푸른빛의 마나가 거침없이 타올랐다. 첸이 검을 휘두르자 푸른 마나의 장벽이 펼쳐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카론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마나 컨트롤이 무슨……!’
방대한 마나 양보다 이 정도 규모의 방벽을 펼쳤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가 않았다. 빈센트도 마나를 일으켜 보호막을 형성했다.
꿈틀거리던 고메드의 몸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충격을 동반한 대폭발이 발생했다.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아찔한 굉음과 태풍 같은 기세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거대한 문이 순식간에 조각날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그런 강력한 위력 속에서도 빈센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불쾌하군.’
빈센트가 인상을 구겼다. 폭발의 여파가 걷히자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빈센트는 최후의 순간 고메드가 내뱉은 말을 들었다.
‘살려 줘…….’
하지만 고메드의 애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빈센트는 더없이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