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세계수 (4)
죽은 마나에 잠식당한 인간.
불길함이 형상화되어 넘실거린다. 꺼림직하고 섬뜩한 기운이 숲을 메웠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네이드가 에단을 불렀다.
“도련님.”
“어, 괜찮아.”
에단이 가볍게 손을 들며 네이드의 걱정을 일축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뿌려 둔 씨앗을 흡수한 녀석은 강했다.
‘하지만.’
에단은 이미 저따위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녀석을 상대로 승리했다. 고작 저런 조잡한 급조물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쓰읍.”
오히려 입맛이 돋았다.
이미 에단이 흡수한 죽은 마나는 과분할 정도로 넘쳐흘렀지만, 에단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고작 이 정도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온갖 특전을 독식한 주인공도 헤쳐 나가지 못한 길이었기에 현실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었다.
파이론이 힘을 갈망했던 것처럼, 에단도 똑같은 갈증을 느꼈다.
검은 안광에서 흘러나온 맹렬한 적의가 에단에게로 향하자, 피부가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릿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던 에단은 씨익 웃었다.
“뭘 꼬나봐?”
콰득!
에단이 발을 내딛자 지면이 움푹 파였고, 순식간에 검은 형체 앞에 도달했다. 에단의 팔에는 죽은 마나가 넘실거렸다.
콰앙!
에단의 주먹이 키얀을 향해 휘둘러졌다. 빠르게 팔을 든 키얀이 주먹을 막아 냈다.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지르던 손을 펼쳐 역으로 키얀의 손목을 붙잡았다.
꽈아악!
에단이 힘을 주어 키얀의 손목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죽은 마나가 에단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
키얀이 괴성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했다. 힘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항하는 듯싶었다.
“시끄러워.”
에단이 붙잡은 손을 당기며 그대로 키얀의 다리를 걸었다.
후웅―!
키얀의 몸체가 흔들렸다. 지면을 짚기 위해 팔을 내디뎠지만, 키얀을 마중 나온 것은 에단의 주먹이었다.
콰직!
검은 얼굴이 뒤로 꺾였다. 에단이 키얀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놓는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빠악!
에단의 주먹이 키얀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키얀의 몸이 넘어가려 하자, 에단이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붙잡은 팔을 휘감으며 에단이 몸을 돌렸다. 키얀의 골반이 에단의 허리에 밀착됐다.
퉁―
키얀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콰앙!
큰 충격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에단이 무심한 눈으로 키얀의 얼굴을 짓밟았다.
콰직! 콰직! 콰직!
수차례 짓밟던 에단이 키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에단의 허벅지가 키얀의 갈비뼈를 짓눌렀다.
고통에 찬 신음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키얀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상처가 빠르게 아문 키얀은 검게 물든 안광으로 에단을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뭘 봐?”
에단이 팔을 들었다. 이윽고 에단의 팔꿈치가 키얀의 얼굴을 으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이 무심한 듯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쉬지 않고 파운딩을 날렸다. 에단의 소매가 찢어질 정도로 무참한 파운딩이었다.
팔꿈치가 꽂힐 때마다 키얀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에단은 죽은 마나의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키아나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 저런 미친…….
― ……이놈이 원래 손속이 좀 과해.
― 네 눈은 썩은 오크 눈이냐? 저게 손속이 조금 과한 정도라고?
카이나가 어이없어하며 페온의 말에 답했다. 이건 손속이 과한 정도가 아니었다.
에단은 카이나의 예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승부는 생각보다 쉽게 결판날 수 있었다.
성검의 힘을 적극 활용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런데 이 녀석은…….
성검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검을 버리거나 등한시한 것은 또 아니었다.
보험을 위해 에단은 검을 쥐고 있었다. 에단은 한 손만으로 적을 제압한 채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카이나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 너보다 더한 새끼가 있을 줄이야…….
― …….
페온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둘의 대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죽은 마나의 추출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이 정도로는 큰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군.’
거북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기껏 최후의 방법을 시전한 녀석이었지만,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힘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물을 것도 없으니.’
어차피 이 녀석도 끄나풀에 불과했다. 에단이 찾는 것은 그보다 뒤에 있었다.
콰직!
