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용사의 등장? (2)
거침없이 전진하는 에단의 뒤에서 가토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도련님의 저력은 어디까지지?’
방금까지만 해도 숲에 갇힌 채 마수들과 혈전을 펼쳤다. 하지만 에단이 도착한 이후로는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이로운 힘을 지닌 네이드도 마수를 막아서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단의 등장과 동시에 모든 게 바뀌었다.
에단은 순식간에 마수들을 정리한 채 앞장섰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침없는 발걸음이었지만, 확실히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가토의 충성심은 더욱 깊어졌다.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가토는 순간 휴고가 떠올랐다. 휴고도 이 모습을 본다면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낄까?
그런 걸 떠올리다 보니 언제쯤 떨어진 일행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련님.”
“왜 불러.”
“……헨리 씨와 휴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걸어가던 에단이 시선을 돌려 가토를 바라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계셔서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아닌데? 알아서 잘 있겠지 뭐.”
“……그, 그러면 지금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세계수.”
“세, 세계수요?”
“어.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
“그렇군요…….”
에단의 담백한 대답에 가토가 쭈그러들었다. 휴고와 헨리가 걱정됐지만, 에단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급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자, 거대한 나무 덩굴이 보였다. 에단은 직감적으로 이 너머에 세계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품속에서 세계수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자 몰골이 말이 아닌 네이드와 가토가 눈에 띄었다. 휴고에 대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녀석한테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되겠군.’
에단이 덩굴 앞에 서자 세계수의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나가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 준비는 해 뒀군.
― ……이걸 알고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나와 페온의 말에 에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꽉 막힌 앞만을 바라봤다. 이내 덩굴이 벌어지며 길이 열렸고, 저 앞에 앙상한 거목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군.’
세계수의 본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순 없었지만,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세계수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덩굴을 헤쳐 들어서자, 가토와 네이드도 뒤따랐다.
‘이게 세계수…….’
네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세계수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륙 차원에서 불가침 영역으로 지정한 엘프의 숲에 있는 나무였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성함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나무라고 했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자태에 대해서 수많은 음유 시인들이 노래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건…….’
듣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검게 물든 껍질과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나무 주위에는 식물 하나 없이 황폐했다.
아름답고 신성하기는커녕, 음산하고 불길했다.
가토의 표정도 네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수가 오염됐다고는 들었지만…….’
반신반의했다. 에단의 말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세계수라는 이름 자체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물로 보니 세계수는 지금 병들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체감되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차며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때, 엘프 여성 하나가 나타나 에단과 일행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곳은 인간들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르니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단호한 말투였지만, 정작 르니엘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또 세계수의 결계가 발동하지 않다니.
그간 겪어 보지 않은 일을 오늘 두 번이나 연달아 겪었다.
르니엘을 제외하면 엘프들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수가 인간에게 길을 터 준 상황에 혼란스러웠으나, 그렇다고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목숨을 잃기 싫으면 당장 나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르니엘의 눈은 목표를 주시하고 하고 있었다.
“흠…….”
에단이 팔짱을 낀 채 일그러진 표정의 르니엘을 바라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당장 나가라고!”
르니엘의 호통을 들은 네이드가 품으로 손을 넣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어째 말투가 조금 살벌하다?”
“그것이 도련님의 뜻이라면.”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내가 언제 쟤를 죽이라고 했어?”
둘의 대화를 들은 르니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자기도 모르게 활시위가 떨렸다.
“이, 이 자식들이……!”
르니엘이 목표를 조준했다. 시위에 걸쳐진 화살은 하나지만 인원은 셋.
에단은 그런 르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은 있고? 그거 놓으면 넌 죽는 건데.”
에단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르니엘이 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자신이 없었다. 엘프들의 힘은 대부분 정령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세계수가 병든 뒤 정령들은 엘프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정령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엘프는 빈말로라도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르니엘은 엘프들의 전사였다. 그렇기에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는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강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르니엘은 지금 저들 중 누구와 싸워도 승리할 수 없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르니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싸워야…….’
