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나를 협박해? (1)
르니엘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단순한 마나의 폭풍이 아니었다. 죽음의 마나와 세계수의 마나가 맞부딪쳤다.
더불어 꽂혀 있는 검에서도 찬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세 가지의 힘이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우위를 점한 것은 에단이 뿜어내는 어둡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에단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르니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내, 내가 또 실수한 걸까?’
에단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르니엘의 시선이 이번에는 헨리에게로 향했다.
르니엘의 눈이 점차 커졌다. 헨리는 생각보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마주했던 것 같은 몽롱한 눈이 아닌, 또렷한 눈동자였다.
‘대체 어떻게…….’
헨리에게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우직하게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 옆에 거대한 나무가 생겨나는 모습에 르니엘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소름 끼치는 모습의 나무였다. 그 나무는 세계수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쾅!
그때 거대한 폭발음이 터졌다. 휘몰아치던 마나가 결국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에단이 그 순간 헨리를 끌어당겼다.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마나를 통해 신체를 보호할 수 없다.
이미 모든 마나를 소진한 상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체의 내구력뿐이었다.
옷이 찢어발겨지며 살가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 순간을 놓칠 생각이 없었기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단의 눈은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뿌리내린 죽은 나무와 세계수의 자리싸움이 시작됐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세계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력으로 방어했다.
“카이나!”
에단이 소리치자 카이나에게서 짜증 가득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카이나가 빽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에단의 의도는 확실하게 읽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던 성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저 빛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 나도 이제 몰라! 제기라아알!
키에에에에에엑―!
죽은 나무의 뿌리가 세계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세계수는 죽은 나무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꽈드드드득!
세계수를 꽁꽁 싸맨 죽은 나무가 세계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 끄아아아아아악!
세계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의 여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도 헨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에단이 힐긋 눈을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의 몸은 가늘게 떨리는 중이었다.
“버텨.”
이것까지는 에단이 도와줄 수가 없었다.
헨리의 인격에 세계수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헨리의 심경이 흔들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에단은 이제 헨리를 완전히 세계수에서 분리할 생각이었다.
콰지직!
세계수를 압박하던 죽은 나무가 결국 세계수의 몸을 완전히 부러트렸다.
더 이상 세계수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나의 여파가 가세되었다. 하지만 이번 여파는 얼마 가지 않았다.
죽은 나무가 세계수의 잔재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죽은 자의 몸에서만 마나를 추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수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마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폭풍의 여파가 걷혔다.
에단의 몸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었다.
고된 채찍질을 당한 죄수의 몸처럼 몸 곳곳에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 않고 달렸다.
에단이 노리는 것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성검이었다. 에단이 왼손을 뻗어 성검을 쥐었다.
순간 빛이 발산되며 에단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됐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죽은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성검이 흩뿌리는 섬광이 죽은 나무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에단이 상체를 숙였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에단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두 차례의 도움닫기를 통해 죽은 나무를 향해 뛰어들었다.
푸욱!
에단의 손에 들린 성검이 죽은 나무의 몸에 꽂혔다.
‘카이나 씨?’
― 이런 개…….
카이나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욕설은 에단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 썅! 하면 되잖아!
카이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힘을 발산했고, 그와 함께 죽은 나무가 거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 끝냈으면 이제 돌아와야지?”
에단이 죽은 나무의 겉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죽은 나무의 표면이 갈라지며 에단의 손이 푹 박혔다.
이미 한 번 흡수한 힘이었다.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빨리 안 와?”
에단이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죽은 나무의 몸이 비틀렸다.
죽은 나무에게도 자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은 나무는 지금 겁을 먹고 있었다. 세계수를 삼킬 때처럼 포악하고 광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상대를 요리하는 건 에단의 주특기였다.
콰직! 콰직!
저항의 의지를 부숴 버리기 위한 에단의 주먹질이 시작됐다.
에단의 왼손은 타이탄의 장갑이 보호하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어떤 대응을 하든,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려 하든 의미가 없었다.
타이탄의 장갑은 죽은 나무의 껍질을 계속해서 벗겨 냈다.
콰지직!
주먹질이 이어지자 에단의 팔이 결국 죽은 나무 사이에 깊게 박혔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 거기서 오른쪽!
