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헨리 (2)
일행에게 말을 한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목걸이에서는 더 이상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에단의 시선이 르니엘과 툰나에게로 향했다.
“이제 세계수로 가 마무리 지어야지.”
“……장로님.”
르니엘이 툰나를 바라봤다. 르니엘의 표정에는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번 일은 숲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건 아닐까?’
르니엘는 확신을 하는 게 두려웠다. 그때 르니엘의 어깨에 툰나의 손이 올라갔다.
그의 손은 따듯했다.
“르니엘.”
“…….”
“괜찮다.”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르니엘은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르니엘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르니엘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세계수를 찾아갈 방법은 많았다.
에단의 몸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은 나무.
그리고 유일한 증표인 세계수의 목걸이와 헨리.
‘하지만 작정하고 숨어들면 의미가 없지.’
세계수의 또 다른 자아는 이미 에단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 * *
타다닷!
르니엘을 선두로 에단과 일행이 뒤따랐다. 헨리는 에단이 짐짝처럼 짊어진 채 달렸다.
헨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거부할 수도 없었다.
헨리의 신체 능력으로는 이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르니엘의 뒤를 따라가는 에단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하군.’
르니엘은 시시각각 뒤바뀌는 길을 막힘없이 개척해 나갔다.
세계수의 방해였다. 하지만 르니엘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새로울 길을 찾아냈다.
마치 위에서 관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즉에 막든가.’
오염되기 전부터 채비를 제대로 했으면 이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찬 에단이 르니엘의 뒤를 바지런히 따랐다.
바로 그때,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에단은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다가 발로 몬스터를 걷어찼다.
쾅!
몬스터가 사정없이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네이드! 가토!”
“알겠습니다!”
가토가 선두로 튀어나왔다. 가토의 검광이 번뜩였다.
네이드도 따라붙어 단검을 휘두르자 피가 솟구쳤고, 사방에 몬스터들의 괴성이 메아리쳤다.
르니엘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내 숲의 심층부 입구에서 멈춘 르니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이 막혀 있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계수는 언제나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길을 막아 버리다니…….
“비켜 봐.”
에단이 헨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와 넝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검으로는 의미가 없겠군.’
성검의 힘은 정화에서만 극강의 효과를 자랑했다. 이럴 땐 오히려 다른 것이 더 효과적일 터.
에단이 죽은 마나의 힘을 끌어 올리자 검은 기운이 주위에 넘실거렸다.
음험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마치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단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몸이 회전했다. 에단이 왼손을 내밀었다.
꽈광―!
귀가 멀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길이 뻥 하고 뚫렸지만, 그 또한 일시적이었다.
넝쿨이 다시 길을 막으려고 들자 에단이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금이 적기지.’
키에에엑!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네이드와 가토가 열심히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린 채 터진 길을 따라 질주했다.
달려 나가면서 에단이 고개를 돌려 르니엘을 바라봤다.
“고맙다!”
르니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숲의 심층부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세계수를 마주하게 됐다.
생명과 풍요와는 거리가 먼 앙상하게 마른 거목이었다.
제정신인 상태로 세계수를 마주하자 헨리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헨리.”
에단이 헨리를 불렀다. 헨리의 표정은 한마디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에단 님……. 저는 대체 무엇이죠?”
에단은 헨리를 바라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기억 안 나?”
에단이 성검을 꺼내 들자 카이나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
‘지켜보고 계세요.’
에단은 모두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헨리는 세계수가 만들어 낸 인격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 기제가 헨리였다.
‘원래라면 더 복잡해졌겠지만.’
세계수의 보험이 바로 헨리이기에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덩달아 헨리도 가진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다행이야.’
만일 헨리를 향한 세계수의 통제가 그대로 작용했다면, 에단의 의도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넌 내 직원이라고. 어딜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그렇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에단이 성검을 쥔 채 세계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속이 들끓는다. 죽은 나무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에단의 내부는 한쪽으로 치우쳐져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 더욱 가까웠다.
에단이 세계수에게 점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대체 뭐를 할 생각이지?
“왜? 이제야 좀 쫄리냐?”
― 왜 저딴 녀석에게 집착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내 직원이라고. 어딜 마음대로 직원을 빼 가려고 하고 있어.”
에단이 히죽 웃었다. 앙상한 세계수가 몸을 떠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그만, 멈춰!
“싫어.”
세계수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녀석과의 대화라.’
