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헨리 (1)
에단이 차가운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무언가에 의해 붙잡혀 있었으니까.
에단이 목걸이를 들었다.
이건 촉매였다.
헨리의 의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지.’
에단이 목걸이를 헨리의 몸 위에 올렸다.
지이이잉―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따스한 온기와도 같은 빛이었다. 드레이가 뿜어낸 찬란한 광채와는 결이 다른 신성함이었다.
후웅!
보호막이 펼쳐지며 에단과 헨리를 둘러쌌다.
에단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무의식에 늪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집이었다. 아니, 나무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할 수준의 오두막이었다.
집 안에서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군.’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숲속의 오두막.
에단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됐다.
‘단열은 안 될 테고, 벌레는 들끓겠지. 기본적인 생활도 뭐…….’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비단 식재 조달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고려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걸었다.
에단이 한 걸음씩 다가가자 웃음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숲의 어둠은 사나웠다.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에단의 시야는 뚜렷했다. 이제 에단에게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흑흑흑.”
헨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은 에단이 문을 열었다.
쾅!
후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다시 시야가 반전되는 상황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에단이 앞을 바라봤다. 정체 모를 괴물이 에단의 앞에 서 있었다.
한참 위에서 에단을 내려 볼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이 정도 사이즈는 블랙 오우거 외에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에단이 목을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래, 뭐……. 이 정도 이벤트도 없으면 안 되겠지.”
안 그러면 실망이지.
터벅터벅.
에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괴물을 향해 걸어 나섰다. 괴물이 에단을 향해 포효했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에단이 웃었다.
* * *
쿠웅!
거인이 바닥에 쓰러진 걸 확인한 에단이 가볍게 손을 털어 내자, 그와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배경이 달라졌다.
에단의 얼굴에는 짜증이 맴돌았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라는 거야?”
하지만 앞을 보아하니,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았다.
헨리가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단은 다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에단은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죽은 나무는 세계수와 상극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무엇보다 가까웠다.
에단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의 앞에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헨리를 비난하고 있었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에단이 다가서자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동요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누구 마음대로 늦었단 말인가. 정말 늦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표독스러웠다. 절망과 원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헨리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쾅!
에단이 땅을 구르자 응집된 죽은 마나가 폭발하듯이 전개되었다.
에단이 지닌 죽은 마나는 최근 포식을 한 터라 충만한 상태였고, 반대로 세계수는 지금 빈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헨리한테 이럴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에단은 세계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죽은 마나가 퍼지며 순간 어둠이 짙어진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하얀 배경으로 바뀌었다.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눈이 팅팅 부은 헨리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왜 질질 짜고 있어?”
“……네?”
헨리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이런 상황에서 구박을 받으니 서러움이 북받쳤다.
“하, 하지만…….”
헨리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려 하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울면 맞는다.”
“……아, 알겠어요.”
헨리가 울음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에단에게 얻어맞는 건 사양이었다.
에단이 사람을 패는 걸 수도 없이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죽을 거야…….’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에게 맞아 죽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에단은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헨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 좀 낫네.”
“……너무해.”
헨리가 작은 투정을 부렸다. 에단은 헨리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을 바라봤다.
“보고 있는 거 알거든?”
에단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안 내보내면 다 깨부순다?”
살벌한 경고였다. 하지만 허언은 아니었다. 에단은 지금껏 내뱉은 말을 모두 지켜 왔다.
― ……이유가 뭐지?
“이유?”
에단이 헨리의 목덜미를 붙잡아 쑤욱 끌어 올리자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딸려 왔다.
“네가 내 직원 울렸잖아.”
에단이 씨익 웃었다. 헨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그 녀석은…….
“거기까지. 그 이상은 별로 필요 없거든.”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에단에게는 하등의 상관도 없었다.
에단이 헨리를 씨익 바라봤다.
“이미 상처받은 거 조금 더 받아도 되지?”
“네?”
헨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에단이 말했다.
“얘가 네 꼭두각시인 거? 그래서 어쩌라고?”
“꼬, 꼭두각시요……?”
헨리가 말을 되물었다. 하지만 에단은 헨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줄, 내가 오늘 끊어 버릴 거거든.”
― 네가 무슨 권한으로……!
녀석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소유욕을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유욕은 에단도 뒤지지 않는다.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헨리는 에단의 소유였다.
에단은 자신의 것을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권한이 왜 없어?”
에단이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너 여기서 이대로 죽을래?”
에단의 질문에 헨리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방금까지 그녀는 죽고 싶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단이 나타나자 절망과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어둠 속에서 건져 냈다. 거기까지 떠올린 헨리의 동공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하는 거죠?”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정말 에단에 손에 의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분명 방금까지는 죽고 싶었는데…….”
헨리가 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살고 싶어졌어요.”
“좋아.”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들고 있던 헨리를 지면에 내려놨다.
뚜둑. 뚜두둑.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주도권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왜, 죽을까 봐 겁나?”
― ……내가 죽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대충은.”
생명의 나무.
세계수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마나를 순환시킨다.
마나는 정체되지 않고 순환한다. 그게 이 세계의 규율이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설정까지 깊게 파고드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 나무가 완전히 오염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반대되는 성향의 녀석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단 점이다.
망령과 언데드들이 들끓으며 ‘지하’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대기 중의 마나는 흐려지고, 정령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일이 더럽게 귀찮아진다는 거지.’
에단에게는 적들이 활개 칠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태도가 더럽게 아니꼽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상 도와주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저따위 태도를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생각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에단이 죽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죽은 나무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은 지금 진심이었다.
― ……진심인가?
“그럼 거짓말 같아? 지금 선택해. 여기서 뒈질지. 아니면 내보낼지.”
― 어차피 상황은 끝났어.
“누구 마음대로 끝났어? 어차피 너도 ‘진짜’는 아니잖아.”
―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왜, 궁금해?”
― …….
히죽 웃는 에단의 모습에 세계수가 침묵했다. 결국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 그 증표가 어째서 네놈 따위에게 갔는지 모르겠군.
“왜 혀가 길어지실까.”
― 좋아. 내보내 주지,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다.
“글쎄? 살면서 후회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너무 식상한 경고 아닌가?”
― 내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놈이 그렇게 말하는 건가?
“아무 일 없게끔 내가 만들 거거든.”
― 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시야가 다시 한번 반전된다.
번쩍 눈을 뜬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툰나의 거처였다. 에단이 눈을 뜨자, 툰나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뭐, 잘 해결됐어.”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에단 님.”
“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죠?”
많은 일을 겪어 놓고도 헨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 탓에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귀찮아. 나중에 말해 줄게.”
에단이 몸을 돌렸다. 뒤에는 가토와 네이드가 서 있었다.
휴고는 지금 다른 거처에서 자고 있었다. 심신에 적지 않은 피로가 쌓인 탓에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인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원래라면 정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에단이 성검을 바라봤다. 성검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이미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세계수를 완전히 정화하기는 어려웠다.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에게는 설명하지 못했다.
세계수가 피해를 감수하고 정화를 택한다면, 아마 헨리는 소멸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불쾌함이 들었다. 그따위의 결과는 사양이었다.
‘빼앗기는 건 질색이야.’
원작과는 상황이 달라진 탓에 이제부터는 에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개척해 나가야 알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무턱대고 희망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어그러질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어떻게든 되기 마련일 테니까.
에단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쉬었지?”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노인을 너무 고생시키시는군요.”
“아직 정정하면서 엄살은, 가토 너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벌써 약아졌네. 뭐, 그럼 움직이자.”
이제는 진짜 끝을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