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나를 협박해? (2)
에단은 페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성검을 매개체로.’
터질 것 같은 힘을 헨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에단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은 지금 대해와도 같았다.
더군다나 이질적인 기운이다. 일반적인 마나도 아니고, 죽은 마나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였다.
이 기운을 헨리가 과연 수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헨리가 적임자였다.
그녀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아 중 하나였기에 이 방대한 기운을 받아들이기에는 최적이었다.
헨리의 확고한 눈을 바라본 에단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에단의 몸속에 있는 기운은 이전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띠지 않았다.
잠잠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힘 자체가 에단의 수용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에단의 몸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에단의 왼손이 성검의 날을 붙잡고 손잡이를 건넸다. 헨리는 망설이지 않고 에단이 건넨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 시작한다.
카이나 또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규격 외의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의 역할은 결코 단순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스―
거대한 바다에 미약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에단의 몸속에 있던 바다가 천천히 흐른다. 성검이라는 통로는 넓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좁은 장소에 불만을 가진 해일 같은 마나는 순식간에 성검의 통로를 통해서 헨리를 향해 넘어가기 시작했다.
쿵―!
갑작스러운 충격에 헨리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 죽을 거 같아.’
아직 일부분만 넘어왔음에도 엄청난 힘과 여파가 느껴졌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이를 악물며 견뎌 냈다.
‘이 정도도 못 참아?’
헨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는 했다. 그게 자신의 천성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게 나서는 것은 과용과 만용이라 여겼다.
하지만 헨리는 에단을 봐 왔다. 에단은 언제나 무모했다. 블란테라는 배경을 감안하고 바라봐도 에단에 행동은 미친 짓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언제나 증명해 왔다. 헨리는 그런 에단의 당당함을 동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다. 헨리는 소심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에단이 이런 고통을 짊어지게 된 원인이 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빚을 청산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덜어 낼 수 있다면…….
‘여기서 죽어도 돼.’
그게 헨리의 각오이자, 다짐이었다. 헨리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파도가 거칠어지며 헨리를 향해 마나의 이동이 가속화됐다.
촤악!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헨리의 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헨리는 결코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에단의 호흡이 점점 평안해졌으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페온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정말 이 막대한 기운을 수용하고 있다니.
외관상 보이는 어리숙함에 헨리를 낮게 평가했었다. 하지만 헨리의 역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대마법사나 마스터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 마나의 대해를 헨리는 담담히 흡수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세계수의 유지를 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헨리가 과소평가될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한들, 이 대해 같은 마나를 수용하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통로의 역할을 담당 중인 카이나는 연신 고통에 찬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이런 제기랄! 어쩌다 이딴 녀석을 만나서는!
카이나가 한탄이 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대한 마나가 길을 건너는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다.
후우, 후우.
에단의 호흡이 이전보다 훨씬 평온해졌고, 일정해졌다. 에단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얼굴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지만, 조금 전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정된 상태였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이를 부서져라 악물고 있는 헨리가 보였다.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르니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 엘프임에도 그녀는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외지인들에게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이 느껴졌다.
가녀린 헨리의 모습을 한 차례 지켜본 르니엘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 저도 도움을 주겠습니다!”
르니엘이 무턱대고 성검에 손을 뻗었다.
‘저런 미친!’
에단이 소리치려 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 상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덥썩.
르니엘이 헨리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반발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에단이 한숨을 돌렸다.
‘이 기운을 수용하고 있어서인가?’
대해와도 같은 마나의 통로를 자청하고 있는 지금, 섣부르게 반발력을 일으켰다간 성검조차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런 줏대 없는…….’
하지만 도리어 상황은 나아졌다.
비록 헨리에 비해서는 뒤질 수 있어도, 엘프 중 누구보다 세계수와 친화력이 높은 이가 바로 하이엘프인 르니엘이었다.
르니엘 또한 에단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수용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헨리의 낯빛이 한결 나아졌다.
