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도주 (3)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
에단이 시선을 돌려 치료사를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치료사가 몸을 떨었다.
“옷 한 벌만 빌릴 수 있겠습니까?”
“…….”
치료사는 할 말을 잃었다.
대강 옷가지를 챙겨 입은 에단은 검을 쥔 채 밖으로 나왔다.
‘레벨린.’
먼저 그녀를 찾아야 했다.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 에단이 순식간에 레벨린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파직! 파지직!
성검이 격렬한 스파크를 튀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생기자 성검의 거부 반응이 더욱 격렬해졌다.
에단은 이내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쾅!
발길질에 문이 산산조각 났다. 집무실 안을 바라보던 에단이 혀를 찼다.
“쳇, 눈치 한번 빠르네.”
레벨린의 집무실은 휑했다. 그녀만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 물품 또한 모두 사라졌다.
‘아카데미를 포기한다고?’
실질적인 경영권은 빼앗기더라도 레벨린은 아카데미에 잔류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레벨린이 아카데미에 보이는 집착은 엄청났으니까.
이로써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만이 남았다.
‘역시 세계수 때문인가.’
주인공의 부재로 세계수의 오염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
세계수의 오염은 비중이 큰 사건이다. 세계수가 완전히 오염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터.
‘두 가지 증표.’
에단은 입장권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블란테의 창고에서 얻은 세계수의 목걸이, 그리고 헨리.
준비는 끝났다.
에단이 왼손에 들린 성검을 바라봤다.
‘문제는 이건데…….’
세계수는 이미 오염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일 터.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고 봐야 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들고, 남은 건 성검뿐.’
성검은 일반적인 무구가 아니다.
그 기원이 이 세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세계수의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선 먼저 성검을 완전히 복종시켜야 했다.
‘우선 학생들을 데려와야겠네.’
레벨린은 도망쳤지만, 아직 아카데미에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 * *
학생들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본래 동기들 간에는 유대감이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유대는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믿음은 배신당했고, 배신자는 처형당했다.
충격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리치와 데스 나이트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마주했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루 만에 그 모든 걸 겪고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일투성이었다.
사람들이 드레이를 힐긋거리며 바라봤다.
드레이의 머리 색은 화려한 금발이었다. 단순히 화려한 색의 금발이 아닌 성스러움까지 느껴지는 머리 색.
바보가 아니라면 드레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의 곁에는 리사가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리사도 매한가지였다. 리사는 지금껏 가진 힘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저게 평민이라고?’
아카데미에서 처음 검을 배운 자의 실력이 저 정도라고?
그런 녀석이 저렇게 정제된 검술을 가지고, 저런 배짱을 지닐 수 있다고?
머저리가 아닌 이상, 리사 또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사는 로만의 목을 베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아까 교수님 봤어?”
“……어, 알몸이었지?”
“아니, 그렇게 걱정하면서 기다렸는데 동굴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흐흐, 그러게.”
학생들은 회복이 빨랐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막히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체로 등장한 에단은 그들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었다.
남학생들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여학생들의 관심사는 조금 달랐다.
“에단 교수님 몸 봤어?”
“어. 나 그런 몸은 처음 봤어…….”
“그게 진짜 사람 맞아? 얘네랑 비교하면 너무…….”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과장되어 보이기까지 했으나, 어쨌든 학생들은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리사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한마디도 없이 단순한 눈빛일 뿐이었지만, 학생들은 리사에게 압도되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때 리사의 어깨에 드레이가 손을 얹었다.
“……그냥 놔두죠.”
드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리사의 눈이 드레이를 응시하다가 이내 획 돌아갔다.
“마음대로 해.”
드레이가 작게 미소 지었다.
저들 나름대로 상처를 치유하고 잊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네.’
외상은 없지만, 신성력을 과다 사용한 탓에 걷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드레이와 리사는 학생들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었다. 이끌어 줄 교수가 없는 지금, 드레이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받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책임감을 느꼈을까.
드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드레이를 바라보던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왜 웃냐?”
“저도 모르겠네요.”
“……너 되게 재수 없다.”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시는군요.”
그때 환자복 비슷한 옷을 입은 채 나타난 에단이 리사와 드레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좁혔다.
에단의 표정을 본 리사가 얼굴을 구겼다.
“너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 짧다?”
“……죄송합니다.”
리사가 빠르게 수긍했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로만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친 사람도 목숨을 잃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이제 돌아가자.”
다사다난했던 던전 탐사가 완전히 끝났다.
* * *
학생들을 모두 복귀시킨 에단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드레이와 독대하고 있었다.
드레이는 계속 에단이 쥐고 있는 검에 시선이 쏠렸다.
