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헨리 (1)
“흐아아아암∼”
휴고가 입을 벌리며 하품을 내뱉었다. 일행은 어느새 목적지 인근에 도착했다.
“입 찢어지겠다.”
“지루한데 어떡해. 너도 이렇게 종일 하늘 보면서 걷기만 해 보든가.”
“경계를 해, 경계를. 기사라는 녀석이 경박하기는…….”
가토의 타박에 휴고가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자기도 마부석에서 마부 역할이나 하면서…….”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어.”
“너 때문에 나 혼자 말을…… 됐다.”
“쳇, 성질만 나빠 가지고…….”
“이 자식이!”
둘은 오늘도 여전히 사소한 것으로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마차 뒤편에 앉아 있는 네이드는 그들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헨리도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저만 계속 편하게 가는 것 같네요.”
전부터 실감해 왔다. 그녀는 일행에 합류했음에도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낮았던 자존감이 최근 들어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네이드는 그런 헨리를 힐긋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헨리 씨 덕에 길도 수월하게 찾지 않았습니까.”
“……이쪽에서 좀 오래 살았어서요.”
“흠, 그렇습니까? 그것참 신기하네요.”
꽤나 전부터 길이 끊어졌다. 이는 곧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는 소리와 같았다.
당연히 길을 찾는 것에 문제가 있었고, 약도를 받아 왔음에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헨리가 나서서 방향을 짚어 줬다.
‘이 근처에 살았다고?’
네이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이 근처에는 인가는커녕 마을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숲이었으니까.
“……뭔가 조용하네.”
휴고가 중얼거렸다. 날씨는 화창했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조용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동물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바람이 부는 소리조차 없었다.
휴고는 감각이 예민했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 휴고가 느끼기에 뭔가가 이상했다.
계속해서 걷고 있으니 풍경이 바뀌어야 할 텐데, 아까부터 똑같은 자리만 지나가는 것 같았다.
휴고가 울창한 숲을 둘러봤다.
숲에는 벌레가 들끓고, 그걸 잡아먹는 짐승이 많았다. 그렇기에 숲은 늘 시끄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휴고가 감각을 집중했다.
‘이상해.’
안개 속에 들어온 듯 주변에서 느껴지는 게 없었고, 모든 감각이 흐릿한 것만 같았다.
휴고가 뭔가를 감지하고 멈췄다.
“잠시만.”
“왜 그래?”
가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휴고에게 물었다. 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숲에 들어온 지 몇 시간이 지났지?”
“무슨 소리야? 분명…… 어라? 얼마나 지났더라…….”
가토도 숲에 들어온 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네이드가 마차 밖으로 내려왔다.
“……이상하군요.”
“맞아요. 숲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네이드와 휴고의 말에 가토도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휴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다.’
해이해진 마음으로 걷고 있다 보니 이런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휴고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멍청하기는…….”
휴고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한편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가토는 심상치 않은 휴고의 반응에 주변을 둘러봤다.
“……뭐지 이거?”
그러고 보니 들어온 이후부터 뭔가가 달라졌다. 숲에 들어온 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음에도 풍경은 변화가 없었다.
푸르릉.
투레질을 하는 말들을 바라본 가토가 이내 마부석에서 내렸다.
“무, 무슨 일 있는 건가요?”
헨리가 머리를 내밀며 묻자, 가토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네이드가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이 근처에서 사셨다고 했나요? 정확히 어디에서 사셨던 거죠?”
“아…… 그거요……? 어라, 어디였지?”
헨리가 눈동자를 굴리며 답변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등골이 싸해졌다.
헨리가 마차 밖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온통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익숙한 정취가 느껴지는 거로도 알 수 있는 데다, 실제로 주변이 낯익기도 했다.
‘……여기가 왜 낯익지?’
그녀에게는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던 것 같았다. 한데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려 하자 기억이 흐릿해졌다.
‘되게 슬픈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동생의 얼굴도, 동생과의 추억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치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가야 합니다.”
헨리가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휴고가 당황하며 헨리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지잉!
튕겨 나간 것은 휴고의 손이었다. 휴고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멍하니 헨리를 바라보았다.
한편 네이드는 헨리가 순간적으로 뿜어낸 기운을 느끼고 눈이 커졌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이 장막은…… 도련님이 아카데미의 교수와 싸울 때 사용했던 힘과 흡사하다.’
발현되는 방식이나 기운이 매우 유사했다.
네이드는 그녀가 왜 에단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 * *
“……내 패배다.”
카이나가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자, 에단과 페온이 서로를 마주 봤다.
“꽤 하더구나.”
“별말씀을요.”
카이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다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째 저 가문 놈들은 시간이 지나도 더럽게 재수가 없었다.
볼을 푸들거리는 카이나를 에단이 바라봤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다. 그건 그렇고 네 말은 사실이겠지?”
“세계수 말씀입니까?”
“그래.”
“사실입니다. 상황이 꽤나 좋지 않습니다.”
“제기랄, 어쩌다가…….”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는 시간도 아까운 거 아십니까?”
