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용사의 등장? (1)
뚝.
수정구의 통신을 끊은 에단이 다시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확실히 마스터에 오르니까 지치지를 않는군.’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 체력 안배까지 고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꽤나 난감했을 터.
‘여동생아, 말 좀 잘 부탁한다.’
대부분의 전달 사항과 해야 할 것들은 리사에게 모두 전달했다.
지금 아카데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핵심 인원들이 대거 이탈했지만, 아직 학생들은 그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붕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지.’
아카데미는 에단의 지지 세력이 될 것이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원이었다.
‘반발이 상당하겠지.’
아카데미는 표면상 자유와 평등을 표방했다. 그렇기에 각국의 지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축은 언제나 레벨린이었다. 그런데 레벨린이 사라지고 대뜸 블란테가 나서서 운영권을 쥐겠다고 선언한다면 반발이 적지 않을 터.
그래서 밑밥을 깔고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미끼를 물었다.
마크와 로만의 죄명은 무거웠고, 대외적인 책임자로서 사퇴를 선언했다.
마크가 학장직을 포기한다는 녹음본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이건 명분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흡수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명분이다.
학장의 직위를 얻는다고 해도 실질적인 실세로서 경영권을 휘두르는 이는 레벨린일 터.
일단 학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기다리면 다시금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벨린은 도박 수를 던졌다. 아니, 그녀는 도박 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터.
에단이 아무리 에밀라를 쓰러뜨렸다고 한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에 불과했다.
베오드라도의 패배를 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반전이 벌어졌고, 에단은 베오드라도에게 승리했다.
‘만일 내가 죽은 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더 조심했겠지.’
레벨린은 그런 캐릭터였다. 결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었을 때만 패를 보여 주는 자였다.
‘위험하긴 했지.’
정말 위험했다. 만일 페온이 없었다면, 룬어의 능력이 전투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에단에게 죽은 나무의 능력이 없었다면.
뭐 하나라도 부족했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쪽은 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에단은 결국 승리했고, 레벨린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디서 뭘 준비할지 모르겠군.’
에단이 알고 있던 미래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버렸다. 도망친 그녀가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먼저.’
그녀의 기반을 부수어야 한다. 에단이 정면을 바라봤다. 날은 어두웠고, 앞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질적이고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에단은 자신이 왜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다.
스르르.
품속에서 힘이 꿈틀거렸다.
죽은 나무의 기운이 눈앞의 기운에 동조하고 있었다.
“상황이 더럽게 됐네.”
가장 상극이어야 할 두 녀석이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의미했다.
숲에는 은은한 마나가 둘려 있었다. 자세히 지켜봐도 눈치채기 힘든, 숲에 녹아든 마나였다.
에단이 죽은 마나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리치 베오드라도의 힘을 흡수한 뒤로 죽은 마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키에에에에!
죽은 나무가 귀곡성을 흘리자, 에단의 몸에 죽은 마나가 둘렸다.
이윽고 침임을 막아서던 숲의 환영이 사라졌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대충 어디로 갔는지는 알겠군.”
* * *
“허억, 허억!”
가토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짐승들이 계속 몰려왔다.
‘……정말 이걸 짐승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가토는 최근 실력에 자신이 붙었다. 하여 웬만한 몬스터는 일격에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나는 이질적인 짐승들은 몬스터보다 상대하기 힘들었다.
‘나는 비교적 약한 놈들을 맡고 있지만…….’
가토가 네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이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나무를 밟으며 종횡무진하며 짐승들을 상대했다.
괴물 같은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몸놀림이 상당히 느려졌다.
‘……네이드 님도 지쳤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마음에 불과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가토가 이를 악물며 검을 움켜쥐었다.
‘……뭐가 기사란 말이야.’
기사 서임을 받고 블란테의 인장을 가슴팍에 새겼다. 에단의 직속 기사로서 명예와 충의를 맹세했다.
기사는 강해야 했고, 블란테의 기사는 더욱 강해야 했다. 약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
하지만 가토는 약했다. 음울한 기운이 마음을 파고들자, 가토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다.
숲에는 마성이 있었다. 평소 가토의 마음가짐이라면 마성이 깃들 틈이 없었겠지만, 자괴감이라는 늪에 빠진 지금은 마성이 침투할 수 있었다.
