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격동 (1)
기상 직후의 훈련 때문에 블란테의 아침은 분주했다. 후끈한 열기와 기합 소리는 블란테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바쁜 하루를 맞이했다.
“모두 빠르게 준비를 갖추도록!”
“충!”
기사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블란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묵빛 갑주.
빈센트와 첸도 검은 정복을 입으며 준비했다. 첸은 미묘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빈센트의 곁을 보좌해 온 첸은 빈센트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런 모습의 가주님은 오랜만이군.’
빈센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이 미숙했다. 검술 가문의 수장이라는 권위는 빈센트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첸이 빈센트 옆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첸의 시선을 느낀 빈센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분 나쁘니 그만 웃지.”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시는군요.”
“뭐라도 잘못 주워 먹었나?”
“글쎄요.”
첸이 빙그레 미소 짓자, 얼굴을 찌푸린 빈센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은 채비를 갖추고 묵묵히 빈센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불만을 가진 기사들도 있었다.
‘전쟁이나 토벌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군의 명령에 의심을 품는 것은 명예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블란테는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의 수장인 빈센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수하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아카데미 따위에 가는데 이런 준비를 해야 하지?’
이러한 불만은 있었지만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대열의 사이에는 카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론은 다른 기사들보다도 더욱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맞나?’
가장 먼저, 에단을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이 에단을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줄을 잘못 탔다는 게 문제지!’
이미 미운털이 박혀 버렸다. 개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카론에게도 나름대로의 억울함이 있었다. 가문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약육강식을 가훈으로 두는 가문의 특성상 약하면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막내로 태어난 카론은 불리함을 짊어진 채 후계자 싸움을 시작했다.
어릴 때의 나이 차는 의미하는 바가 컸고, 당연히 마스터를 목전에 둔 모룬은 넘볼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블란테의 피를 이었으면서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카론은 어쩔 수 없이 먹잇감을 찾아야 했고, 때마침 좋은 먹잇감이 바로 에단이었다.
검술 가문 직계이면서 검을 두려워하며, 지식도 교양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짐승 같은 형.
카론은 에단을 경멸하고 혐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하게 여겼다. 에단 덕에 자신이 입지를 키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에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과거의 나태한 돼지가 아니었다.
변한 에단과 부딪히며 카론은 현실을 인정하게 됐다.
카론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았고, 그 말인즉 더 이상 에단을 넘볼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아카데미까지 찾아가는 꼴이라니.’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블란테에서 가주의 명은 곧 법이나 진배없으니,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기사들도 감히 볼멘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은 기사들이 이번 일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사들만 이렇게 모을 줄이야.’
누가 보면 무력행사를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의 숫자였다. 카론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찾아가는 이유가 뭐야?’
아들인 자신조차 묻지 못한 이유였다. 빈센트가 아카데미를 대하는 태도는 블란테의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방문이라니.
‘에휴.’
카론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카론의 입지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검술 스승도 이제 자신을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술 스승인 아드먼이 떠오르자 입안이 썼다. 한 차례 고개를 흔든 카론이 정면을 바라보자, 기사들을 훑는 빈센트가 보였다.
후웅―
빈센트는 그저 시선만 던졌을 뿐이었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에 기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블란테의 기사는 모두가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시선만으로 그런 블란테의 기사들을 제압했다.
‘……정말 괴물이군.’
자신의 아버지가 괴물이라는 사실은 과거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다시금 느꼈다.
빈센트가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빈센트는 늘 성장했다. 그의 성장은 더뎌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는 거지?’
카론은 두려웠다. 형제끼리 해 왔던 이권 다툼이 우습게 여겨졌다.
기사들은 여전히 긴장한 채 서 있었고, 빈센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드는군.”
“……!”
툭 던지듯 내뱉은 빈센트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말이 우스운 건가?”
“아닙니다!”
기사들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탐탁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말하도록. 증명할 기회는 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빈센트는 몸을 돌렸다.
철그렁.