에단이 마지막 엘보우를 무심하게 가격하자, 키얀이 파이론과 마찬가지로 검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에단이 콧방귀를 끼며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미간을 좁혔다.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균형이 뒤틀리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죽은 나무의 힘으로 제약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죽은 마나는 본래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페온의 도움으로 부정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덜어 내고 있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서둘러 진행해야겠어.’
대부분의 문제들은 끝났다. 이제 세계수의 복원만이 남았다.
에단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네이드와 가토, 르니엘과 툰나가 말없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르니엘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용사님이 맞나요?”
울먹이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에단의 잔혹한 손속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툰나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아닌데?”
용사 아니라고 말했잖아.
* * *
― ……언니.
― ……누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목소리였다. 동생은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동생을 떠올리며 버텼다. 동생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다.
‘그런데…… 동생이 왜 언니라고 불렀다가 누나라고 부르지…… 남자였나?’
자신의 전부이자 원동력이었던 동생. 가냘프고 병약해 자신이 돌봐 줘야만 했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어깨를 짓누르는 의무감과 중압감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 등 모든 것이 희미했다.
흐릿한 잔상만이 헨리의 손을 붙잡았다.
― ……언니.
― ……누나.
― ……왜 나를 버렸어?
‘아니야.’
나는 버리지 않았어.
바빠서 그랬을 뿐이야.
언제나 너만 생각하고 걱정해 왔어.
헨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헨리의 외침은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 ……이미 늦었어.
늦었다니?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거야?
그리 묻고 싶었다. 헨리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 몽롱함 속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에단 씨…….’
그때 헨리의 머릿속에서 에단이 떠올랐다.
그가 있으면 복잡한 감정이 진정되고는 했다. 답이 없다고 생각되는 난제도 에단이 나서면 해결되었다.
‘에단 씨가 오시면.’
이 악몽 속에서도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동생의 원망 소리가 쉬지 않고 메아리쳤다.
― 왜 나를 안 구하러 왔어?
― 왜 나를 버린 거야?
― 언니.
― 누나.
헨리는 귀를 막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적당히 징징거리지?”
그리고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어려 있는 익숙한 목소리.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음성이었다.
“……에단 씨?”
“어.”
뒷말은 듣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에단이었다.
“늦었다고 했지? 미안한데 아직 안 늦었거든?”
“그게 무슨…….”
“일단 불 좀 켜자.”
이어지는 에단의 뒷말과 함께 그녀의 악몽이 끝났다.
화악!
헨리의 눈이 떠졌다.
“허억!”
헨리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할래?”
“에, 에단 씨?”
헨리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그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 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일부터 하자.”
급한 불은 꺼야 할 거 아니야.
* * *
르니엘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따라다녔다. 에단이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곱씹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에단이 용사라고 확신했다. 에단이 보여 준 모습이 용사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용사가 맞을까?’
에단의 무력은 르니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강한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용사의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
르니엘은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건 상대를 제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잔혹한 손속과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확인 사살.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소름 끼치는 검은 기운.
그리고…….
르니엘은 똑똑히 보았다.
에단의 뒤에 떠올랐던 나무 한 그루의 형상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던 앙상한 나무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뿜어내던 생명의 나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느낌을 보여 줬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느껴졌다. 귀곡성을 터트리며 생명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르니엘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니,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힘을 다루는 자가 과연 용사가 맞을까? 르니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확신할 수 없었다. 르니엘이 믿고 따르는 툰나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르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엘프가 누워 있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엘프는 그녀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자 중 하나였다.
‘리트마…….’
리트마는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르니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리트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리트마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의에 따져 묻지 않았다.
자신의 안일함이 마을과 숲을 위기에 빠트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럴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 누구보다 르니엘을 힐난했던 리트마는 외부의 세력과 내통하고 있었다.
리트마는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망설이지 않고 적의를 내비쳤다.
수백 년을 함께해 온 자신과 일평생을 마을에 헌신했던 툰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던 툰나는 복잡한 얼굴의 르니엘을 빤히 바라봤다. 리트마는 르니엘이 데려온 외지인에 의해 저지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행동했다. 주저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찍어 누른 에단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목걸이를 쥐고 있는 에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에단이 쥐고 있는 목걸이.
그가 목걸이를 처음 꺼내 들 때 툰나는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툰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에단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