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복귀 (2)
모든 일이 정리되자, 엘프의 숲에서 에단의 평판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염된 숲을 정화하고, 비록 아직 어린나무이기는 하나 세계수를 완전히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거대한 거목이자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었던 세계수가 없어진 상태다 보니 완전한 대체가 가능할지 걱정하는 엘프들도 있었지만, 르니엘과 툰나의 보증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당장은 에단과 헨리, 르니엘의 힘이 세계수를 대체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결국에는 세계수가 필요했다.
‘애초에 세계수 자체도 의심스러운 존재였군.’
고작해야 일개 나무 하나가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라는 것은 무엇이고, 순환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하’와 ‘사자(死者)’에게서 나오는 죽은 마나는 무엇이 다른가.
어쨌든 에단은 결국 두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박 수였으며, 원작에서 언급되지 않은 설정이었다. 본인의 감을 믿은 것이다.
‘뭐, 같은 나무니까.’
덕분에 에단의 내면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안정된 상태였다. 불안정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페온과 카이나.
그 둘도 아직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았다. 둘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지금 추궁하지 않을 뿐, 언젠가는 밝혀내야 할 사실이다.
‘짜증이 나는군.’
이런 복잡한 일은 본래 자신이 담당했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해결할 일을 덤터기 쓰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에단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가토를 바라봤다.
“휴고 깨워.”
“넵, 알겠습니다.”
가토가 휴고를 향해 다가갔다. 휴고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토의 얼굴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가토가 휴고의 턱을 긁었다. 휴고가 몸을 배배 꼬았다.
“……너 뭐 하냐?”
“……죄송합니다.”
에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토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깨워야지. 휴고야, 밥 먹자.”
번뜩.
휴고의 눈이 번뜩였다. 휴고가 잽싸게 몸을 일으킨 다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바, 밥……? 어, 여긴……?”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풍경이었고, 익숙한 것이라고는 앞에 있는 에단과 가토뿐이었다.
웃음을 참는 가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반면 에단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큭큭큭, 많이 배고팠냐?”
“…….”
휴고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다만 시간이 없어. 움직이면서 보존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건지…….”
가토가 눈을 끔뻑이며 휴고를 바라봤다.
“너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그러게? 나 대체 뭐 하고 있었지?”
휴고도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억이 통으로 사라진 상황이니 이런 감상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휴고의 반응을 보던 가토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야.”
“어?”
“멍, 해 봐.”
“……뭐라고?”
휴고는 가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대뜸 짖어 보라고 하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멍’ 한번 해 보라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윽,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건 넌데.”
“……?”
휴고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애들 아니랄까 봐.”
그때 에단에게 툰나가 다가왔다.
“너무 그러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분은…….”
“네. 뭐 그래도 제 동료니까요.”
에단의 반응에 툰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에단의 대답이 예상외였던 것이다.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 것은 크게 없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에단은 툰나의 말을 소홀하게 듣지 않았다. 툰나는 긴 시간을 살아온 엘프였다. 그의 연륜과 지식은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에단이라도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더욱 북쪽으로 넘어가세요.”
“여기서 북쪽이라면.”
“그렇습니다. 좀 거북한 존재들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죠.”
툰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거북하다고 말하는 대상은 신성 왕국임이 분명했다.
‘아직은 좀 귀찮은 녀석들인데.’
신성 왕국은 일개 국가나 무력 집단이 아니었다. 대륙의 유일신이라는 어마어마한 명분을 등에 업은 폭군이었다.
적어도 에단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무력만 따진다면 밀리지 않겠지만.’
블란테의 무력은 신성 왕국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서워할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놈들도 처리해야 할 대상이니까.’
에단은 드레이를 책임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단은 지금껏 뱉은 말을 허투루 넘긴 적이 없었다.
“갑자기 신성 왕국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까?”
“왕국을 넘어, 설산을 향하게 되면 정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툰나가 에단에게 작은 팔찌를 건넸다. 은색에 특별한 문양도 없어 보이는 팔찌였다. 에단은 거부하지 않고 팔찌를 받아 들었다.
“이것도 ‘증표’인가요?”
에단의 물음에 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용사님에게는 모르겠지만, 저 동료분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죠.”