가토의 눈이 흐릿해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스르륵, 검이 떨어지려는 그 순간.
“야, 뭐 하냐?”
주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하던 가토의 눈이 제 색을 되찾았다.
가토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이의 목소리.
“……에단 님?”
가토가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는 온통 검은 짐승만이 보이는 탓에 가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느새?’
되지도 않는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미 검은 짐승들은 가토를 표적으로 삼았다. 완전히 포위당하여 피하기에는 늦은 듯싶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도련님의 목소리는 환청이었나?’
“왜 그러고 있냐니까?”
다시 한번 들려오는 에단의 목소리에 가토는 환청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차렸다.
화르륵!
포악하고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 마수들이 고개를 돌려 표적을 바꾸었다.
“눈 안 깔아?”
에단이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마수들의 심령이 흔들렸다. 죽음을 불사르며 달려들던 마수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오른손에 쥐어진 성검을 바라봤다.
“성능 한번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 ……말 안 해도 할 거 아니야?
카이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도 이제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잘 알고 계시네요.”
후웅!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성스러운 정화의 기운이 마수들을 덮쳤다.
화악!
마수들의 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그리고 일제히 각목처럼 쓰러졌다.
쓰러진 마수들의 붉은 안광이 사라지고, 크기가 줄어들었으며, 검던 피부색이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에단이 성검을 바라봤다.
“성능 확실하네.”
한편 가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먼저 가 있으면 따라온다고 말하긴 했지만 벌써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련님?”
가토의 부름에 에단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죄송합니다.”
가토가 고개를 숙였다. 에단은 지나가면서 가토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에단은 멀리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네이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네이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에단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에단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는 않나 봐?”
에단이 다시 한번 성검을 들고는 기운을 둘러 휘둘렀다.
그와 함께 방금과 같은 정화의 힘이 마수를 덮쳤고, 이내 마수의 몸이 경직되며 쓰러졌다.
주변을 둘러본 네이드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는 않군요.”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고 엄살 부리면 안 돼.”
“그럴 정도로 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에단이 네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뒤에 서 있던 가토도 에단에게 붙었다.
네이드는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평소와 같은 에단이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에단의 손에는 본 적 없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네이드가 느끼는 차이점은 에단의 내면이었다. 사납고 거대한 힘이 에단의 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에단을 본 지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에단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이다.
한데 단 며칠 만에 에단은 수십 개의 벽을 넘어섰다. 지금의 에단은 네이드가 알고 있던 에단이 아니었다.
‘나와 동등한가……?’
아니, 느껴지는 기운만 놓고 본다면 그 이상이었다. 네이드가 충격받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설명하기에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뭐, 다사다난했지.”
“…….”
네이드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헨리랑 휴고는 어디 있어?”
“헨리와 휴고 씨는…….”
네이드가 말끝을 흐리자, 뒤에 서 있던 가토가 다가왔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가토가 일련의 상황을 에단에게 전달했다.
‘흠, 예상과는 다른데…… 뭐 상관없으려나?’
에단에게는 길이 보이기 때문에 평범한 숲길에 불과했다.
“길 잃지 말고 잘 따라와.”
죽은 나무가 에단의 이정표가 되었다.
* * *
르니엘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생명의 나무에 다가갔다. 언제나 생명력이 충만하던 아름다운 거목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병들고 마른 생명의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을 낳지 않았고, 신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어 가는 나무의 불과할 뿐.
“……죄송합니다.”
르니엘이 서글픈 표정으로 나무에 손을 얹었다. 생명의 나무는 비록 죽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것이 본능인지 자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삶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엘프와 공존하며 엘프들에게 무한한 생명력을 나눠 주던 생명의 나무가 아닌, 르니엘을 제외하고서는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상처받은 나무가 되었다.
“……왜 저는 허락해 주신 거죠?”
왜 나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생명의 나무가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그 책임은 르니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생명의 나무는 르니엘은 막아서지 않았다. 다른 엘프들과 인간들의 침입은 철저히 막으면서도 르니엘은 들어올 수 있게끔 했다.
“……한 명 더 있지.”
르니엘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생명의 나무에 발을 들인 인간이었다.
르니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엘프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생명의 나무가 인간을 허용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르니엘이 앙상한 나무를 쓰다듬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과거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 왔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르니엘이 활을 잡았다.
‘……침입자?’
또다시 침입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