르니엘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활시위를 놓으려고 하는 그때.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거든? 얘기라도 한번 들어 보는 게 어때?”
―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 알고 있냐?
― 확실히 그 발언은 조금 그렇구나…….
카이나와 페온의 말을 무시한 에단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화살 끝만을 바라봤다.
“……그럴까?”
르니엘이 활을 내리며 한 말에 일행은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 보고 결정해. 어차피 너도 알잖아? 그거 놓았으면 죽었을 거라는 거.”
에단이 웃으며 말하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거기서 뭐 해. 얘기할 거 아니야?”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
“장난해?”
에단이 얼굴을 찌푸리자, 르니엘이 잔뜩 얼어 있는 모습으로 슬금슬금 일행에게 다가왔다. 르니엘의 귀는 축 늘어져 있었다.
가토는 말없이 그런 르니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워…….’
엘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본 엘프는 듣던 것처럼 신비롭기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이 컸다.
“와, 왔어…….”
르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지면에 성검을 푹 하고 박아 넣었다. 에단의 돌발 행동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갖춰졌네.”
“……진짜지?”
“그럼.”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르니엘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이런 성격인 줄 알고 있었지.’
르니엘은 원작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캐릭터였다. 원작 주인공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여자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백치미가 가득하다고 하더니.’
단순하고 순진한 캐릭터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일단 우린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줄게.”
“……그걸 어떻게 믿어?”
르니엘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확실히 이제는 조금 경계를 하네.’
한번 데였기 때문인가. 르니엘은 원작에서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을 믿지 않았다.
“뭐, 딱히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에단이 성검을 쥐었다.
르니엘이 화들짝 놀라며 활을 붙잡았다. 에단이 왼손을 들어 경계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그대로 세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금 무슨……!”
르니엘이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에단이 생명의 나무에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의 성검에서 빛이 퍼져 나가 세계수를 감쌌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포근한 빛이었다. 성검의 정화를 받았지만 세계수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뭐야 반응이 없는데?’
하지만 르니엘의 반응은 달랐다.
“생명의 나무가…… 치유받고 있어…….”
르니엘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설마 당신이 용사인가요?!”
“아닌데?”
에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사라니. 누구한테 그딴 걸 들이밀고 있어.
예상외의 답변에 르니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뭐, 용사는 아니지만 도움을 주러 왔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도움이라고?”
“어.”
에단이 턱 끝으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얘 낫게 하러 왔어.”
“정말이야?”
르니엘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진짜 단순하네.’
이렇게 단순한 캐릭터는 처음 만나 봤기에 신선함을 느꼈다.
‘아니다. 단순한 걸로 따지면 모룬도 만만치 않지…….’
하지만 모룬은 외모와 성격 문제가 심각했고, 르니엘은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에단이 세계수를 바라봤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군.’
그러면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에단이 성검을 응시하자, 카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지 않아. 내 힘만으로는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예상했던 부분이다. 성검 한 번 휘두르는 거로 세계수의 정화와 회복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에단이 르니엘을 바라봤다.
“장로 좀 소개해 줘.”
“……장로님을 보러 간다고?”
르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할 말이 있거든.”
* * *
르니엘은 주위를 경계하며 길을 안내했다.
‘……이상하네.’
마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마수화된 숲의 짐승들이다.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녔기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습을 보면 반드시 피해야 했다. 엘프들이 마을에 고립되어 있는 이유에는 마수의 출몰도 지대한 영향을 차지하고 있었다.
르니엘은 언제나 마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길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르니엘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웬만한 애들은 다 잡았거든.”
“……진짜?”
“어.”
“……역시 용사 맞지?”
“아니라고.”
에단이 정색했다. 용사 취급을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어딜 비교하고 있어.’
에단의 반응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르니엘이 다시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에단은 르니엘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해 볼까.’
에단은 머릿속으로 세계수의 오염을 주도한 배신자를 어떻게 족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덜미가 안 잡힐 테니까.’
미끼를 준비해야겠다.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에단의 바로 뒤를 따라가던 가토가 미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또 무슨 짓을 벌이시려고…….’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