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복귀 (1)
르니엘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르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소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이건.”
처음 겪은 막강한 기운이었다. 생명의 나무가 멀쩡했을 때도, 이런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기운은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멀뚱멀뚱 앞을 바라봤다. 에단과 그 옆에 서 있는 헨리가 보였다.
“……용사 님?”
르니엘이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단의 뺨이 움찔거렸다. 에단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대응했다.
“내가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에단이 생각하기에 용사라는 단어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에단이 살벌하게 눈을 부릅뜨자, 찔끔한 르니엘이 고개를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 아직 통성명을 하지 못했네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르니엘이 시선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헨리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친숙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의도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헨리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며 천천히 일어서는 르니엘의 눈꺼풀이 떨렸다.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제가 무슨…….”
“저걸 봐 주시겠어요?”
헨리가 고개를 돌려 나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어린나무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시선이 그 나무를 향했다.
“……저건.”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거칠게 떨렸다. 저 가녀린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한평생 같이 살아왔던 존재였으니까.
헨리가 르니엘의 손을 놓았다. 르니엘이 천천히 다가가 어린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와아…….”
르니엘은 어린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 하냐?”
에단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자, 헨리가 민망한 듯 웃었다.
“너무 분위기를 깨시는 거 아닌가요?”
“뭐, 나도 사람인지라 협조를 해 주고 싶기는 한데.”
에단이 손목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 * *
가토와 네이드가 거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전에 조우했던 마수에 비하면 이번에 등장한 몬스터는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머릿수만 많을 뿐 단순한 몬스터에 불과했다. 가토의 시선을 따라 다리가 움직였고, 검이 그에 맞춰 춤을 췄다. 무수한 실선이 그어지며 선혈이 솟구쳤다.
네이드는 힐긋 가토를 바라봤다.
‘엄청난 성장이군.’
이 정도까지 가파른 성장을 할 줄은 몰랐다. 가토의 재능과 노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언정 이 정도 속도의 성장은 이해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열 번의 훈련보다 한 번의 실전이라, 그건가.’
네이드가 상체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네이드의 발이 몬스터의 발을 걸었다. 몬스터의 상체가 붕 뜨자, 네이드가 단검을 내리그었다.
푸슛―!
순식간에 급소를 가격당한 몬스터가 목을 틀어막았지만, 성큼 다가온 죽음을 막아설 수 없었다. 피거품을 무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동공이 생기를 잃었다.
네이드가 다시 가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네이드는 가토를 주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토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파밧!
가토가 몬스터의 하단을 걷어찼다. 공중에 뜬 몬스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큭큭.’
네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들밖에 없었다.
‘늙은 나이에 설렘을 느끼게 해 주는군.’
그때부터 둘은 지칠 줄을 모르고 싸워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털썩.
몬스터들이 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쓰러진 몬스터들은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끝난 건가?”
네이드가 중얼거리자 가토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토의 숨은 아직 거칠었다. 그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에단은 일을 이미 끝냈을 것 같았다.
가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가토의 옷은 엉망인 상태였다.
가토가 네이드를 바라봤다. 네이드는 여전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옷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뽀송뽀송한 네이드의 의복에는 피 한 점 묻지 않았다.
“…….”
가토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직 멀었네요.”
“욕심이 과하십니다.”
“그런가요?”
네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가토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면 휴고 녀석 혼 좀 내야겠어요. 저희만 이렇게 고생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가토가 볼멘소리를 내자, 네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소리인 것 같군요.”
그 순간, 기척을 느낀 네이드와 가토가 고개를 들었다. 몬스터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도련님.”
“어, 고생했어.”
에단이 덤덤하게 손을 들어 네이드를 향해 말했다. 순간 에단의 시선이 가토를 향했다. 에단이 미간을 좁힐 정도로 가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얘는 상태가 왜 이렇게 거지꼴이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셔.”
