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성검 (2)
― ……알겠다.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성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광풍이 휘몰아쳤다.
에단의 검은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고, 성검 주위로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그 중심에는 에단과 성검이 있었다.
후우우우웅―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다. 장소가 반전되었다.
“오.”
에탄이 탄성과 함께 휘파람을 내뱉었다. 장소가 바뀌었다. 이곳이 바로 성검의 시험대였다.
황무지 같은 풍경.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식상했다.
‘비슷한 연출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래도 아무 배경 없는 무채색의 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에단이 몸을 풀었다.
우두둑거리며 관절과 근육이 풀리는 게 느껴졌는데, 그 와중에 에단은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에단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굳은살이 가득하지만, 길고 하앴다.
손을 보자마자 눈치챘다.
‘내 손이 아니군.’
내 손이 아니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흉터가 가득한 단련된 몸이 보였다.
완성된 격투가의 신체. 그에게는 익숙한 몸이었다.
“오랜만이군.”
에단이 씨익 웃으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기분이 오묘했다.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에단의 육체가 가진 폭발력을 느끼다가 간만에 류태신의 몸에 들어오니 무언가 답답했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류태신이 단련했고, 류태신이 벼린 칼날이었다. 이 몸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이상하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자,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를 한 여성이 검을 쥔 채 서 있었다. 설명 없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카이나.”
그녀는 지금 성검을 쥐고 있었다. 카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까 대답을 안 한 거 같은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마음 같아서는 긴 설명을 해 드리고 싶지만.”
“그래, 알아. 시간이 없다고?”
“정확합니다.”
에단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카이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군.”
“천성이 이래서 말이죠.”
“재수 없는 놈이군.”
카이나의 눈살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데, 페온.”
그 순간, 인기척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짧은 머리를 한 거친 인상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류태신과 에단에게도 밀리지 않는 몸이었다.
상처와 흉터는 류태신으로 바뀐 에단의 몸보다 월등히 많았다.
숱하게 사선을 넘어왔다는 것을 육체의 상흔이 증명했다.
눈빛은 정제되고 강인했다.
짧게 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마치 숨을 죽이고 있는 맹수 같았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에단이 씩 웃었다.
“페온 님.”
“……에단.”
청년의 정체는 페온이었다. 에단의 예상대로 페온은 자신에게 숨기던 것이 있었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었군.’
카이나와 블란테의 선조인 페온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성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에단이 읽은 원작 부분까지는 성검에 대한 모든 내용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여 섣부르게 어림짐작하지 않았다.
에단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페온은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습이 다르구나.”
“저는 뭐, 마음에 듭니다.”
비록 에단의 몸보다는 약했지만, 익숙한 몸이었다.
페온이 복잡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페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됐군.”
“별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나가 말없이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블란테냐?”
“흠, 뭐 그렇죠?”
“어쩐지 더럽게 재수 없더라니…….”
에단이 고개를 돌려 페온을 바라봤다. 페온이 볼을 긁적였다.
“집안 내력입니다.”
“……재수 없어.”
“재수 없는 건 잘 알겠고, 바로 시작하죠?”
여기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에단이 원하는 것은 시험 통과였다.
“성격 급한 것도 똑같군. 그건 마음에 들어.”
카이나가 씨익 웃었다. 사나운 미소였다.
그녀가 내뿜는 카리스마는 페온에 뒤지지 않았다.
카이나가 성검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이 검은 가장 특별하고 가장 강한 검이다.”
에단이 페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입니까?”
“……모른다.”
“명색이 검술 명가인데 저런 투박한 검보다 괜찮은 게 없다고요?”
“너, 이 개……!”
“계속 말씀하시죠.”
카이나가 노성을 터트리려 할 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분노를 삭인 카이나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검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마치 타인에 대해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성검은 카이나 그 자체가 아니었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에단은 말을 이어 들었다.
“먼저 검을 찾아라.”
성검과 외양이 같은 검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지면에 박혀 있는 검들은 마치 틀로 찍어 낸 듯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 백 자루다. 한 번에 찾지 못한다면 초기화된다.”
‘시험 내용은 이렇군.’
용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인공은 이와 같은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에 시험 내용은 알지 못했다.
“시간이 더럽게 많이 걸리겠네요.”
“그러면 검의 인정을 받기가 쉬울 줄 알았나?”
“흠, 검의 이름은 뭐죠?”
에단은 성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슬란. 부디 빨리 찾기를 바란다. 나도 세계수가 위험한 상황을 두고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으니.”
“뭐, 까짓것 해 보죠.”
에단이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카이나는 진지한 얼굴로 에단을 주시했다.
‘쉽지 않을 거다. 이번 시험은 모으는 게 아닌, 찾는 거니까.’
