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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113화 (113/398)

◈ [113화] 헨리 (2)

리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리사가 얼굴을 찌푸린 채 에단을 향해 말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화가 서린 목소리였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본 리사가 말을 이었다.

“나도 블란테야. 내 것으로 정해 둔 거는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아.”

블란테는 욕심이 많았다. 리사의 대답을 들은 에단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래야 내 여동생이지. 그런데…… 언제부터 반장이 네 소유물이 됐냐?”

“그, 그건……!”

리사가 얼굴을 붉혔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간다.”

담백한 인사였다. 리사가 묘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야? 그 마지막 같은 인사는.”

“이상한 소리 한다 또. 나중에 보자.”

에단이 고개를 돌려 리사를 바라봤다. 에단의 입꼬리가 휘었다.

“고생 좀 하고.”

“……짜증 나.”

에단이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뭐야.”

오늘따라 에단이 멀게 느껴졌다. 잠시 에단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리사는 이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 * *

에단이 아카데미를 떠나기 위해 달려 나갈 때, 정원에서 크러쉬의 얼굴이 보였다. 그간 에단을 피해 다녔기에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에단이 발을 멈췄다. 크러쉬의 표정이 미묘했는데,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잘됐군.’

에단도 크러쉬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에단 교수님.”

“이제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시는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에밀라 씨는…….”

크러쉬의 말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크러쉬 교수님. 아니, 야.”

에단이 사나운 눈초리로 크러쉬를 노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크러쉬는 몸을 떨었다. 마치 사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원래 원한을 잘 잊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그게 무슨…….”

“내가 너희들이 벌인 일이 뭔지 모를 거 같아?”

순간 크러쉬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은 크러쉬가 어떤 성향을 가진 자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감과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꼬리를 내리는 게 바로 크러쉬와 같은 부류였다.

“평민을 싫어한다고 했지? 미천한 새끼들이니까.”

“그건 오해가…….”

“이제 와서 포장하려 하지 마. 엿 같으니까.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평민이 아닌데 말이야.”

“……평민이 아니라구요?”

“어, 아니야. 내 가문은 블란테거든.”

“……!”

순간 크러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크러쉬가 충격받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그게 대체…….”

“마음 같아서는 너네 가문까지 싸잡아서 족치고 싶은데 지금 그럴 형편이 안 돼.”

아카데미의 인력은 크게 부족했다. 사건을 수습할 인원은커녕 수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교수의 숫자도 부족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잘해. 너도 귀족이잖아.”

“…….”

크러쉬가 고개를 숙였다. 에단의 말이 내포한 뜻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나 간다.”

에단이 다시 지면을 박찼다. 에단이 달리면서 뒤를 힐긋 바라봤다. 크러쉬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 ……바뀔 거라고 보는 거냐?

“모르죠.”

에단은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뀌든 바뀌지 않든 알 바인가?

“바뀌지 않으면 제 손에 뒤질 겁니다.”

그대로면 뒤질 건데.

* * *

“헤, 헨리 씨…….”

헨리가 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하자, 휴고는 그런 그녀를 뒤쫓았다.

가토는 잠시 망설이며 흐릿한 말의 눈을 바라보고는 네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이드 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우리도 따라가 봅시다.”

네이드가 마차에서 간단한 짐을 집어 드는 걸 본 가토가 따라서 적당한 물건들을 챙겼다.

“가시죠.”

가토가 휴고가 향한 방향으로 따라나섰다. 앞서간 두 사람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역시 이상하군.’

네이드는 전설적인 어쌔신이었다. 어쌔신은 어둠에 녹아들며, 그 누구보다 흔적을 잘 지우는 자들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그만큼 흔적을 잘 찾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 자리에 머무르거나 움직이게 되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다면 당연히 흔적이 사라지겠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따라붙었다. 그 짧은 텀을 가지고 시간이 흘렀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

네이드가 발을 내딛자 풀이 밟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곧바로 뒤를 돌아 바닥을 바라봤지만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네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토 씨.”

“네?”

가토가 고개를 돌렸다. 네이드가 품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냈다.

“아무래도 갇힌 것 같군요.”

“갇히다니요?”

“이 숲 평범하지 않습니다. 일단 휴고와 헨리 씨를 찾는 일은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가토는 네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숲의 한복판이라 사방이 트여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갇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벌써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네이드가 가토의 어깨너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어 가토가 몸을 돌렸다.

“저게 무슨…….”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동물이 있었다. 외향은 영락없는 사슴이었지만, 전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만.

“무슨 크기가…….”