툰나가 휴고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기회군.’
수인족에 대한 정보.
후일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정보였다. 원작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정보는 에단도 알 도리가 없는 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히 읽어 보는 건데 말이야.’
누가 킬링 타임용 웹소설을 탐독하듯 철저히 분석한단 말인가.
‘다시 돌아가도 못 할 짓이지.’
에단이 팔찌를 품에 넣었다.
“좋은 선물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요.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하는 거죠. 덕분에 숲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툰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덩달아 르니엘도 툰나와 같이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단으로서는 정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거기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오히려 죽을 쑤게 되는 쪽은 에단 일행이었다.
적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꼴은 못 보지.’
다른 걸 떠나서 눈꼴시어 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됐지만, 엿을 먹이고 도망간 레벨린과 마크를 떠올리면 아직도 짜증이 치밀었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면.’
수인족에 대해서도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이동해 보겠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잡아 뒀군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좋은 것도 얻게 되었고. 다만 부탁드릴 게 있다면…….”
“네.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지켜 내겠습니다.”
아직 세계수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어린나무는 주변의 비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툰나와 르니엘의 결의 가득한 눈빛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배신자는 잘 처리했습니까?”
에단이 지나가듯이 말하자, 툰나와 르니엘의 표정이 굳었다. 배신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는 건 좋지 않겠지.’
이 무리의 수장이자 실권자는 툰나였다. 여기서 툰나에게 과도한 간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르니엘이 몸을 작게 떨었다.
“알아서 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배신한 녀석인 데다가 입지도 잃어버렸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단은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이곳에서 직접 처리하기엔 걸리는 게 많아 주의로 끝냈다.
“명심하겠습니다.”
르니엘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은 남지 않았다.
“일어나자.”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말은 되찾았지만, 마차가 망가져 당장 운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게 나으려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에단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헨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가 마차에 손을 뻗자,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지면에서부터 나무뿌리가 올라와 마차를 감싸자, 실선이 그어지거나 파손된 부위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가토와 휴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에단도 감탄 어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좀 쓸모가 생겼나요?”
헨리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하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밥값을 좀 하는군.”
에단의 대답에 헨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고맙군요.”
네이드가 허리를 두드렸다. 제아무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며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차 위에 올라탄 네이드를 본 헨리도 눈치를 힐끔 보더니 헤헤거리며 마차 위로 올라갔다.
“음, 그럼 나도 타야겠네. 불만 없지?”
에단까지 마차 위에 탑승하자,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가토가 휴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알지?”
“……잠깐만.”
휴고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당연히 말들은 기겁을 하며 휴고의 손길을 피했다. 휴고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물들었다.
“왜 나만…….”
“그 이유를 아직도 몰라?”
“……뭔데?”
“멍, 해 보면 알려 줄게.”
“아까부터 그게 무슨 소리야…….”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차의 옆에서 떨어졌다. 마부석은 오늘도 가토의 차지가 되었다.
‘……나 이걸로 기뻐해도 되는 걸까?’
가토는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지만, 금방 떨쳐 냈다. 가토 외에는 고삐를 들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오늘도 두 발로 여행길을 걷게 된 휴고보다는 입장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에단은 말없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바뀐 게 없군.’
휴고의 정체는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단지 묻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휴고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휴고는 휴고였고, 이전과 같은 동료일 뿐이었다.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께서는 안목이 좋으시군요.”
“갑자기 사탕발림이야?”
“그냥 그런 것 같아서 말해 봤습니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사탕 좀 드릴까요?”
네이드가 품속에서 작은 알사탕을 꺼냈다.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네이드를 바라봤다.
“이런 건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도련님이 좋아하셨으니까요.”
“아, 그래.”
할 말이 없어지자 에단이 알사탕을 받아 들었다. 얇은 껍질을 까고 입에 넣으니 달달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달긴 하네.”
“입맛에 맞으십니까?”
“근데, 나는 홍삼 맛을 더 좋아해.”
“……홍삼이요?”
“어.”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그런 게 있어. 씁쓸하면서 맛있는 거.”
와그작.
에단이 입에 넣은 사탕을 깨부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