스스스스―
파도가 치며 마나가 넘어간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던 마나도 어느새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에단은 지금 가늠하고 있었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본인의 몸을 관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순간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에단이 통로를 막으며 성검을 붙잡고 있던 왼손을 당겼다.
툭―
에단이 성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하아.”
에단이 엎드린 채 호흡을 골랐다. 통로를 막자, 나가떨어지기는 헨리와 르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갑자기 얻은 방대한 마나를 제어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감은 헨리는 자신의 내면이 보였다. 그제야 헨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인간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 숲에 들어서고 나서 느낀 이질감과 세계수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를 봤을 때 느껴지던 묘한 동질감.
잊었던 본분이 보였다. 몸을 가득 채운 마나는 헨리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헨리가 눈을 떴다. 마나의 컨트롤은 숨을 쉬는 것처럼 할 수 있었다. 마나의 형질은 달라졌지만 결국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같았다.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서 작은 묘목이 생겨났다.
새싹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작은 나무 한 그루였다. 천천히 땅을 파기 시작한 헨리는 그곳에 나무를 심었다.
‘이건 세계수일까?’
헨리가 본인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정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제대로 자라게 된다면 분명 숲과 대륙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걸.
‘당장은 문제가 없겠네.’
헨리의 갈색 눈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맑은 눈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르니엘과 에단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셋이 지금 마나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육체 자체가 세계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인간은 유한한 삶을 가졌다.
인간에 비해서는 오랜 기간을 살아가는 엘프도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관조하는 세계수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헨리는 쓸쓸한 표정으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봤다.
‘너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세계수는 원래 인격을 지니지 않는다. 헨리를 만들어 낸 인격조차 결국에는 어떠한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던 그것은 그녀의 여동생이자, 남동생이었으며, 그녀의 부모였다.
‘아는 게 많지가 않네.’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바뀌는 것은 크게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헨리였다.
에단이 말해 준 사실이다. 원래라면 자신은 세계수가 회복되며 자연히 소멸할 존재였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를 그런 존재로 놔두지 않았다.
에단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자를 만나는 기분은 특별했다.
‘정말 괴물이었네.’
헨리는 이제 에단이 얼마나 괴물인지를 알게 되었다.
넘쳐 나는 마나를 자신과 르니엘에게 나눠 줬지만, 이 둘의 마나를 합친 것보다 에단이 지닌 마나의 양이 더욱 컸다.
헨리는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정도였으니까.
헨리가 에단을 바라봤다. 바닥을 짚고 있던 에단이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에단이 혀를 내두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이내 특유의 웃음을 머금은 채 헨리를 바라봤다.
“이제 좀 정신 좀 차렸냐?”
에단의 가벼운 언행에 헨리도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요.”
에단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의 옆에 있는 르니엘에게 돌아갔다. 르니엘은 아직도 낑낑거리고 있었다.
“……쟤는 언제 괜찮아지냐?”
“잠시만요.”
헨리가 르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르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헨리의 손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호오.”
에단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헨리는 어떻게 보면 르니엘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인도에 르니엘의 가파른 호흡이 일정해지고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니엘이 눈을 떴다.
“……용사님?”
“아직도 그 소리냐?”
에단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성검을 들었다.
― ……이런 빌어먹을 새끼.
성검을 쥐자마자 카이나의 신랄한 욕설이 에단을 반겼다. 에단은 킥킥 웃으며 답했다.
‘결국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 내가 뒈지는 줄 알았거든? 야, 페온. 이 새끼 원래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아니면 최근 들어 미친 거야?
― 원래 제정신이 아닌 쪽에 가깝지. 그걸 지금 느끼다니. 카이나, 너는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건가?
― 이런 ㅆ…….
카이나가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하자, 에단은 귀를 닫았다.
‘어떻게 일을 해결하긴 했군.’
시간을 지체한 탓에 생각보다 일이 어려웠다.
‘그래도 남은 일이 많아.’
안심하기는 일렀다. 가장 먼저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을 생각한다면 벌써 늦었다.
레벨린과 교장이 도주하며 생긴 공백은 에밀라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은.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을 뵙겠군.’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