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성검 (1)
고생했다.
에밀라는 그 한마디에 울컥하여,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에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쉬어.”
에단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에단은 그녀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다.
‘좋은 녀석이니까.’
원작에서의 묘사로도, 에단이 봐 온 것으로도 에밀라는 좋은 사람이었다.
병실에서 나온 에단이 아카데미의 정원을 쭉 훑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레벨린과 학장이 동시에 사라졌고, 로만은 리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학생끼리의 처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리사는 아마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많은 죄명이 더해질 것이다.
아카데미에서의 제명은 당연하고, 귀족 살해죄도 더해진다. 평민이 귀족의 목을 베는 것은 중죄였다.
하지만 리사는 알려진 것처럼 평민이 아닌, 귀족 중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블란테의 적통이다.
설사 왕족의 목을 베었다고 하더라도 리사를 함부로 처형대에 올릴 수는 없었다.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빈센트는 상당한 딸 바보였다. 소중한 딸내미가 재판에 회부되는 걸 눈 뜨고 볼 리가 만무했고, 애초에 명분조차 블란테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을 벌인 건 주동자인 레벨린과 마크, 그리고 로만이었다.
둘은 도주했으니 얼마 안 가 추적 조가 따라붙을 것이다.
‘아카데미의 장악은 천천히 진행하려 했는데…….’
아카데미를 삼키려는 계획도 모두 레벨린을 몰아넣기 위한 방편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간과해 버렸어.’
레벨린은 초조했을 것이다.
블란테라는 강대 세력이 자신을 압박하니 도박 수를 던진 것이다.
‘쯧, 일이 조금 귀찮아졌네.’
에단이 왼손에 들린 성검을 바라봤다.
조금 잠잠하나 싶더니 또다시 거칠게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묘하게 오기가 생겼다.
‘의문이 또 하나 있지.’
페온이 아까부터 말이 없는 것이 뭔가 의심스러웠다.
“이 검에 대해 뭐 알고 있는 것 있습니까?”
― ……모른다.
속 시원한 대답이 아닌 탓에 의심이 가중됐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흠……. 좋습니다. 모르신다니 더 추궁할 수는 없죠.”
― …….
에단이 자리를 떴다.
지금부터 꽤나 소란스러운 일을 벌일 생각이었고, 그 일을 뻥 뚫린 정원에서 할 수 없었다.
* * *
아카데미를 나와 숲에 도착한 에단이 검을 바닥에 밀어 넣었다.
파지직!
에단의 행동에 응하지 않겠다는 듯 적잖은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의 경지는 이미 마스터에 올라섰다.
이 정도 반발력쯤은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콰직!
지면에 밀어 넣은 성검이 몇 차례 스파크를 튀기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흠.”
에단이 성검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저항을 멈춘 채 잠잠하게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단이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적당한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왔다.
툭, 툭.
에단이 성검을 향해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돌멩이에는 저항력이 발휘되지 않았다.
‘예측 가는 건.’
원작의 주인공은 성검을 얻고 나서 죽은 나무의 힘을 얻는다.
에단과는 순서가 반대였다. 먼저 성검의 인정을 받고 나서 죽은 나무를 얻었으니, 불상사를 면한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용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모든 가정을 허사로 돌리는 것이 바로 용사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힘이었다.
‘재수 없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툭, 툭.
던지는 돌멩이의 크기가 점차 커져 갔다.
나중에는 짱돌로도 모자라서 바위 정도 되는 크기까지 올라갔다.
― 너,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페온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역시 뭔가 알고 있네.’
냄새가 풀풀 풍겼다.
페온은 지금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었다.
‘안 되겠네.’
에단이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맨몸으로 부딪히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했다. 믿을 수 있는 건 타이탄의 장갑뿐이었다.
‘저항도 이겨 내는 건 알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에단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데스 나이트와 리치의 힘을 흡수하기 전에는 회색빛을 띠던 마나가 이제는 완전히 어두운색으로 물들었다.
에단의 주먹에 마나가 깃들었다.
흉포한 기운이 주먹에 넘실거렸다.
에단의 왼손 주위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힘을 흡수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마나를 끌어낸 적은 처음이었다.
에밀라의 검으로 했던 오러 소드는 가벼운 몸풀기에 불과했다.
― 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게냐?
에단의 행동에 페온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하긴요.”
말 안 듣는 도구 교육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에단의 오른발이 앞으로 향했다.
사우스포 자세다.
주먹을 일직선으로 뻗지 않았다. 그보다 더 강한, 원심력이 더해지는 펀치가 있으니까.
후웅!
대기를 찢어발기는 강렬한 파공성이 울렸다.
에단의 주먹이 호선을 그렸다. 등 근육이 수축하며 에단의 오버핸드가 그대로 성검을 직격하려는 그 순간.
― 꺄약! 멈춰! 이 미친 새끼야!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의 행동이 뚝 하고 멎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에단이 히죽 웃었다.
* * *
성검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소위 에고 소드라고 불리는 검이 바로 성검이었다.
