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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134화 (134/398)

◈ [134화] 격동 (4)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엘프의 숲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툰나는 에단 일행이 마을을 떠난 뒤 곧장 르니엘을 불렀다.

“르니엘.”

평소처럼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모습에 르니엘이 굳은 얼굴로 툰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툰나가 어떠한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예상이 갔다.

“리트마의 상태는 어떻지?”

“당분간 눈을 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툰나는 고민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고민하는 지점은 ‘방식’에 관한 문제였다.

리트마가 외부인과 어떻게 내통하였는지, 또 내통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이후 똑같은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다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에단은 엘프들의 규율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겠군.’

잠시 에단을 떠올린 툰나가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

“네, 툰나님.”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저는…….”

르니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툰나와 눈을 마주쳤다. 르니엘의 눈에는 결의가 차올라 있었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르니엘의 확고한 대답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을 소집해 주게.”

“알겠습니다.”

르니엘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번 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르니엘은, 명실공히 마을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르니엘이 마을에 있는 모든 엘프를 소집했다.

“리트마의 처분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르니엘이 차게 식은 눈으로 엘프를 바라봤다.

“이것은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해치려고 한 자를 용서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르니엘이 가볍게 손짓했다.

휘잉∼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일었다. 붕대에 쌓인 리트마의 몸이 모두의 앞에 떠올랐다.

리트마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에단에 의해 철저하게 박살 난 탓에 리트마를 알아보는 자들도 많지 않았다.

“뭐야?”

“……저게 누구지?”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외모 탓에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리트마는 여느 엘프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저희 마을과 숲, 그리고 생명의 나무를 위기에 빠트린 범인이 바로 리트마입니다.”

“……리트마라고?”

엘프들이 혼란에 빠졌다. 리트마는 원래 누구보다 엘프들의 안위와 숲의 보호에 적극적인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그가 배신자라니.

엘프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배신자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습니다.”

툰나는 말없이 르니엘의 뒤편에 서 있었다. 르니엘은 어느새 엘프들을 이끄는 중심점이 되어 있었다.

원래 이 역할은 툰나의 몫이었지만, 이번 일은 르니엘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이제 그녀가 엘프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니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매서운 안광이 리트마에게로 향했다.

“이게 배신자의 말로입니다.”

르니엘의 말투는 굳어 있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후우웅―

바람이 일며 무형의 활과 화살이 그녀의 손에 걸렸다.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기자 손가락에 걸리는 감각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표적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했다.

퉁!

르니엘의 손끝이 활시위를 놓자,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리트마를 관통했다.

푸슉!

선혈이 솟구쳤다.

충격적인 광경에 엘프들은 입을 떡 벌렸다.

가족과도 같은 마을 구성원의 죽음만으로도 충격적일진대, 다른 누구도 아닌 르니엘의 손길로 인해 리트마가 목숨을 잃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르니엘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재차 손을 들었다.

후웅!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몰아치던 바람은 르니엘의 손짓으로 인해 회오리가 되었다.

단순한 회오리바람이 아니었다. 폭풍 속에는 마나의 칼날이 가득했다.

콰가가가가가―!

회오리바람이 리트마의 선혈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리트마는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게 찢겨 나갔다.

“…….”

잔혹한 광경에 엘프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개중에는 구역질을 하는 엘프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니엘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차게 식은 눈으로 붉은 회오리바람을 응시했다.

“이게 바로 숲과 마을을 위험에 빠트린 자의 말로입니다.”

무심한 듯 보이는 르니엘의 연설에 엘프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는 이제 르니엘이 있다는 사실을.

* * *

블란테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단은 적당한 인원만 차출해서 오라고 했지만, 에단과 빈센트가 생각하는 적당히의 기준이 달랐다.

정예 기사 100명.

병사들의 숫자가 아닌, 오롯이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구성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중급 마나 유저 이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 상급이거나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

개개인이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는데, 그들이 갑주를 입은 채 대대적인 이동을 하고 있으니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뭐, 뭐야?! 전쟁 준비인가?”

“블란테가 움직인다고?”

“빠, 빨리 알려야 해!”

영지민부터 지나가는 행인과 상인까지. 블란테의 이동은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최정예로만 구성된 블란테 기사들의 이동. 이건 아무리 봐도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상황에 여유를 가지고 있는 자는 빈센트와 첸 이외에는 없었다. 빈센트는 간만에 나온 외출을 만끽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았다. 그저 대열을 갖춘 채 발맞춰 걷고 있었다.

엄숙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위압 있는 풍경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금 본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기사들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모두 상급 마나 유저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딘 기사들에게 행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야영지도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카론은 천막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카론 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개인 시종의 질문에 카론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에단을 볼 생각을 하니 심란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또 지랄하겠지.’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비수와도 같은 에단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푹푹 찌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아카데미에는 왜 가는 거야?’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블란테는 이미 안정된 집단이다. 괜스레 파란을 일으킬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카론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대뜸 들어왔다. 카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블란테의 혈족 중 카론의 입지가 제일 좁다고는 하나, 예고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서다니.

카론은 불쾌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지만, 의외의 인물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영지에서 출전 전 소란의 주범이었던, 렉사르라는 남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카론의 시종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체…….”

“그만.”

팔을 들어 시종을 제지한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강해.’

후드 너머로 수많은 흉터가 보였다. 저 흉터들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든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렉사르 자체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하고, 소름 끼치며, 포악한 살기였다.

하지만 카론 또한 블란테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성함이 렉사르라고 하셨나요?”

“맞습니다.”

쇠가 갈리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렉사르의 입에 흘러나왔다. 듣기 힘든 목소리에 카론이 멈칫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질문했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까?”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카론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을 향했다. 보기만 해도 비릿함과 끈적한 살기가 느껴지는 누런 동공이었다.

“에단 님에 대해서 질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형에 대해서요?”

예상 못 한 질문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모를 거북함에 카론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물러섰다.

“뭐가 궁금하시죠?”

“어떻게 싸우는지.”

‘뭐야, 왜 또 말이 짧아? 그리고 그게 왜 궁금하지?’

일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렉사르의 대화를 떠올렸다.

‘……설마 그걸 담아 두고 있었나?’

카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렉사르를 바라봤다. 장구류며 옷차림이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자가 있다는 걸 왜 몰랐지?’

그리고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어려운 건 아니니 설명은 드릴 수 있습니다. 한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끔직한 목소리군.’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말로 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카론이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

원론적인 카론의 물음에 렉사르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렉사르의 시선이 카론에게로 향했다.

렉사르의 짐승 같은 눈을 마주한 카론이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란테의 사냥개.”

그 말을 끝으로 렉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론이 눈을 끔뻑였다.

‘사냥개? 무슨 소리를……. 설마?’

마침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간 소문만 무성하고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

‘이자가 추적하는 사자라고?’

빈센트를 제외한 개인의 무력이라면 흑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첸이 가장 강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함께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

한데 렉사르라는 자는 딱히 숨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카론도 몇 차례 들은 적 있었다.

‘추적하는 사자’에게 쫓기게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고.

괴담처럼 도는 말이었기에 카론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괴담은 괴담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니.’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나 첸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음성에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뭐, 별일은 없겠지.’

카론은 과거의 망나니 때의 에단부터, 바뀐 이후의 에단의 싸움 방식까지 렉사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에 대한 표출이었지만, 그럼에도 충실히 에단의 전투 방식을 설명했다.

렉사르는 천천히 카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이런 놈한테 내가 당할 거라고?’

기가 찼다.

카론의 말을 듣고 있던 렉사르의 안광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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