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배신자 찾기 (1)
‘신기할 정도의 철면피군.’
엘프의 얼굴 가죽은 인간보다 두터운가?
그런 원초적인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은 리트마가 무슨 일을 행했고, 이후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악역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원작에서 이 녀석이 외부와 내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도 어이가 없지.’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리트마를 훑어봤다.
‘이걸 왜 모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트마는 외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으니까.
반짝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 의복.
다른 엘프들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사치품이다.
저게 자기 나름대로 자중한 것일 텐데…….
‘얘네는 눈이 없어?’
엘프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생각이 없는 거다.
다른 엘프들의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천으로 이루어진 특색 없이 평범한 옷.
당연히 장신구 따위는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생을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어디서 저런 장신구를 구해 오겠는가.
하지만 리트마는 달랐다. 비단 같은 옷을 걸친 채 수많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모르는 게 머저리였다. 리트마는 대놓고 외부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떠들고 다니는 셈이었다.
‘뭐, 일단 두고 보자고.’
여기서 터트려서야 재미를 볼 수가 없으니까.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먼저 일행분에게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리트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결국 또다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저주 같은 악담을 퍼부은 리트마가 자리를 떴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르니엘의 표정은 어두웠고, 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입니다.”
멀어져 가는 리트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툰나가 일행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일행은 툰나를 따라 이동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검소한 집이었다.
“여기 안에 제 일행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툰나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에단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있었군.’
침대에는 헨리가 누워 있었다. 일행들도 놀란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일행이 찾아왔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가토가 불안한 표정으로 툰나를 바라봤다.
“……상태가 많이 심각한 건가요?”
“면목이 없습니다만…… 저도 이분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헨리 씨를 빨리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요?”
“기다려.”
에단은 가토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헨리를 지켜보았다.
헨리의 호흡은 일정했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은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죽을 녀석도 아니고.’
헨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에단이 몸을 돌려 툰나를 바라봤다.
“제 일행이 어디서 처음 발견된 거죠?”
“그건 내가 설명할게.”
뒤에서 지켜보던 르니엘이 앞으로 나왔다. 르니엘은 헨리와 어디서 조우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자아가 발현된 건가.’
혹은 생존 본능일 수도 있었다. 세계수는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에단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헨리의 몸 위에 올려 두었다.
지이잉―
목걸이가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툰나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건…….”
“세계수의 목걸이.”
에단의 대답에 르니엘의 눈도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건…….”
“훔친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건 없어.”
에단이 르니엘을 향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툰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제 생각보다 더욱 특별한 분이셨군요.”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보다는 이 녀석이 더 특별한 녀석이죠.”
에단이 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헨리의 주위에는 은은한 장막이 펼쳐진 것 같았다.
“이분은 대체……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툰나가 해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툰나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럼 이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화를 한다는 것인지…….”
“그것도 이따 함께 보여 드리죠.”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제기랄!”
리트마가 분노를 토해 냈다.
“르니엘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이 또……!”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곧 있으면 생명의 나무는 완전히 오염될 것이다.
이제 생명의 나무는 생명을 낳고 마나를 순환하는 것이 아닌, 동물을 오염시키고 죽은 마나를 배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트마는 더욱 강해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엘프들도 숲 밖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숲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라는 존재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리트마가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거처에는 수많은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 선물들은 인간들의 성의였다. 리트마는 구태여 이런 선물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협조했을 뿐인데 그들이 먼저 건네기 시작한 것이었고, 리트마는 그러한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나무를 정화한다고?
불가능한 소리였다. 이미 씨앗은 싹을 틔웠고, 숲에는 마수들이 들끓었다. 현재 숲의 주인은 엘프가 아니었다. 엘프들도 마수를 피해 다녔고, 마수에게 목숨을 잃은 엘프들도 적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하게 둘 수는 없지.’
리트마의 얼굴은 살벌했다.
