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도주 (1)
동굴의 벽면이 무너졌다. 에밀라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한데 정작 에단은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에단이 이 동굴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일 터.
주변만 둘러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주변에는 몬스터와 리치가 있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기에, 이런 비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게 당연했다.
애초에 검으로 이곳저곳을 찔러보다가 겨우 찾은 곳이니, 더욱더 에단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럼 갔다 올게.”
에단이 태연하게 새로운 통로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에밀라가 뒤따랐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왜?”
“그건…….”
예상외의 물음에 에밀라가 할 말을 잃었다.
“……위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이었다. 하지만 이 말 이외에는 별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에단이 물끄러미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외투를 붙잡았다.
“이거 벗는다?”
“……?!”
“그래도 따라올 거야?”
에단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웃자, 에밀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파렴치한…….’
“그럼 들어간다.”
에단이 에밀라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검을 툭 하고 던졌다. 에밀라가 화들짝 놀라며 검을 잡았다.
에밀라가 쌍심지를 켜며 에단을 노려봤지만, 에단은 손을 휘적거리며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에밀라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에단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미친놈…….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페온의 욕지거리가 가장 먼저 들렸다.
‘그 말 너무 자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스러운 후손한테 미친놈이 뭡니까, 미친놈이.’
― 단물 다 빨아먹고선 이제야 선조 취급이냐?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마법으로 모종의 처리를 해 두었는지 주변은 어둡지가 않았다.
‘어두워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불완전하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지금은, 블랙 오우거의 힘을 흡수했을 때보다 훨씬 더 밤눈이 좋아졌다.
낮과 밤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
덕분에 에단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이내 그의 눈앞에 어떠한 장소가 나타났다.
‘정말 심심한 연출이군.’
애초에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정말 예상한 그대로였다.
검 한 자루가 바위에 박혀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위로 마법 조명이 검을 비추고 있었다.
―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온이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바위에는 어떤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역시 해석은 안 되는군.”
주인공도 해석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때 페온이 입을 열었다.
― 선택받은 자만이 이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검을 향해 다가가던 에단의 몸이 멈춰 섰다.
“……읽은 겁니까? 대충 그럴듯한 말을 덧붙인 게 아니라?”
― 너는 나를 뭐로 보는 게냐?
“음……. 다시 보게 되는군요.”
틀에 박힌 설명이었고, 딱히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에단이 거침없이 검을 향해 다가서자, 페온이 목소리를 냈다.
― 꼭 뽑아야만 하겠느냐?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
에단은 고민하지 않고 검을 쥐었다.
검이 뽑힐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에단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단단하게 쥔 팔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파지직!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강한 반발력에 에단의 몸이 밀려났다. 에단이 이마를 찌푸렸다.
― 끝 말귀에 다쳐도 모른다고 쓰여 있군.
“……지금 장난합니까?”
그걸 먼저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니야?
에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불에 지진 것처럼 살가죽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건가.’
벗겨진 살가죽이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에단의 회복 속도는 이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멀쩡해진 오른손을 털어 내며 에단이 이번에는 왼손을 가져다 댔다.
“어디, 이거도 버티나 보자고.”
에단이 허공에서 왼손을 쥐었다 펴며 바라봤다. 우연한 기회에 얻은 ‘타이탄의 장갑’은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겨 준 적이 없었다.
‘성능 점검 한 번만 더 가자고.’
에단의 왼손이 거침없이 검을 붙잡았다.
파지직!
다시금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에단의 손을 거부하듯 스파크가 연신 튀어 올랐다.
하지만 강한 열기와 반발력 속에서도 타이탄의 장갑은 꿋꿋이 버텨 내고 있었다.
‘성능 하나는 확실하군.’
에단 본인이 생각해도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에단은 왼손에 힘을 더욱더 가했다. 하지만 검은 뽑히지 않았다.
‘……어쭈.’
지금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에단이 붙잡은 손에 힘을 더 가해 봤지만, 검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좋아, 쉽게 뽑히면 재미가 없지.”
에단이 자세를 다잡았다.
다리는 어깨 넓이, 힙힌지는 확실하게, 그립은 오버 그립.
아쉽게 스트랩 같은 장비는 없었다.
하지만 스트랩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장비가 남아 있었다.
에단은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다행히 거부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와 정강이가 수직을 그리고 있었고, 자세도 완벽했다.
에단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복압을 단단하게 걸어 잠갔다. 둔근을 조이면서 순식간에 지면을 뽑아 버릴듯 모든 근육을 수축시켰다.
동시에 운용하던 마나도 폭사시키며 모든 마나가 발바닥과 허리에 집중되었다.