아마 에단이 지니고 있는 죽은 나무의 힘 때문이겠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이었고, 몇 차례 언급된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앞으로는 개척을 해야 했다.
“헨리.”
“……네.”
“죽고 싶은 건 아니지?”
순간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헨리가 죽고 싶다고 대답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헨리는 한 차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답했다.
“네, 살고 싶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에단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거면 됐어. 들었지? 얘가 살고 싶다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너도 진짜는 아니지 않나?”
― 그걸 어떻게……!
“알면 다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검을 세계수를 향해 찔러 넣자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은 밀려나지 않았다.
에단의 다리는 지면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 삼켰다. 복압이 단단하게 유지되며 몸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죽은 마나를 몸 전체에 골고루 퍼트렸다.
카이나가 역정을 냈다.
― 야! 나는 이 기운 존나 싫어!
그러나 에단은 카이나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에서 날뛰던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푸욱!
성검이 세계수에 깊이 박혔다. 그와 함께 성검에서 찬란한 빛이 발산되었고, 에단은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좀 낫는 것 같지 않아?”
원래라면 이 방법으로 오염된 세계수를 정화하려 했지만, 이것만으로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계수는 너무 약화되었다. 만일 회복된다고 해도 그 힘과 크기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그렇다면.’
살을 붙여 주면 된다.
검을 찔러 넣은 뒤 에단이 손을 뗐다. 그러고는 곧장 땅바닥에 팔을 박아 넣었다.
“후읍!”
에단이 다시 한번 의식을 집중했다. 그제야 페온은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 깨닫고 소리쳤다.
―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가만히 지켜보고 계세요.’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것은 자신이다. 이건 확신이다. 이 행동은 확신 없이 던지는 만용 따위가 아니었다.
“후읍!”
에단이 숨을 들이켰다. 복압을 단단하게 유지했다. 지금부터는 반동을 견뎌야 하기에 충격에 유의해야 했다.
쿠구구구구구―
에단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이끌어 냈다. 그와 동시에 죽은 나무조차 끄집어냈다.
키에에에에―!
죽은 나무의 귀곡성이 숲에 울려 퍼졌고, 그 압도적인 위용에 르니엘은 기가 죽었다.
이윽고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마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나와 죽은 마나, 그리고 성검의 정화 능력까지.
모든 기운이 상충되고 있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는 카이나가 악을 질렀다.
― 이 미친 새끼야!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조율하십시오!”
에단이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이제 자신도 한계였다.
나름의 한 수를 던지긴 했지만,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한마디로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뜻이다.
‘상충하는 두 거목.’
별생각 없이 넘기기에는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단에게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부분은 편법으로 손에 넣은 힘이었다. 마스터의 벽은 넘었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이 바로 파멸의 순간이었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이.’
지금 던진 이 도박 수였다.
죽은 나무가 에단의 손을 벗어났다. 죽은 나무는 이미 많은 양분을 섭취한 상태였다.
원래라면 묘목도 안 되는 일개 나뭇가지였던 죽은 나무는, 차근차근 힘을 모아 어느새 약화된 세계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에단은 거기에 양분을 더했다. 에단이 손에 넣은 죽은 마나를 모조리 죽은 나무에게 집어넣고 있었다.
― 이런 미친놈이 지금 무슨 짓을……!
페온이 경악을 삼켰다. 저놈이 지금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이 벌이는 일은 세계수인 ‘생명의 나무’와 ‘죽은 나무’의 융합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합일.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뿌리가 어떻게 함께한단 말인가.
하지만 에단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언젠가 뒈져.’
저승이나 윤회 따위는 모른다.
두 거목은 가장 멀어 보였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가장 가까워 보였다.
그렇기에 에단은 확신했다. 위태로운 자신의 상태를 해결하고, 저 재수 없는 세계수의 자아에게 엿을 먹일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걸.
그 여파?
‘그게 내 알 바냐?’
그딴 건 모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자신이 열이 받는다는 거다.
에단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곧 죽어도 굽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뒈지더라도.’
사건 한번 일으키고 간다.
에단의 얼굴에 핏대가 돋아났다. 눈가에선 실핏줄이 터지고, 죽은 마나의 과용으로 인해 검은 피가 눈코입에서 줄줄 흘렀다.
에단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에단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에단의 비아냥에 세계수가 기겁하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 이, 이 정신 나간 새끼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고대로부터 내려온 법칙을 깨부술 생각이냔 말이다!
“그러게 누가 좆 같은 협박을 하래?”
그것도 나한테?
넌 사람 잘못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