카이나의 외침에 에단의 눈이 번뜩였다. 에단이 팔을 뽑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죽은 나무의 속살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콰지직!
에단의 손이 다시 한번 깊게 박혔다. 손에 감각이 느껴졌다.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찾았다.’
손에 집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단의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물체는 바로 죽은 나무의 핵이었다.
키에에엑!
죽은 나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성검의 힘이 죽은 나무를 방해했고, 내부에서는 에단이 거칠게 핵을 움켜쥐고 있었다.
죽은 나무의 핵이 귀여운 반항을 시작하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상큼한 새끼.’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타이탄의 장갑을 꿰뚫을 수는 없었다.
에단이 왼손에 힘을 줬다. 전완근에 핏줄이 돋아나자 죽은 나무의 핵이 바르르 떨렸다.
“터져 볼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죽은 나무의 저항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마지막 경고야. 뒈지기 싫으면 다시 들어와. 우리 지금까지 좋았잖아?”
키에엑…….
그 단말마를 끝으로 죽은 나무의 크기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결국 에단이 쥐고 있는 핵만 남게 되었다.
에단이 말없이 죽은 나무의 핵을 바라봤다.
에단이 처음 죽은 나무의 힘을 흡수할 때 봤던 볼품없는 나뭇가지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에단이 움켜쥔 나뭇가지에 힘을 주자, 나뭇가지가 떨리더니 이전처럼 에단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흡수되는 모습에 에단은 가만히 죽은 나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쿠웅―!
엄청난 충격이 갑자기 에단의 몸을 덮쳤다. 실제로 몸이 들썩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해일 같은 힘의 파도가 에단의 신체에 휘몰아쳤다.
이전의 힘과는 궤가 달랐다.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페온이 침음을 집어삼켰다. 이런 종류의 힘은 페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카이나의 목소리가 에단의 귀에 파고들었다.
― 뭐 해, 머저리 새끼야! 빨리 검을 쥐어!
쿵.
한 차례의 충격과 함께 몸 전체의 혈관이 돋아났다. 흉측한 모습이었다.
에단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야속하게도 거리가 멀었다.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정신력이나 인내력으로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헨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 내가 뭐라도 해야 해.’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헨리는 아직도 이성을 되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에단이 자신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고, 끝까지 자신을 믿었다는 것을.
헨리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헨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헨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손이 성검으로 향했다.
― 너……!
카이나가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헨리에게 닿지 않았다. 헨리가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헨리를 향해 소리치려 했지만, 에단은 지금 목소리 한 점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헨리가 결국 성검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눈을 부릅떴다. 원래라면 엄청난 반발력이 헨리를 덮쳐야 정상이었지만, 성검의 반발력은 헨리를 덮치지 않았다.
헨리가 검을 쥔 채 에단에게 뛰어갔다.
“에, 에단 님! 제가 지금 뭘 하면 되죠?!”
헨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하지만 성검을 꼬옥 붙잡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
에단이 손을 뻗었다. 헨리가 황급하게 에단에게 성검을 건넸다.
‘제기랄, 정말로 뒈지겠군.’
농담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때마다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에단의 육체는 이미 한 번 각성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수용 가능한 마나의 총량이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기운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페온이 섣부른 조언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넘어섰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자그마치 세계수의 힘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관조하는 세계수의 힘을 일개 인간이 모두 흡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죽은 나무의 막대한 기운조차 받아들였다.
한 가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국에 거대한 두 힘을 모두 삼키려 들었다.
페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너무 무모한 짓을 저질렀어.’
페온과 카이나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에단의 몸은 지금 폭탄과 다름없었다.
총량을 아무리 늘린다고 한들 저 둘의 힘은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헨리가 에단에게 성검을 건네주는 그때, 페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 에단! 쟤를 빨리 붙잡아!
에단은 페온의 외침 한마디로 그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에단은 성검을 건네받으며 얻은 잠깐의 자유로 헨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헨리가 당황하며 에단에게 끌려왔고, 에단은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헨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단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견딜, 수, 있겠, 냐……?”
진지한 에단의 물음에, 당황에 물들었던 헨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에단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상관없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견딜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