그때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멈춘 빈센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저건 누구지?’
처음 보는 인상에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큰 로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덜그럭거리는 쇠사슬과 여러 무기들.
블란테는 고명한 검술 가문이다. 모든 기사들이 자신만의 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검은 한 자루뿐이었다. 저자처럼 수많은 무기들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그만큼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빈센트가 미간을 좁힌 채 후드를 눌러쓴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별건 아닙니다. 기회를 준다고 하여 찾아왔을 뿐이지요.”
큭큭.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음침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빈센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고 싶다. 그건가?”
“그럴 리가요. 단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죠. 우리가 아카데미를 가는 이유가 무엇이죠? 설마 그 망나니 때문입니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빈센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망나니?”
그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압력이 향하는 대상은 후드를 눌러쓴 정체 모를 남성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무형의 기세에 사슬과 무기들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의 턱도 덜덜거리며 떨렸다. 몸이 떨리는 와중이었지만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크크…… 망나니가, 아닌가요?”
후웅.
기운을 거둔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놈이 망나니인 건 사실이지.”
“……하.”
“하지만 아들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렉사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추적하는 사자’ 렉사르의 질문에 빈센트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에단한테 얻어터지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 * *
에단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바뀐 것은 크게 없었다. 휴고와 가토는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 좀 떨어지라고. 말 몰기가 힘들잖아.”
“……아니, 이 정도도 안 되는 거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말이 안 무서워하고 배겨?”
휴고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말들의 기피가 더욱 심해졌다.
말이 안정을 취하려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야 했다. 남들이 보면 일행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휴고는 서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귀여운 새끼들.’
가토와 휴고를 한 차례 바라본 에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미래였다. 자신의 행동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후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에단은 헨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헨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휴고와 가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네?”
“너 기억은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잘 모르겠어요.”
“뭐?”
헨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분명 모르던 것을 알게 되기는 했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세계수가 조형한 존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러면 채권자는 어떻게 된 건데?”
“아…… 채권자요?”
헨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뼉을 부딪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헨리가 멋쩍게 웃었다.
“최근 너무 다사다난한 일이 많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빚은 왜 졌지?”
“너 혹시 미쳤냐?”
“아니 그게…….”
헨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는 헨리에게 거짓 기억을 심어 놨다. 어떻게든 움직이도록 동기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기억이 조금 뒤죽박죽이라서요.”
“일단 기억나는 거라도 말해 봐.”
“그…… 아마 빌리게 된 게…… 돈이 필요해서.”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 빌렸겠지. 왜 필요했는데?”
“그게…… 동생한테 보내 줘야 하니까?”
“……맞을래?”
“죄송합니다.”
헨리가 빠르게 사과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헨리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
“그런데 그게…….”
“뭔데?”
헨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말했다.
“돈이 필요해서…….”
“나랑 장난해?”
에단의 얼굴이 사나워지자, 헨리가 쭈물거리며 대답했다.
“그…… 기억상으로는…… 그 돈을 불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돈을 불려? 네가? 뭐 어떻게?”
“아마…… 도박이겠죠?”
그 순간 에단의 손이 올라갔다. 헨리가 얼굴을 가리며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휴.”
에단이 손을 내리고 한심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도박으로 빚을 져 놓고는 뭐? 동생?”
“……하하.”
그녀도 머쓱했는지 웃음만 흘렸다.
“그래서 빚은 누구한테 졌는데.”
“아 그게…… 그 한니발이라고…….”
헨리의 대답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이런 이름을 들어 봤다면 아마 원작에서 언급된 내용일 터.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한니발이라고 하면 혹시, 거상 한니발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이드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을 거예요…….”
에단은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뭐, 생각이 나질 않는 거 보면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고…….’
지금 중요한 건 헨리가 지고 있는 채무였다.
“그래서 빚이 얼만데?”
“그…… 한 1,000골드 정도……? 헤헤.”
“……야.”
“네?”
“내려.”
“살려 주세요!”
헨리가 울먹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