카이나가 쌍심지를 켜며 에단을 노려봤다.
“그래, 너 잘났다. 그럼 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이제는 완전히 인정을 받은 거겠죠?”
에단이 확인 차 묻자, 카이나가 노려보며 중지를 치켜세웠다.
“맞으니까 당장 꺼져!”
카이나의 고함 소리와 함께 시야가 다시금 반전되며 미약한 어지러움과 구역감이 치밀었다.
몸이 다시 바뀐 걸 확인한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는 이 몸에 더 익숙하군.’
정면을 바라봤다. 여전히 지면에 꽂혀 있는 성검을 향해 다가가 에단이 곧장 검을 쥐었다. 이번에는 왼손이 아닌 오른손이었다.
덥썩.
성검을 붙잡자 강렬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고, 새로운 힘을 느낀 에단은 씨익 웃었다.
‘꽤 오래 걸렸네.’
이제 다시 급하게 움직여야 할 때.
에단은 아카데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아카데미로 돌아간 에단이 고메드를 힐긋 바라봤다.
“무, 문 열 거다…….”
나갈 때와 다르게 출입할 때는 언제나 고메드가 지키는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에단은 고메드를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비켜. 바빠.”
쾅!
에단이 발로 문을 걷어차자, 거대한 무쇠 문이 활짝 열렸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고메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무, 문이…….”
“먼저 간다. 잘 닫아 놔.”
갑작스러운 굉음에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에단은 시선을 주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조금 소란이야 있겠지만.’
에단은 일그러질 리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웬만하면 리사를 생각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리사! 당장 튀어나와!”
에단이 크게 소리치자, 기숙사 건물의 창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에, 에단 교수님 아니야?”
“갑자기 리사를 왜 찾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이번에는 마나를 실어 소리쳤다.
“귀, 귀가!”
그때 창문 하나가 벌컥 열리며 리사가 얼굴을 내비쳤다.
“저, 저 미친놈이……!”
리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곧장 계단을 타고 뛰어내려 왔다.
리사는 분노가 가득 들어찬 얼굴로 성큼성큼 에단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
“시간 없다. 가서 얘기하자.”
에단이 손목을 낚아채고 이동하자, 리사는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에단에게 끌려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학생들이 침묵했다.
“……내가 뭘 본 거지?”
“……에단 교수님이 리사를 데리고 간 거 맞지?”
“뭐야, 뭐야?”
“아니, 에단 교수님은 에밀라 교수님이랑 사귀는 것 아니었어?”
“학생이랑 교수랑 만나도 되는 거야?”
아카데미에서는 오늘도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고 있었다.
* *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레벨린의 집무실이었다. 갑자기 처음 와 보는 장소에 끌려온 리사가 에단의 손목을 뿌리쳤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너? 말이 짧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에단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자, 리사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화부터 내려고 했지만, 에단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잘 들어. 시간이 없으니까 핵심만 말해 줄 거야.”
“……뭔데.”
아직 큰일을 겪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아카데미에서는 제대로 된 조치나 진상 조사도 하고 있지 않은 탓에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의 실권자가 벌인 일이었고, 현재 그들은 모두 자리를 떴으니 일이 돌아갈 리가 없었다.
“레벨린이라는 사람 알고 있어?”
“레벨린? 분명 들어 본 이름이었는데…….”
리사의 눈이 흐려지는 걸 본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암시에 당했군.’
쾅!
에단이 마나를 실어 발을 구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리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레벨린은 아카데미의 직원이니까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래?”
“어. 그럼 그건 됐고, 지금부터 상황 설명을 시작할 거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먼저, 학장이 도망쳤다.”
“……뭐라고?”
리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학장이 도망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학장을 필두로 아카데미의 관리 인원 대다수가 사라졌을 거야. 전부 레벨린의 수하였으니까.”
“레벨린의 수하라고?”
“어.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너희들을 케어 못 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이제부터가 중요해.”
“……말해 봐.”
“이제 아카데미의 관리는 우리 블란테가 할 거야.”
“뭐라고?!”
연신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리사의 몸이 휘청이자, 에단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내가 있으면 별 상관없지만,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 해.”
“떠, 떠난다고? 지금 이 상황에? 에밀라 교수님은 어쩌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에밀라의 이름에 에단이 되물었다.
“에밀라가 여기서 왜 나오지? 일단 걱정하지 마. 나도 돌아오긴 할 테니까.”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일을 크게 벌여 놨다.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을 전달해 둘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일을 처리하고 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더 시간을 끌다가 상황을 돌이킬 수 없어지면 낭패였다. 에단은 한시라도 빠르게 네이드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잘 말해. 아마 이번에는 직접 행차하실 수도 있으니까.”
“……아, 아버지가 온다고?”
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었다.
“어. 그래도 네 말에는 껌뻑 넘어가시니까 대충 알아서 잘하고.”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이 있어!”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에단의 눈이 리사를 응시했다. 농담기 없는 진지한 눈빛이다.
“그 누가 와도 드레이는 지켜. 네 목숨을 구해 준 녀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