꽈드드드득!
장내가 지진이 인 것처럼 흔들렸다.
천장에서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돌가루가 떨어졌음에도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에단이 이를 악물고는 더욱 힘을 주자, 밟고 있는 바위가 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혈관이 도드라지며 에단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어디 한번 버텨 봐……!”
전성기 류태신의 데드리프트 기록은 350킬로였다. 파워리프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기록.
지금 에단의 신체 능력은 류태신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했다. 심지어 마나라는 보조 수단까지 있었다.
에단이 한 차례 더 이를 악물자, 바위에 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지면의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지만, 에단은 호흡을 풀지 않았다. 지금 숨을 내쉬면 붙잡아 둔 복압도 풀리기 마련이었으니까.
빠득 빠드득!
바위에 그어진 금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가 산산조각 나며, 에단이 서 있던 장소가 폭삭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먼지구름이 일었고, 이내 차츰 가라앉은 먼지 구덩이 속에서 에단은 검을 든 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역시 별달리 특색 없는 평범한 검이군.’
파직 파지직―
뽑혔음에도 에단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검은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반발도 타이탄의 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앙칼지네.”
― 미친놈…….
“그놈의 미친놈 좀 그만하면 안 되는 겁니까?”
― 너의 행동을 돌아보거라, 그 소리가 안 나오나……. 그나저나 빨리 나가야겠구나.
“…….”
페온의 말에 에단이 천장을 바라봤다. 금이 그어진 곳은 비단 바위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균열이 생긴 천장을 발견한 에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제기랄.”
에단은 죽을힘을 다해 왔던 길을 달려 나갔다.
* * *
가만히 서서 에단을 기다리고 있던 에밀라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자꾸만 에단의 나체가 떠올랐다.
떠올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휘저어 봤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에단의 우람한 근육과 잘게 갈라진 근섬유…….
에밀라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에밀라가 잡념을 떨쳐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섬뜩하고 기괴한 문양이 가득한 방. 전투에서 보았던 리치가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모두 레벨린 님의 뜻이었겠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와 학생들에게 항상 진심이었다. 비록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에게만큼은 늘 진심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레벨린에게 있어 학생들은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모두 죽이려고 했어.’
심지어 로만까지도.
만일 자신이 늦고, 에단 또한 늦었다면 절반의 학생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이 마법진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불쾌함과 분노가 들끓었고, 그나마 레벨린에게 남아 있던 미련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저는 끝까지 도구에 불과했군요.’
에밀라가 음울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촛불 정도의 밝기가 주변 곳곳에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툭. 툭.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에밀라가 손을 들어 떨어진 것을 붙잡아 바라봤다.
“……돌가루?”
이게 왜 떨어지지?
그런 생각이 들 때, 에단이 입구를 뛰쳐나왔다.
‘음?’
외투를 펄럭이며 나체로 다가오는 에단을 발견한 에밀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 꺄악!”
“지금 그럴 틈 없어!”
에단이 에밀라의 손목을 붙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살고 싶으면 뛰어!”
이미 에단이 달려온 뒤쪽 통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에단과 에밀라가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도 동굴이 무너지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 * *
리사가 로만을 죽였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다른 학생들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리사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학생들은 당황해하고 겁에 질려 하기는 했지만, 리사를 질타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로만의 행동이 같은 학우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리사.’
율리가 리사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양팔로 몸을 붙잡아 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가서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리사 같지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편하고 친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율리는 그런 감정이 드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드레이는 표정 변화 없이 리사를 바라봤고, 리사는 말없이 떨어진 로만의 목을 바라봤다.
이내 리사의 시선이 동굴의 입구로 옮겨졌다. 에단과 에밀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동굴에서 굉음이 흘러나오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드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무너진다……!”
리사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뭐? 갑자기? 아직 오빠랑 교수님이……!”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어서!”
리사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드레이는 리사가 내뱉은 오빠라는 단어를 들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드레이 역시 무력감에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도 그는 도망가는 입장이었다.
바로 그때, 동굴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에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투를 펄럭이는 나체의 남성과, 얼굴을 가린 채 끌려오는 여성.
익숙한 얼굴이었다.
에단과 에밀라였으니까.
순간 드레이의 몸이 얼어붙었다.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던 리사도 몸이 굳었다.
콰광! 꽈르릉!
입구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동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먼지구름만 일었을 뿐, 그리 큰 파장은 일지 않았다.
“후, 간발의 차이였군.”
“…….”
이마를 쓸어내린 에단은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에단은 이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음…….”
에단이 침음성을 흘리며 외투를 허리춤에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