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격동 (2)
헨리가 에단에게 말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동생에게 보낼 돈이랑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아카데미의 급여가 너무 적었기에 어두운 곳까지 가서 돈을 빌렸다.
돈을 빌린 걸로도 모자라 그 돈을 불리기 위해 도박에까지 손을 댔다.
한마디로 크게 한탕 하려다가 개같이 말아먹었다는 소리였다.
‘뭐 이런.’
분명 헨리는 세계수의 보험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이가 알코올중독에 도박 빚을 진단 말인가. 에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돈을 빌리기 위해 알게 된 사람이 한니발이라는 유명한 상인이다.
“왜 그러고 살았냐?”
에단은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헨리는 할 말이 없었는지 마차의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거상 한니발이라.’
대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돈 귀신 캐릭터. 욕심 많고, 야망이 넘치던 캐릭터로 기억한다.
‘결국 주인공한테 걸리긴 했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한테 제대로 교육을 당한 이후로 그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상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많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으니 주인공의 조력자로는 제격이었다.
‘나한테는 크게 메리트는 없지만, 상대하기는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헨리를 통해 한니발과 접촉할 명분이 생겼고, 에단은 그를 압박할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블란테라는 세력.
블란테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다. 상인에게든, 귀족에게든, 왕족에게든 블란테라는 가문이 가지는 위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뭐.’
블란테의 망나니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조만간 바뀌게 될 이미지였다.
아카데미의 교사직은 명패가 될 것이고, 따라오는 의심은 실력으로 짓누르면 그만이다.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닥친 일들 때문에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이번 기회에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붉은 곰 녀석들도 해결해야지.’
녀석들은 지금 낙동강 오리 알 신세다.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자취를 감춘 레벨린이 일개 용병단까지 챙겼을 리 만무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에단이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정보 길드와 연결하기 전 네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상인이랑 일면식이 있나?”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네이드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것도 뭐 과거의 인연?”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네이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에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음흉하기는.’
하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잘됐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너 급여가 얼마였지?”
“아, 아카데미에서의 급여 말씀인가요?”
“그럼 내가 뭘 물어보겠냐?”
에단이 한심해하며 바라보자, 헨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20골드쯤…….”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뒈질래?”
“10골드입니다…….”
“그래, 두 배 주기로 했으니까. 네 월급은 앞으로 20골드야.”
“와, 정말인가요?”
헨리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궁핍하게 살아온 탓에 20골드가 얼마나 큰 거금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당분간 안 줘.”
“네?! 왜요?!”
“빚 갚아야지.”
“히익.”
헨리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에단이 눈살을 좁힌 채 바라봤다.
“네 급여로 빚을 다 까면 그때부터 줄 거야. 왜, 불만 있어?”
“……아닙니다.”
헨리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20골드라는 돈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1,000골드라는 거금을 전부 변제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하고, 얼마나 개처럼 굴러야 한단 말인가.
‘자, 그러면 얘는 해결이 되었고.’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수정구에 마나가 깃들기 시작하며 형상이 떠올랐다.
―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 컨셉 언제까지 할래?”
에단이 짜증이 묻어난 표정으로 말했지만, 메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래, 편할 대로 해라.”
에단도 체념했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메이는 그런 에단을 말없이 응시했는데,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궁금해?”
― ……짓궂으시군요.
“어, 그래. 끊는다.”
― 궁금합니다.
“얼마만큼?”
― 이익……!
“그래, 잘 가.”
― 궁금해서 미쳐 버리겠어요! 이제 됐습니까?!
“어, 괜찮네.”
에단이 킬킬거리며 웃다가 이어서 말했다.
“세계수 문제는 해결했어.”
에단의 대답에 메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정말 놀랍군요…….
“왜? 내가 못 해낼 줄 알았어?”
―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저희 정보원들은 접촉조차 못 했기에…….
“실력 부족이겠지.”
― …….
에단의 신랄한 힐난에 메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일은 잘 진행하고 있나?”
― 사미라 씨에 관한 일 말인가요?
“어. 붉은 곰은 어떻게 됐지?”
― 접촉은 성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붉은 곰의 행보가 조금 이상하더군요.
“이상하다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 붉은 곰은 원래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의뢰만 수행하고 다녔죠. 저는 단장이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군.”
에단이 피식 웃자,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붉은 곰은 지금 정체되어 있습니다. 최근 의뢰를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별로 좋은 의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의뢰인데?”
― 영지전입니다.
메이의 대답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지전?”
아니, 그걸 왜 해?
에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의뢰였다.
영지전은 집단끼리의 전투였기에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일개 용병단이 활약하기에는 쉽지 않은 임무였다.
붉은 곰 용병단은 엄청난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실력은 입증되었다고 봐도 좋았고, 당연히 모아 둔 돈도 적지 않을 테다.
‘하지만 전쟁은 다른 얘긴데.’
소규모 무리가 뛰어나다고 한들, 영지전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전투의 지휘권자가 귀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용병을 쓰다 버릴 소모품으로 여겼으니까.
‘레벨린이 없어진 게 크군.’
확실히 지시를 내리던 존재의 부재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가 이상하지?”
― 영지전에 참가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니까요. 영지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겠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이상한 게…… 붉은 곰을 고용한 게 영지전에 참가하는 영주가 아닙니다.
“뭐?”
― 그 사이에 한니발이라는 상인이 끼어 있어요.
“한니발?”
― 들어 보셨나요?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눈을 마주친 네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단의 시선이 다시 수정구 너머의 메이에게로 향했다.
“어, 좀 알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거든.”
― ……쉬워진다고요?
“그래. 앞으로 이제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알려 줄게. 네가 잘 써먹어 보라고.”
이미 벌어진 상황과 벌어질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설명했다.
아카데미 주축들의 도주, 블란테의 아카데미 흡수 계획, 세계수를 오염시킨 놈들의 정보, 이어지는 마수, 그리고 붉은 곰에 관한 계획까지.
드레이에 관한 얘기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메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정구에 비친 메이의 입이 떡하고 벌어져 있었다.
― ……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글쎄? 나도 몰라.”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 * *
아카데미는 소란스러웠다.
관리원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때문에 당연히 정상적인 수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에밀라는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학생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교수들의 이탈로 남은 교사는 둘 뿐이었다.
에밀라와 크러쉬.
크러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카데미를 빠져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하나?’
에단의 경고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애당초 에단의 말은 믿기 힘든 것투성인 데다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었다.
크러쉬는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에밀라는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크러쉬는 그런 에밀라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고고한 귀족인 내가 평민보다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지.’
에단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귀족의 권위는 책임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떠올린 크러쉬는 다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에밀라의 얼굴은 복잡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홀연히 사라진 에단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에밀라와 크러쉬만으로는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역부족이었다.
당장 아카데미의 기능 자체가 멈췄는데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에단이 오면 일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았다.
“에밀라 교수님.”
에밀라가 고개를 들었다. 리사가 에밀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사 학생, 무슨 일입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에밀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먼저 들려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죠?”
“그거야 뭐…….”
에밀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소문이 들려오기 마련. 그녀가 최근 들은 소문 중 하나는 리사와 에단이 교제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에밀라가 리사와 에단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겠으나, 에밀라는 리사와 에단이 남매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도 적지 않게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평민 출신 기재라고 알려진 리사의 가문이 블란테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고…….”
리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에밀라를 응시하자, 에밀라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