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133화 (133/398)

◈ [133화] 격동 (3)

‘예쁘게 생기긴 했네.’

리사가 눈을 끔뻑이며 굳은 표정의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얼굴선, 뚜렷한 이목구비,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칼, 짙은 속눈썹과 차가운 듯하면서도 고혹적인 눈매.

‘……이런 사람이 오빠를 왜 좋아하는 거지?’

심지어 에단은 에밀라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얼굴을 굳히고 있는 에밀라가 귀엽게 느껴졌다.

상황은 급박했지만, 리사는 왠지 그녀를 골려 주고 싶었다.

“교수님, 제가 왜 평민인 척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죠?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는다면 훨씬 편한 생활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고작 가문의 위신이 높다고 나한테 빌빌거리는 모습이.”

“…….”

“교수님도 그러신가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눈살을 좁히면서 말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리사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요. 교수님은 블란테에 뒤지지 않은 아카데미의 꽃 아닌가요?”

“……리사 학생.”

상기된 얼굴로 다그치는 에밀라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저보다 교수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에밀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리사가 에밀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건 오빠가 나서면 해결될 거예요. 근데 아직 저는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교수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리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저희 아버지가 오고 있어요.”

“아버지라고 하면…… 블란테의 가주가 온다고요?!”

에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빈센트는 세간에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블란테가 고유의 자치령으로 인정받게 된 이후 빈센트는 그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베일에 쌓여 있고, 신비한 인물이 빈센트였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에 직접 행차한다니.

“이유가 무엇이죠?”

“저도 구체적인 건 듣지 못했지만…… 아마 저희 가문이 아카데미를 맡을 것 같아요.”

“……블란테 가문이 아카데미를요?”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아카데미는 평등을 표방하는 대륙의 협력 단체였다. 각국 고위 인사들과 귀족들의 자제도 몰려들고 있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그런 아카데미의 통제권과 운용권은 민감한 문제였다.

귀족이 아카데미의 운용을 맡게 되면 자신의 세를 키우는 데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최근 대륙 내에서 아카데미가 가지는 권위는 결단코 낮지 않았다.

그런 아카데미에서 연달아 사건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대거 목숨을 잃을 뻔했고, 교직원들의 대처는 미흡했다.

아카데미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앞으로가 더 문제인 상황이라는 점이다.

교직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카데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에밀라가 유능하고 다재다능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혼자서 수많은 학생들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블란테가 온다고 하면.’

블란테는 검술 가문이었다.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운용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오히려 많은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기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반발이 엄청날 거야.’

블란테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였다. 지금은 구석에서 몸집을 불리고 있지만,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바로 블란테다.

한 가문이 국가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엣가시인데 대륙의 중심으로 진출할 빌미를 준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들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아카데미는 좋은 먹잇감이니까.’

그동안은 레벨린의 수완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탈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것만 같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

어째서인지 에단의 얼굴을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리사 학생?”

“음, 일단…….”

리사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을 좀 모으죠.”

일단은 어떻게든 해야 했다.

* * *

“하암.”

에단이 기지개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더럽게 귀찮네.’

이제 초반에 얻을 수 있는 대다수의 기연은 얻어 냈다.

그 외에도 부수적인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과한 편이지.’

에단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의도치 않게 얻은 힘. 에단은 욕심이 많았지만, 소화하지 못할 것까지 탐하지는 않았다.

정말 의도치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불안 요소는 지워 냈지만.’

에단이 눈을 감고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을 느꼈다.

몸속에 있는 기운은 더 이상 죽은 마나가 아니었다. 흉포하고 사납던 죽은 마나 대신 호수같이 고요한 마나가 자리해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서 페온과 카이나를 추궁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에단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그냥 운동하고 퍼질러 자고 싶군.’

본래라면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도맡게 되다니.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코쟁이 놈들은 당연히 반발하겠지?’

작은 중소 가문이 아카데미를 운용한다고 해도 난리를 칠 판에 블란테라니. 입에 거품을 물게 될 게 빤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막상 닥쳐 보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다.

‘명분은 마련해 놨으니까.’

원래라면 천천히 절차를 밟아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레벨린이 도주해 버리는 탓에 절차는 건너뛰게 되었다.

‘슬슬 그놈들 얼굴도 한번 봐야 되고.’

