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헨리 (3)
정처 없이 숲을 지나고 있는 헨리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풀과 덩굴과 나무가 길을 열어 줬다.
‘……나는 누구지?’
알 수 없었다.
헨리가 과거를 떠올리려 해 봤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기억만이 일렁였다.
― 언니…… 도와줘…….
― 나, 무서워…….
― 살려 줘…….
동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동생……?’
동생은 헨리의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정작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목소리가 메아리침에도 명확하지 않았다. 모든 게 혼잡했다.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등.
무엇 하나 명확한 게 없었다.
헨리는 정처 없이 앞으로 향했고, 이내 앞에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웅장하거나, 성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뼈대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나무인 탓에 오히려 섬뜩했다.
세상의 모든 사기와 절망을 흡수한 듯한 모습.
헨리는 이 나무가 죽어 가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타깝구나.”
헨리가 죽어 가는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멈추세요.”
앙상한 나무를 향해 홀리듯 다가가던 헨리가 자리에 멈춰 시선을 돌렸다.
헨리의 흐릿한 눈이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들에게로 돌아갔다.
“당신은 대체…….”
활시위를 당긴 르니엘이 헨리를 향해 경계심을 내비쳤다. 르니엘의 손에 피가 맺혔다. 본래라면 이 정도 장력에는 상처도 입지 않을 손이었지만, 과도한 긴장감으로 인해 힘을 너무 준 탓이었다.
르니엘은 손을 벌벌 떨었다. 헨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 거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쌍한 아이구나.”
헨리가 안쓰럽다는 듯 말하자, 르니엘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네가 대체 뭘 안다고…….”
꽈아악!
활시위 장력이 더욱 팽팽해지며 언제라도 화살이 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르니엘의 화살은 쏘아지지 않았다.
털썩.
그대로 쓰러진 헨리를 바라본 르니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준하던 활을 회수했지만, 경계심을 늦춘 건 아니었다. 르니엘이 천천히 헨리에게 다가갔다.
“……뭐야?”
거친 헨리의 숨소리가 르니엘의 귀에 파고들었다.
르니엘은 붉게 물든 얼굴의 헨리를 외면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심코 뻗은 그녀의 손이 헨리의 이마에 닿았다.
“무슨 열이…….”
헨리의 이마는 들끓고 있었다.
“옮겨야겠어.”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정령이 있었으면…….’
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이런 건 일도 아니었다. 엘프와 정령은 한 몸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르니엘은 정령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엘프의 보금자리였다.
원래라면 활기와 생기가 넘쳐흘러야 할 엘프들의 마을은 황량했다.
당장 보이는 엘프들의 숫자도 적었고, 그마저도 모두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쓱 둘러본 르니엘은 마음이 아팠다. 정령들과 뛰놀던 과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은 메말라 있었다.
“헉헉…….”
르니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목으로 이루어진 집 앞에 섰다.
“……툰나 님.”
르니엘이 앞에서 이름을 불렀다. 잠시 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노쇠한 엘프가 르니엘을 지그시 바라봤다.
“르니엘이구나.”
“네.”
르니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툰나는 장로였다. 장로인 만큼 나이가 많긴 했지만, 원래 이 정도로 노쇠하지는 않았다.
툰나가 급격히 기력이 쇠하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툰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자는 설마 인간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나무로 다가가길래 막아섰더니 갑자기…….”
“인간이 생명의 나무로?”
이해할 수 없었다. 생명의 나무는 외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염이 시작된 이후로는 평생을 공생해 오던 엘프들에게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접근이 가능한 자는 마을의 유일한 하이엘프인 르니엘뿐이었다. 장로인 툰나조차 생명의 나무로 다가가면 길을 잃었다.
“일단 이곳에 눕히거라.”
“알겠습니다.”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나무 덩굴과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헨리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상태가 좋지는 않구나.”
“……그렇습니까?”
르니엘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맴돌았다.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르니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르니엘은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는 침입자였다. 그것도 인간 침입자.
증오해야 마땅한 존재였지만 헨리를 보면 르니엘의 가슴이 아파 왔다. 그리고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헨리의 몸 상태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툰나는 말없이 헨리를 바라봤다.
“……가호가 있기를.”
지혜로운 툰나의 말에는 영성이 깃든다. 툰나의 말은 곧 씨앗이 되고 싹이 트게 만든다. 그게 장로가 가진 언령의 힘이었다.
툰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언령의 힘을 잃은 상태였다.