* * *
“한 번 올 때마다 고역이 아닐 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로브를 걸치고 있는 남자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어차피 저희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있어 봤자 마수 몇 마리가 전부일 텐데…….”
“내 말이 우습나?”
파이론의 서늘한 음성에 보헨이 입을 다물었다. 파이론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지금 여기 놀러 온 건가?”
“……아닙니다.”
“안일한 생각은 집어치우도록.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니 할 일만 하면 된다.”
파이론의 어조는 고저가 없었지만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준비는 끝났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보헨이 대답하자 파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론의 시선이 보헨의 옆에 있는 키얀에게로 옮겨졌다.
“그럼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키얀의 대답과 동시에 보헨과 키얀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키얀과 보헨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실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자아가 강한 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헨과 키얀이라도 파이론의 말은 거역하지 못했다.
단순한 직위 때문이 아니었다. 파이론은 괴물이었고, 괴물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위험해.’
보헨은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며 산전수전 모두 겪은 이였다.
하지만 그런 보헨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가 바로 파이론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면서도 파이론 같은 자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두고 볼 수는 없지.’
상대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한들 공략법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보헨은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얻게 되면 그게 마지막일 거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고양감이 치솟았다. 마치 황홀경 같았다.
보헨이 품에서 작은 보석 파편 같은 것을 꺼냈다. 검게 물들어 있는 보석이었다.
“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수많은 자들이 갈구하는 보석이었다. 이 보석의 힘을 흡수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보헨은 욕망을 억눌러 냈다. 보석은 계획의 일부였다.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파이론은 곧바로 보헨을 의심할 터였다.
그리고 보헨은 파이론의 의심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보헨이 발끝으로 흙을 차올리자, 바닥이 한 움큼 파지며 꽤나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안에 보석을 떨구는 보헨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하나.’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순간 욕망이 치솟았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힘에 대한 갈망을 이겨 내기가 어려웠다. 마치 약에 중독된 듯이.
‘겨우 짐승 따위가 이 힘을…… 부러운 새끼들.’
보헨이 주변의 기운을 느꼈다. 보석은 짐승을 마수로 변하게 만들며, 마수화가 된 짐승은 몬스터보다도 아득히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마수는 숲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마수가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에서 죽은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세계수가 완전히 침식되어 타락한다면 이제 보석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터.
마나는 사멸하고 죽은 마나만이 숲에 만연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움직여야겠지.’
그것은 보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평생 파이론을 앞지를 수 없었다. 파이론 또한 강해질 테니까.
‘그 전에.’
보헨이 품속에 있는 검은 파편을 움켜쥐었다. 기회가 보인다면 언제든지 힘을 흡수할 생각이다. 협력자도 구했다. 키얀도 보헨과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었다. 혼자서라면 힘들지 몰라도 둘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게 진작 융통성을 가졌으면 좋잖아?’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숲은 고된 장소였다. 편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모든 부분이 불편했으며, 씻는 일은 꿈조차 꿀 수도 없다. 심한 일교차는 단련된 이들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지원한 이유는 하나였다.
엘프의 존재 때문이다. 엘프는 미관상 매우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와 큰 눈, 그리고 비단 같은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무릇 남성이라면 욕정을 자제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파이론은 이를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임무에 방해될 뿐이라고.
그때 보헨은 파이론의 명령에 처음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고, 파이론은 보헨을 힘으로 억눌렀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지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놈은 대화가 통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그들에게 협조적인 엘프가 하나 있었다. 엘프답지 않게 속물적인 녀석이라 다루기가 매우 수월했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은 헛된 희망을 품고 있겠지?’
큭큭.
조소가 새어 나왔다. 똑같이 미개한 엘프 주제에 욕망이 가득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엘프가 바라는 욕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전에 잘 구슬리면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 거야.’
큰 욕심은 가지지 않았다. 그저 엘프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한 보헨은 머릿속으로 어떤 뇌물을 준비할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