영지의 산속에 짱 박아 둔 녀석들이 떠올랐다. 대략적인 기본 운동만 알려 주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으라 명령해 뒀던 놈들.

바로 벨몬트와 줄리엔 패거리.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에단이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집단 중 하나였다.

필요에 의해서 놔둔 것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아무래도 직접 손을 대야 했다.

‘제대로 운동은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동굴 속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 * *

후욱, 후욱.

블란테 가문의 산속 동굴 안에는 오늘도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뚝뚝.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턱을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신음 소리.

“하나만 더!”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하려고? 그것밖에 안 돼?!”

줄리엔과 벨몬트의 응원에 잭슨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팔굽혀펴기를 성공했다.

파르르.

한계에 다다른 팔이 파르르 떨렸다. 잭슨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허억.

잭슨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동굴에서 운동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동굴 안은 정보 요원인 잭슨도 처음 겪어 보는 구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뱀파이어, 고블린, 인간의 조합이라니.

직접 본 게 아니면 믿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심지어 이들은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운동 방식은 또 왜 체계적인 건데?’

모든 운동은 기본적인 맨몸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세와 휴식 시간, 그리고 가동 범위까지, 모든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걸 알려 준 이도 에단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니면 이게 블란테의 수련법인 것일까?

잭슨은 정보 요원이었지만, 전투 요원이기도 했다. 정보를 캐다 보면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해질지 알 수 없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에단이 알려 준 운동법에 호기심을 느꼈다. 기사가 된 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블란테의 수련법이었다.

그런 수렵법을 경험할 기회가 왔음에도 포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한 번만 해 보자!’

그렇게 시작된 근력 트레이닝.

푸시업, 풀업, 스쾃, 크런치까지. 모두 생소한 용어였다. 하지만 숙달된 조교들의 시범으로 잭슨은 어렵지 않게 따라 했다.

단순한 동작에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속도를 제한하고, 횟수를 늘리고, 쉬는 시간을 줄이니 운동의 강도는 차원이 달라졌다.

‘저래서 몸들이…….’

어둠 사이로도 보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근육들이.

잭슨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충분히 탄탄한 몸이었지만, 줄리엔의 우람한 가슴근육을 보자 자신의 몸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잭슨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줄리엔은 그런 잭슨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첫날부터 정말 대단하십니다. 첫 등장 때부터 범상치 않았음은 느꼈지만…….”

“……과찬입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못 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그런 소리 마시죠!”

잭슨을 바라보는 줄리엔의 눈에는 뜨거운 열의로 가득했다.

“그래, 처음 온 녀석치고는 꽤나 봐줄 만하더군.”

꽤나 균형 잡힌 몸을 가지게 된 벨몬트가 잭슨에게 다가왔다. 벨몬트의 팔은 더 이상 앙상하지 않았다.

상의를 탈의한 벨몬트의 피부는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얬다. 하지만 그 하얀 피부에는 오밀조밀한 근육이 자리해 있었다.

“마셔라.”

벨몬트가 무심하게 잔 하나를 잭슨에게 건넸다. 그걸 본 줄리엔의 눈이 흔들렸다.

뒤에 자리해 있던 험상궂은 인간들도 아쉬움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벨몬트 님, 정말 괜찮습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본 적 있느냐? 걱정 말거라. 최근 몬스터를 포획하는 속도가 늘어 충분한 양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오오…….”

줄리엔을 포함한 인간들과 고블린이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잭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 들었다.

“……이게 무엇이죠?”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아하니 마시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색과 향이 좀 이상했다.

‘내용물도 좀 걸쭉한 것 같고…….’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비주얼이었다. 잭슨이 꺼림칙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줄리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얘들아, 불 좀 켜라.”

“네! 형님!”

산적들이 불을 몇 개 더 밝히자 동굴이 환해졌다. 시야가 트이자 그제야 잔 안에 든 내용물이 보였다.

‘……피?’

잔에 넘실거리는 것은 마치 피처럼 보였다. 잭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거 설마…….”

잭슨이 말끝을 흐리자, 벨몬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의 특제 비전 드링크다.”

“그렇다면 여기 담겨 있는 게…… 피라는 소리입니까?”

“피는 피지만 단순한 피가 아니지.”

대답하는 벨몬트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벨몬트를 바라보던 잭슨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