“미안하구나. 일단 여기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니 일단 너는 조금 쉬도록 하거라.”
툰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르니엘은 가슴이 아려 왔다. 르니엘이 애써 울컥한 감정을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네, 장로님.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문밖으로 나선 르니엘의 눈에 삭막한 풍경이 담겼다.
“르니엘, 또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거냐?”
“……리트마.”
르니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온 엘프는 초췌한 얼굴을 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활력이 돌았다.
르니엘은 그런 리트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각자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엘프들에게 있어 당연한 규칙이니까.
“……별일 아니니까 신경 꺼.”
르니엘에 대답에 리트마가 코웃음을 쳤다.
“별일이 아니기는 왜 아니야? 너는 책임감도 느끼지 못해? 너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 꼴이 되고, 생명의 나무도 오염됐는데?”
“…….”
르니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몸을 떨면서 리트마를 노려봤다.
“뭘 잘했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트마가 천천히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르니엘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
“쯧, 빨리 마을에서 꺼지기나 해.”
혀를 찬 리트마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르니엘은 굴욕감과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돌아가자.’
외부에 대한 경계.
그것이 르니엘이 아직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르니엘이 활을 움켜쥐었다.
* * *
에단이 밤길을 질주하면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통신을 할 시간도 아까웠다. 에단이 마나를 집중시키자 수정구가 연결되었다.
― 그간 평안하셨나요, 에단 씨.
수정구에서 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골려 주고 싶은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세계수의 상태를 모두 나열해.”
― 대뜸 무슨…….
“시간 없어.”
― ……저희도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뒤부터 계속해서 접촉을 시도 중입니다만, 경계가 너무 심해서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그들과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군요. 하지만 타 지역 엘프들과 정령들의 상태를 보면…… 상황이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계가 많이 심한 편인가?”
― 네. 애초에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대충 예상이 되는군. 그 외의 특이 사항은 없나?”
―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상당한 수의 길드원을 세계수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 투입하며 알아차린 건데…… 수상한 세력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상한 세력?”
― 엘프들의 경계는 극심한 게 분명합니다. 외부와의 단절을 택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곳을 드나드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
― 아직은 의심에 불과합니다. 숲에 조금만 들어서려 해도 환각에 빠져서 탐색이 쉽지가 않습니다.
“아는 건 그게 전부겠지?”
― 네. 제가 아는 바로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에단 님은 정말 세계수를 치료할 방법을…….
뚝.
에단이 메이와 연결된 회신을 끊었다. 특별히 도움이 되는 얘기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던 그때, 카이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 엘프들이 외부와 단절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 한시가 촉박하군…….
여유가 없다는 사실은 에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나드는 애들은 대충 그놈들이겠네.’
얼추 예상이 가는 녀석들이다. 욕심을 채우기 바쁜 끄나풀들.
에단이 수정구를 바라봤다. 다음으로 연결할 대상은 아버지였다.
에단이 마력을 주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의 얼굴이 수정구에 비쳤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빈센트가 의심의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 섭섭합니다.”
― 잔말 말고 본론을 꺼내거라.
“이전에 말한 대로 계획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버지의 도움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내 도움 말이더냐?
빈센트의 목소리에는 실망스럽다는 듯한 느낌이 포함돼 있었다. 가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을 바라다니.
“리사가 죽을 뻔했습니다.”
― 뭣이?! 그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들이 도대체 누구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노호성이 튀어나왔다.
‘이런 딸바보 같으니라고.’
에단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놈들입니다.”
― 빠득, 당장 기사단의 출전을 준비하겠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녀석은 이미 리사에게 죽었으니까요.”
― ……죽었다고?
“네. 그리고 남은 주동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지금 아카데미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아카데미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인력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 …….
“적당한 애들 좀 추려서 보내 주시죠. 물론 아버지도 오셔야 합니다. 오신 김에 리사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죠.”
―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나?
“겸사겸사라고 할 수 있죠.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카데미는 이제 블란테의 것입니다.”
―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텐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색이 블란테 아니겠습니까?”
― 아무리 우리가 주변을 겁내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아는 사실 아니더냐?
“그거야 당연히 알죠.”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블란테라고 할지라도 막무가내로 들이박을 수는 없었다.
명분과 절차.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했다.
‘그것들은 이미 얻었고.’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준비물은 리사에게 전해 줬으니까 아버지께서는 기사단만 이끌고 오시면 됩니다.”
― ……그러면 영지의 수호는 누가 하란 말이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블란테를 습격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 있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