에단이 손을 건네 가토를 일으키려 하다가 손을 뺐다. 에단의 행동에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네 손이 조금 더러운 것 같아서. 찝찝하잖아.”
“…….”
가토가 서운함과 서러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피식 웃더니 재차 왼손을 뻗었다.
“농담이야, 인마. 표정 한번 가관이네.”
“……저 울 뻔했습니다.”
“명색이 내 기사라는 놈이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려서야 쓰나.”
에단이 가토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가토가 엉덩이를 털어 냈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뭐 얼추 해결됐다고 봐야지.”
가토가 고개를 돌려 헨리와 르니엘을 바라봤다. 가토는 단번에 헨리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점을 눈치챘다.
이전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벽이 쳐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벽에서 느껴지는 것은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은은한 위압감에 가까웠다.
네이드가 헨리와 에단,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모두 달라졌군.’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올린 네이드는 알 수 있었다. 저 셋은 같은 기운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중 에단은…… 독보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방금까지 가토의 성장세도 엄청나다고 여겼지만, 등장만으로도 가토의 존재감이 옅어질 정도로 에단은 또다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나타났다.
‘부작용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성장 방식으로 힘을 얻은 게 아닌 탓에 완벽하진 않았다. 마스터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마나가 전부가 아니니까.
‘차차 나아질 문제지.’
에단은 분명 머지않아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네이드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에단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벨트라인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성검이 꽤나 불편했다.
‘아버지를 뵈는 김에 검집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는데.’
에단이 네이드와 가토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 * *
휴고는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의 안정만 취하면 머지않아 눈을 뜰 터였다.
툰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숲의 풍경이 보였다.
“르니엘.”
툰나가 르니엘의 이름을 되뇌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툰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툰나의 시선이 다시금 휴고에게로 돌아갔다. 툰나는 휴고의 외향이 뒤바뀌는 과정을 직접 봤었다. 오랜만이기는 했으나, 낯설지는 않았다.
‘수인족.’
과거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종족이었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엘프처럼 숲이나 산에 터를 잡고 있었지만, 그들은 엘프와 달리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월한 신체 능력과 타고난 전투 본능은 수인족을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 줬다. 숫자로는 인간에게 밀렸지만, 압도적인 전투 능력으로 인간의 군대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결국 패한 것은 수인족이지만.’
어떠한 일을 계기로 수인족은 패배하고 말았고, 다시 뿔뿔이 흩어진 수인족들은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휴고가 평범한 늑대족이 아니라는 것은 털의 색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은빛 털은 선택받은 늑대족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툰나가 생각에 잠긴 채 휴고를 바라보고 있을 때, 숲 너머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긴 시간을 숲과 마을에서 살아온 툰나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다가오는 자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기운을 느꼈다. 포근함과 충만한 기운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툰나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성공했군요.”
* * *
툭툭.
가토가 휴고의 턱을 건드렸다. 자기들은 이렇게 개처럼 구르고 있는데,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눈꼴시었다.
에단은 그런 가토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툰나를 바라봤다.
“일은 대충 해결된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툰나는 떨리는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는 이 마을의 장로였다. 그 말인즉 가장 오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었고, 에단의 존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에단의 주위에 마나가 순환되고 있었다. 에단의 몸속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안정되어 있었다.
르니엘과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툰나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기연을 얻었구나.”
르니엘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툰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시금 에단을 바라봤다.
“저희 마을은 당신을 영원한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에단이 헨리를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에단의 의중을 눈치챈 헨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생명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녀가 툰나와 르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헨리의 말에 툰나와 르니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결단코 지켜 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에단이 둘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휴고에게로 다가갔다. 가토가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자리를 피했다. 에단이 휴고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간질간질.
에단이 휴고의 턱을 간질였다. 마치 강아지를 대하는 손짓이었다.
부르르.
휴고가 미세하게 몸을 떨더니 이내 몸을 비틀었다. 가토는 눈을 끔뻑이며 멍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