검의 외양은 모두 동일했다. 선택을 잘못하면 다시 무작위로 재배치가 된다.
시간을 들이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률은 100분의 1이었다.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면.’
쉽게 찾아낼 수 없었고, 확률에 의존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옳고 그름, 빛과 어둠을 찾는 것이 이번 시험이니까.’
키아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흠.”
에단이 턱을 만지며 검을 바라봤다. 다른 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혹시나 하여 가까이에서 바라봐도 그랬다. 미세한 흠집 하나하나도 모두 동일했다.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에단은 결국 방법을 정했다. 에단이 수많은 검들 중에 한 자루 앞에 섰다.
‘멍청한 녀석, 그 검은 아슬란이 아니다.’
에단이 검을 쥐는 순간 검은 다시 무작위로 배치될 것이다.
‘결국 확률에 기대는 놈인가.’
카이나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맴돌았다. 하지만 에단은 검을 뽑지 않았다.
에단이 자세를 잡았다.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에 두는 정석적인 자세였다.
복싱 기본 자세보다는 조금 보폭을 넓게 잡은 에단이 앞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앞발을 축으로 에단의 몸이 회전했다. 골반이 비틀리며 강한 원심력이 실렸다.
빠각!
에단의 정강이가 검의 옆면을 가격했다.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가짜 성검이 또각 하고 부러졌다.
“이 무슨…….”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흠, 실패군.”
카이나가 황당함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봤지만, 정작 에단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검에만 시선을 두었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그냥 한번 해 봤습니다. 진짜 아슬란이면 부러지지 않을 테고, 가짜면 부러질 거 같아서.”
“뭐 이런 미친놈이…….”
카이나의 시선이 페온에게로 옮겨졌다. 페온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원래 저런 놈이다.”
“하…….”
에단의 행동은 무모했지만, 생각은 맞았다.
진짜 아슬란은 어떠한 일에도 부서지지 않는 경도를 지녔다. 하지만 시험을 위해 형성된 가짜는 단순한 철검 정도의 강도였다.
“……정강이는 무사하냐?”
“뭐, 꾸준히 단련해서 괜찮습니다.”
에단은 격파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가짜 아슬란이 로 킥에 부러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에단은 다시 로 킥을 차기 시작했다.
후웅! 뽀각!
진짜 행세를 하던 평범한 철검이 차례차례 박살 나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에 카이나가 마른세수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쩌다 이런 일이…….”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이번 시험의 목적.
에단은 이 시험의 본래 목적마저 부서트리고 있었다.
에단의 로 킥이 수십 차례 지속되며, 부서진 가짜 성검의 수도 많아졌다.
“이거 재밌네.”
에단이 상쾌한 표정으로 로 킥을 이어 나갔다.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에단은 또다시 자리를 잡았다.
칼날을 향해 정강이를 들이밀면 정강이가 반으로 잘릴 게 분명했으니 날이 서 있지 않은 면을 향해 킥을 날렸다.
후웅! 빠악!
하지만 검이 쪼개지지 않았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느낌이 확실했다. 정강이가 찌르르 울리며 통증이 엄습했다. 에단은 몸을 숙인 채 정강이를 매만졌다.
“……더럽게 아프네.”
이 검이 진짜인 것 같았다. 에단은 확신하며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 에단의 모습을 지켜보는 카이나의 얼굴은 착잡하기만 했다.
쑤욱!
에단이 손잡이를 붙잡자, 가볍게 검이 뽑혔다.
이윽고 주위의 검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빙고.”
“……통과했구나.”
카이나가 복잡한 심경을 곧이곧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카이나는 저 얼굴이 꼴 보기가 싫었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요?”
“그래, 그렇겠지…….”
카이나가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페온을 바라봤다. 페온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후……. 두 번째 시험은 쉽지가 않을 거다.”
카이나의 말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번째 시험도 있습니까?”
“설마 그거 한 번으로 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따위 안일한 생각은 버려라.”
카이나의 말을 들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가지 물어도 됩니까?”
“……질문해라.”
“아까랑은 말투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꺄악’이니, ‘미친 새끼’니 가리지 않고 내뱉다가 이제 와서 권위를 챙긴다고 한들…….”
“입 닥쳐!”
카이나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가 빠득빠득 이를 갈며 에단을 노려봤다. 눈빛에서 분노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봐 주겠어.”
카이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거대한 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손은 좁은 균열을 억지로 열어젖혔다.
거대한 손의 주인답게 무지막지한 크기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저 녀석은…….”
“놀랐나? 이 녀석이 바로 블랙 오우거다. 두 번째 시험은 무기 없이 저 괴물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카이나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하자, 뒤편에 서 있던 페온이 이마를 쳤다.
“……아이고.”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