‘……저건 왜 들고 계신 거지?’
뭔가 무서웠다. 에단은 계속 검을 든 채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너, 내 말 무시하냐?”
“아, 아닙니다. 에밀라 교수님의 상처 말씀하신 거죠?”
“어, 좀 부탁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에단이 드레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드레이는 도망자 신세였다. 신성 왕국이 그를 애써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외부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시 붙잡혀 갈 수도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그곳에서의 생활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만일 다시 붙잡혀 들어간다면 이번에는 결코 나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한편 에단은 드레이가 어떤 마음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뿐인 위로는 도움이 안 되지.’
확실한 권력과 그 증거가 필요했다.
에단이 품에서 검은 사자 문양의 브로치를 꺼냈다.
“……이건.”
“블란테의 문양이다.”
“블란테? 그럼 설마……!”
드레이의 시선이 이를 드러내며 자신감 넘치게 웃고 있는 에단에게로 향했다.
“내가 블란테의 둘째거든.”
신성 왕국?
성자를 데리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꼬우면 붙든가.
* * *
블란테의 수호를 확인받은 드레이가 에단과 함께 에밀라의 병실을 찾아갔다.
“학생 아닌가요?”
“……드레이라고 합니다.”
에밀라의 흉터를 고칠 사람을 데려온다던 에단이 학생과 함께 오자, 치료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학생을 이곳에 왜 데려왔냐는 표정에 드레이가 에밀라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후우.”
드레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반쪽짜리지만 분명한 성자였다. 성자의 신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기에, 잠깐의 휴식으로 그는 모든 신성력을 회복했다.
‘이상해.’
드레이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반쪽짜리 성자였고, 그 탓에 신성력을 다루는 능력이 미흡했다.
하지만 리치와의 전투 후부터 신성력을 다루는 게 한결 수월해진 것 같았다.
우우웅―
드레이가 정신을 집중하자 금발이 펄럭이며 손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성스러운 빛을 본 치료사의 눈이 커졌다. 치료사가 에단과 드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쉿.”
에단이 검지를 들어 그리 말하자, 치료사는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새어 나가긴 하겠지.’
후에 성자의 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신성 왕국은 반드시 드레이를 되찾으러 올 것이다.
‘줄 생각은 없지만.’
에단은 소유욕이 강하고 욕심이 많았다. 한번 침을 바르고 손에 쥔 것은 웬만해서는 내려 두지 않는다.
챔피언으로 장기 집권하며 챔피언 벨트마저 놓지 않았던 그였다.
에단의 시선이 에밀라의 상처를 향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아니, 아문다는 표현보다도 다치기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는 표현이 더욱 옳을 듯했다.
길지 않은 시간 신성력을 상처에 집중하던 드레이가 손을 뗐다.
“끝났습니다.”
“……맙소사.”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본 치료사가 탄성을 내뱉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치료사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드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이 힘을 원망하였지만, 누군가는 필요로 하고 동경하고 있었다.
한층 마음이 복잡해진 드레이의 어깨를 에단이 두드렸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저희 때문에 다치셨는데요…….”
드레이의 눈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드레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걱정 마라.”
“네, 그럼 이만…….”
드레이가 병실을 나섰다.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치료사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방금 보신 건 비밀인 거 알죠?”
에단의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치료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사가 병실을 나서자, 병실에는 에단과 에밀라 둘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에밀라의 숨소리는 일정했고, 평온했다.
‘흉터는 남지 않았군.’
자신의 오만함이 낳은 결과였다. 에단은 그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생각과 본인의 힘을 과신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위험했어.’
만일 룬어가 변수가 되지 않았고, 에단이 죽은 나무의 힘을 얻지 못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입맛이 썼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성검을 바라봤다. 성검의 저항이 약해졌다.
‘신성력 때문인가.’
정확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아마 신성력으로 인해 성검의 저항력이 약해진 것 같았다.
‘까다롭기는.’
성검의 힘은 신성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설정은 아직 풀리지 않은 내용이었다.
‘결국에는 제압해야지.’
성검을 완전히 복종시켜야만 다음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에단은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레벨린이 아카데미를 떠났으니, 그녀가 앞으로 무엇을 꾸미고 준비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움찔.
그때, 에밀라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에단의 시선이 에밀라에게로 향했다.
“슬슬 일어나지?”
에단에 말에 에밀라가 눈을 떴다.
에밀라의 눈이 에단을 향했다. 그녀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단 씨…….”
“어.”
“레벨린 님이…….”
“알고 있어.”
에밀라가 눈을 감았다.
“……저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군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네가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으면 학생들이랑 내 여동생은 이미 죽었어.”
팔장을 낀 에단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