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격동 (5)
“……블란테가 온단 말입니까?”
순간적으로 크러쉬의 몸이 비틀거렸다. 크러쉬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벽을 짚었다.
비록 넘어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어?’
에단이 블란테라는 말.
반신반의했다. 블란테가 누구인가. 불세출의 검술 명가 아닌가. 대륙에 떨치는 위상만 놓고 보면 그 어떤 가문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정말 블란테라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니 소름이 끼쳤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크러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에밀라가 크러쉬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네, 그래야죠.”
에밀라는 침착하게 이후 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에게 전달받은 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현실적으로 실현이 가능한 일인지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야 했다.
학생들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카데미는 붕괴하고 말 게 빤했다.
“……먼저 학생들을 모아 보시죠.”
에밀라의 말에 크러쉬가 결의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확히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크러쉬는 에밀라를 신뢰했다.
크러쉬가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도 정작 이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학생들 사이에 속해 있는 리사는, 학생들의 상황을 직접 겪고 있었다.
“리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율리가 리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사에게는 많은 추문이 따랐다. 교수와의 스캔들, 로만과의 사건, 그리고 드레이까지.
그녀가 주의를 주며 입단속을 시켰지만, 떠도는 소문을 모두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율리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자, 리사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미안해.’
리사는 율리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됐건 리사는 율리를 속였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율리가 느낄 배신감은 적지 않을 것이다.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상황에 꼴에 귀족이라는 것들은 권위를 세우고 있고.’
권력을 지녔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리사가 알고 있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실력과 평등을 추구하던 아카데미의 본질이 옅어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리사가 나서서 한마디를 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소란스럽던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드레이였다. 드레이의 윤기 나는 금발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이미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 아니었다.
“정녕 아카데미의 학생이 맞습니까? 정말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요.”
드레이의 지적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 학생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던 리사가 눈살을 좁혔다.
‘저 녀석은…….’
라프.
꽤나 저명한 기사 가문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기사 가문의 자제인 만큼 학생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뭐 하는 새끼야?”
라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라프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내뱉은 건 아니었다.
라프는 자존심이 강했다. 강한 자존심만큼 자신의 실력과 가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아카데미의 반 배정은 실력순이었다. 하지만 그 기준은 교수진들이 결정했고, 라프는 최근 B반으로 강등당했다.
라프 본인을 제외한다면 모든 학생들은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특유의 오만함.
그것이 바로 라프가 강등당한 이유였다. 라프의 자부심은 정도를 넘어섰다.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영 못 믿겠단 말이야. 머리 색은 특이한 것 같은데. 너, 어디 가문이냐?”
유치한 비아냥이었다. 라프가 미소를 머금은 채 건들거리면서 드레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정작 드레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드레이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는지 라프의 표정이 굳었다.
라프는 건방지게 앞으로 나선 드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레이에 대한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다. 라프는 그 소문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카데미에는 머저리들이 가득했으며, 실력만 놓고 본다면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외는 있었다. 높은 집안의 자제라면 라프도 어느 정도의 대우를 해 줬다.
‘버러지 같은 평민 주제에.’
하지만 드레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라프가 손을 들었다. 피하든, 피하지 않든 그것을 덜미 잡아 교육을 시킬 생각이었다.
드레이는 여전히 라프를 빤히 바라봤다. 경멸이 담긴 시선에 라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 안 깔아?!”
라프가 손찌검을 하려 하자, 드레이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견인력에 드레이가 끌려 나갔다.
쿵!
드레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와 함께 타격음이 터졌다.
빠악―!
리사가 라프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것이다. 정통으로 정권을 맞은 라프가 그대로 뒤로 쓰려졌다.
“끄아아악!”
라프는 얼굴을 감싸 안으며 비명을 터트렸다. 코뼈가 부러진 것인지 라프의 얼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카앗! 퉷!”
리사가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사의 입가가 비틀렸다.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더 지껄여 보시지? 아주 엿 같아서 들어줄 수가 없던데.”
리사의 신랄한 욕설에 코를 틀어막은 라프가 리사를 노려봤다.
“느……! 으 개즈식이……!”
“얼씨구, 이제 말도 똑바로 못 하냐? 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말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것도 이른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리프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욕설에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리사…… 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상대방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변두리 약소 귀족이 아닌,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진짜배기 귀족이다.
이건 실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기에는 사건이 커졌다.
재판이나 처벌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뭐가 됐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테니까.
하지만 리사에게서는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듯 짝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며 라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꽈드득!
라프가 이를 악물었다. 과거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민 주제에 알량한 검술 실력을 믿고 설치는 게 눈에 거슬렸다.
라프가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코가 그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리사를 찢어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라프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키이잉.
라프의 분노를 대변하듯 불쾌한 쇳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을 뽑은 이상 라프의 의도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 리사와 싸울 셈이야?’
이전까지였다면 리사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 탐사 이후로 리사의 진면목을 알게 된 자들이라면 리사가 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사의 무위는 동급생들 중에서 독보적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차렸으니까.
드레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리사를 만류했다.
“그만하시죠. 감정적으로 나서서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이미 분노에 물든 라프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오히려 만류하는 드레이마저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가 뭔데 멈추라 마라지? 선택권은 나한테 있어. 저년을 죽이고 너 또한…….”
“너 혀 더럽게 긴 거 알아?”
리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검이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리사의 검은 이미 한 차례 피를 머금었다. 목숨을 건 실전은 그 어떤 훈련보다도 그녀를 성장시켰다.
“너…….”
순간 머뭇거린 라프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림은 공포의 방증이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납득할 수 없었다. 고작 저따위 평민 계집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라프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부정했다.
이것은 전투 전의 고양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뇄다. 어차피 승자는 자신이다. 라프가 쓰는 검술은 명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근본 없는 평민의 검과 비견될 게 아니었다.
뿌드득.
라프가 부서질 듯 검을 움켜줬다. 흥분이 공포를 집어삼켰다. 경험 없는 하룻강아지는 범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과거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에단을 보며 ‘할 만하다’라고 여겼고, 아무것도 못 한 채 박살 났다.
‘재수 없는 오빠의 마음이 이해가 되네.’
눈앞에 검을 들고, 공포를 외면하는 라프의 모습이 더없이 같잖게 느껴졌다.
리사는 우스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피식, 코웃음을 치자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죽어!”
라프가 검을 든 채 맹렬히 달려들었다. 위압적인 모습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고 무식했다.
저래서야 검을 든 의미가 없었다. 흥분한 멧돼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방법이 너무 많아서 고민일 지경이야.’
반격할 방법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무엇을 골라도 별 상관없었다.
돌진하는 라프를 향해 리사가 검을 밀어 넣었다. 신속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을 노린 공격.
“흥!”
라프가 리사의 일격을 피해 냈다. 그 또한 수위에 오른 검사였다. 이 정도 검을 피해 낼 실력은 지니고 있었다.
“뭘 쪼개?”
리사가 다시금 콧방귀를 뀌며 빙그르 회전했다. 라프가 당황하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라프의 대응이 눈에 훤했다.
리사는 검무를 췄다. 그와 동시에 라프에게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솟구쳤다.
라프의 손에 검흔이 새겨졌다. 그리고 전신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촤아악!
“끄아아악!”
붉게 물든 채 바닥에 엎어진 라프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리사는 벌레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싸늘한 눈초리로 라프를 바라봤다.
“이제야 주제 파악이 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