이전에 마주했던 블랙 오우거와 비슷한 크기의 사슴이었다. 게다가 붉은 안광까지 있어 음산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괴물 같은 사슴이 지금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가토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네이드가 가토의 어깨의 손을 얹었다.

“기다리고 있으세요.”

네이드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이내 사슴의 앞에 나타났다.

아아아아아아!

사슴이 기이한 소리로 포효했다. 네이드가 표정의 변화 없이 단검을 휘두르자, 단검에 서린 마나의 빛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쾅!

순간 사슴의 주위로 장막이 쳐지며 네이드의 일격을 막아 냈다. 네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검은 장막.’

방금 헨리의 주위에 펼쳐진 장막과 흡사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그것보다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

도약한 네이드가 역수로 쥔 단검과 팔에 마나를 집어넣어 휘둘렀다.

슥, 슥, 슥.

마치 붓 칠을 하는 것 같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움직이었다. 파문은 나중에 일어났다.

콰앙!

장막이 갈라졌다. 네이드가 순식간에 장막 안으로 침투해 사슴의 목을 베어 냈다.

툭.

거대한 검은 사슴의 머리가 떨어졌다.

가토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보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네이드의 저력이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네이드가 고개를 돌려 가토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거 좀 쉽지 않겠군요.”

이곳에 있는 검은 짐승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 * *

타다닷!

주위 배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헨리는 분명 천천히 걷는 듯 보였지만, 휴고가 야생 동물처럼 질주하고 있음에도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

이유가 뭐지?

휴고는 달리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은 에단에게 밀렸으나 오직 달리기 하나에서만큼은 에단을 미세하게 뛰어넘었다.

그런 그가 전력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헨리는 걸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휴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쳐서 그런 게 아닌, 불길함과 섬뜩함이 느껴진 탓이었다.

휴고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크르릉―

휴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내가 뭘 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 내봤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휴고가 이를 악물고 달리며 소리쳤다.

“헨리 씨!”

“…….”

하지만 헨리는 휴고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헨리는 서서히 멀어졌고,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쿵.

헨리가 사라지자마자 어둠이 드리웠다. 그리고 스산하고 사특한 기운이 숲을 잠식해 나갔다.

두근두근.

휴고의 심장 박동 수가 더욱 빨라졌다. 휴고의 눈이 노랗게 물들었다. 주둥이가 길어지면서 전신에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휴고의 야성이 폭발했다. 완전히 야수로 변모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쿠르륵.

먹잇감을 찾은 휴고의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고, 거대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크기는 상관없었다. 휴고는 지금 이 굶주림을 해소하고 싶었다.

쿠어어!

검은 멧돼지가 휴고를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질량을 무기로 삼은 멧돼지의 기세는 살벌했다.

파밧!

하지만 휴고는 그런 멧돼지를 비웃듯 공중으로 도약했다. 휴고의 몸이 순식간의 멧돼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려 했다.

쾅!

휴고의 팔이 검은 장막에 가로막혔다.

크릉?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허기를 채울 먹잇감이 있는데 방해물이 있었다.

판단은 빨랐다. 방해물이야 치우면 그만이었다.

쾅! 쾅! 쾅!

휴고가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멧돼지가 휴고를 바라봤다.

크르르!

휴고의 사나운 야성이 멧돼지에게로 향했다. 체급의 차이는 명백했지만 멧돼지는 오히려 기가 죽었다.

검게 물든 멧돼지의 눈이 휴고를 바라보지 못했다. 짧은 꼬리가 말리며 멧돼지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고의 팔은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쾅!

휴고가 연신 검은 장막을 두드렸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검은 장막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장막이 완전히 깨졌다.

콰지직!

휴고의 손이 장막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발톱에는 은은한 마나가 서려 있었다. 휴고가 반대 손을 들이밀며 구멍 난 장막을 억지로 넓혔다.

크르르.

휴고의 누런 눈동자가 멧돼지를 포착했다.

콰지직!

휴고가 장막을 완전히 찢어발긴 채 멧돼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멧돼지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휴고에게는 보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멧돼지의 등 위에 올라탄 휴고가 그대로 살점을 물어뜯었다.

와그작!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가자 멧돼지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꾸에에에에에엑!

크르르르.

멧돼지의 비명 소리에 휴고가 즐겁다는 듯 낮게 울었다. 휴고의 날카로운 발톱이 멧돼지의 살점을 헤집었다. 휴고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찾아냈다.

쿵!

멧돼지의 거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휴고가 전리품인 고기를 탐하려 했다. 하지만 휴고는 고개를 들었다.

먹잇감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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