원작 주인공인 강혁은 평범한 삶을 영위하다 이 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뛰어난 재능과 기연 등으로 단숨에 강자가 되어 가기는 하나,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검을 쥔 적도 휘두른 적도 없던 강혁이었으니까.
그런 그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스승이 바로.
‘이 녀석이지.’
에단이 입가를 비틀며 성검을 바라봤다. 입질이 오지 않을까 했더니 반응을 보였다.
― 저, 저 건방진 자식이!
성검이 길길이 날뛰며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에단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에단이 귀를 후비며 성검을 바라봤다.
“그러게, 좋게 좋게 가면 어디가 덧납니까?”
― 뭐어? 좋게 좋게? 봉인을 깬 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뭐 이런 망나니 같은 새끼가 다 있어!
― …….
성검이 격렬한 분노를 토해 내는 동안에도 페온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역시 뭔가 연관이 있군.’
원작에서는 페온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반면 성검의 비중은 매우 크다. 주인공의 무기이자 스승이었으니까.
더 캐묻고 싶었지만,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에단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편하게 가면 좋겠지만.’
쯧, 에단이 혀를 찼다. 성검이 날뛰는 상황을 보니 그렇게 가기는 그른 듯 보였다.
‘슬슬 도착했을 시기야.’
일행은 이미 세계수에 도달했을 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세계수를 정화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곧 있으면 블란테의 사자도 아카데미에 찾아올 게 빤했다.
‘리사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에단이 어깨를 붕붕 돌리며 성검에게 다가갔다.
― 뭐, 뭐야! 왜 다가오는 거야! 그딴 걸 차고 오는 건 반칙이야!
경기를 일으키는 원인은 아마 ‘타이탄의 장갑’ 같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냥 인정해 주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일을 왜 힘들게 만드시나요.”
― 뭐? 인정? 몸속에 죽은 마나만 그득한 새끼가 내 인정을 받으려고?! 뭐 이런 정신 나간…….
“잘 알겠습니다.”
에단이 팔을 빙빙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성검은 말을 멈췄다. 이미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파악했다.
전력이 실린 에단의 주먹에 직격당하고 싶지 않았다. 성검이 가진 저항력은 타이탄의 힘을 뚫지 못하니까.
― 자, 잠깐! 우리 대화를 먼저 해 보자!
“이제야 말이 통할 준비가 됐네.”
팔짱을 낀 채 다가간 에단이 성검 앞에 쪼그려 앉았다.
― ……먼저 묻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까지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있나?
‘원래는 가질 생각도 없었는데.’
성검은 주인공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건 페온으로 족했으니까.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에단은 오늘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
검을 사용하긴 하지만 주력이 아니었다. 격투술이 주력이었고, 타이탄의 장갑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에단이 말없이 성검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떤 말로 시작할까 하다가 가장 원초적인 말을 내뱉었다.
“강해지고 싶어서.”
― ……뭐?
― …….
성검이 되물었고, 페온은 침묵했다.
“강해지고 싶은 데 이유가 있습니까?”
― ……나의 힘으로 강해지는 게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냐?
성검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강함에 의미가 따로 있습니까? 그냥 좆같은 새끼를 족칠 힘이 있으면 그게 바로 강한 거지.”
― 뭐 이런…….
에단은 담백하게 말했다. 그는 평등함을 믿지 않았다.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던 류태신 시절에도 모든 것은 재능과 상황에 좌우된다고 생각해 왔다.
결국 에단에게는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였다.
― ……미안하지만 협조할 수 없어.
성검이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다. 성검에는 성검으로서 부여된 역할이 있었다.
성검을 쥐게 된 자는 진정한 용사로서 인정을 받으며, 신의와 명예, 그리고 희생을 강요받는다.
그렇기에 성검은 자신의 주인을 택할 때 사람의 본질을 중요시했다.
에단의 가치관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용사로서 적합하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그녀에게는 성검의 주인을 판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 그러면 이제 포기하고…….
“세계수가 뒈지기 직전입니다.”
― 뭐라고?!
성검이 소리쳤다. 에단이 멀뚱멀뚱 성검을 바라봤다.
“방금 말했지 않습니까. 세계수가 지금 죽기 직전인 빈사 상태라고.”
― 그 얘기를 왜 지금 꺼내는 거냐!
“뭐, 이 얘기를 먼저 말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 이, 이런 미친 새끼가……!
“시간도 없으니 빨리 진행하죠.”
에단의 말에 성검이 침묵했다.
―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냐.
“글쎄요, 카이나 씨.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고 싶지만…….”
―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카이나의 반응에 에단이 씨익 웃으며 손목을 두드렸다.
“지금 시간이 부족하네요.”
― ……세계수가 위험한 건 사실이냐?
“네, 확실합니다. 오염이 상당히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성녀나 성자가 와도 치유를 못 합니다.”
― 머저리 같은 요정 놈들은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야…….
한탄을 내뱉던 성검은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 ……각오는 되었느냐? 네가 아무리 지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시험’은 경우가 달라.
“네, 각오했습니다. 빨리 끝내시죠.”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