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함정 (1)
성인(聖人).
단어 그대로 신성한 사람을 칭한다.
교국에서 공표하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
제아무리 신실한 사제의 신성력도 성인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반쪽짜리 성자.’
드레이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었다.
진정한 성자는, 아니, 성녀는 지금 신성 왕국이 보호하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녀의 친오빠였다.
두 남매는 가난했다. 화전민 출신으로 하루하루를 빌어먹기도 버거웠다.
어릴 때 두 부모를 여의고 둘은 힘겹게 살았었다.
하지만 둘의 외향은 특별했다.
두 사람의 머리칼은 찬란한 금발이었다. 물론 금발인 사람은 꽤나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남매의 금발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특이하다 못해 특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금발.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의 머리에는 윤기가 흘러넘쳤다.
화전민의 삶은 궁핍하기에 두 남매의 몸은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몸이 그 정도로 야윈 상태라면 머릿결도 푸석푸석하고 거칠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리칼은 언제나 화사하게 밝은 빛을 뿜어냈다.
본래 사람은 자기와 다른 존재를 밀어내기 마련이라, 남매는 그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하여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을 잃은 남매는 서로를 더욱 의지하며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새하얀 사제복과 백색의 갑옷을 입은 무리가 화전민의 마을을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했다.
저런 높으신 분들이 여기에는 무슨 볼일로 찾아왔나 싶어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들은 화전민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용무는 드레이 남매에게만 있었다.
남매를 발견한 중년 사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 오…… 신이시여…….
감격한 표정으로 기도하는 사제의 뒤로 기사들이 차례차례 무릎을 꿇고 따라 기도했다.
드레이는 당황했고, 동시에 겁먹었다.
당시의 드레이는 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드레이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드레이가 앞에 섰고, 여동생은 바들바들 떨며 뒤에 숨었다. 작은 몸집의 소년이 작은 몸집의 소녀를 지키고 있었다.
사제는 인자하면서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 성인(聖人)을 뵙습니다.
그 이후로 남매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하고 처절한 삶이 아닌, 호화스러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는 족쇄가 채워졌다.
성자와 성녀라는 족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족쇄의 무게는 달랐다.
드레이는 완전한 성자가 아니었다. 신성력이라는 그들이 추앙하는 힘은 그의 여동생이 훨씬 많이 지니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자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동생과 같은 점이라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뿐이었다.
드레이가 성자의 수준에 걸맞지 않은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제들은 드레이를 향한 대우를 달리했다.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관심을 거뒀을 뿐.
그 탓에 그들의 관심은 오롯이 드레이의 여동생을 향했다. 드레이는 그 덕에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그들의 간섭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매사 그들의 통제하에 움직일 수 있었으며, 여동생은 갈수록 점점 자아를 잃어 갔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추앙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드레이의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점차 그들이 원하는 인형이 되어 갔다.
드레이는 그런 여동생을 구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족쇄의 크기가 달라졌을 뿐, 드레이에게도 성자라는 이름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드레이는 탈출을 감행했고, 성공했다.
예상외로 추격은 없었다. 그들이 드레이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 드, 드디어 탈출했어. 이제 거기는 끝이야!
호화롭고 풍족한 생활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하지만 드레이는 궁핍한 삶이 더 행복했다.
신성 왕국에서의 삶은 감옥이며 지옥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여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심한 간섭을 당하지 않던 드레이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통제를 매 순간 받는 여동생은 어떠하겠는가.
드레이는 여동생의 표정을 기억했다.
인형이나 다름없는 얼굴.
빠드득.
드레이는 이를 갈았다.
성인의 상징인 금발을 염색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드레이는 지식이 필요했다. 신성 왕국에서 배운 것들은 편협한 지식이었다.
신성 왕국은 ‘신’이라는 이름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왕국과 제국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여동생을 구출하려면 힘과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없었고,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천운이었다.
신성 왕국에서 배운 검술과 지식이 아니었다면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을 터.
아무리 학생들 사이에서 인맥을 만들어도 신성 왕국과는 대적할 수 없었다.
신성 왕국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모두 일관된 사고방식이었기에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대륙의 주신은 하나였다.
그러니 그들이 신성 왕국을 적대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던 드레이에게 변화가 생겼다.
에단은 무언가 달랐다. 비록 평민 출신의 교수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부터 다른 교수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존재감을 최대한 숨기던 자신을 알아봐 주었고, 이번 던전 탐사 때도 팀 리더로 보냈다.
‘그 사람만 있다면…….’
그때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슴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며 격렬한 통증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화르르륵!
불행의 원인이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제 색채를 되찾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칼이 흩날렸다. 드레이의 의지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사악하고 불길한 존재를 인식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학생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드레이의 머리칼에서 발산하는 찬란한 황금빛에 이목이 쏠려 모두가 입을 벌린 채 드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가 거슬려 찾아왔거늘…… 불쾌한 녀석이 있었구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멍하니 드레이를 응시하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몸이 굳은 것은 뒤에 자리해 있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정신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리사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은 기분이었다.
“뒤에 있으세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걸까.
드레이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비록 반쪽뿐인 성자였지만, 드레이는 지금 어둠과 대적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람의 골격 같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뼈였다. 로브를 걸친 해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섬뜩한 안광은 마치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구나.”
그 한마디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리사는 그때 더욱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망쳐야 해.’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지만, 비슷한 기운은 느껴 본 적 있었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격분했을 때였다.
빈센트는 대륙 제일의 검사 중 하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저 해골이 빈센트와 동등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누구도 건들 수조차 없는 강함이었다.
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손을 들어 드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에 휩싸이며 진정되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차분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절망적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베오드라도의 턱이 딱딱거렸다. 마치 비웃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 기분 나쁜 족속들이야.”
흉흉한 안광이 드레이를 직시했다. 베오드라도가 손을 뻗자, 타오르는 구체가 떠올랐다. 그는 영창도 없이 마법을 구현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파이어 볼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붉은 불꽃이 아닌, 그림자처럼 어두운 불꽃이 구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없어지거라.”
심드렁한 목소리였으나 파급력은 엄청났다.
화르륵!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열기가 동굴에 퍼져 나갔다.
드레이가 뒤를 돌아봤다.
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리치의 위압감에 기절하거나 몸이 굳은 자들이 대다수였다.
드레이가 검을 들어 올리자, 신성력이 죽은 마나에 대항하듯 거칠게 타올랐다.
마나를 다룰 수 있지만 경지는 미미했다. 그러나 지금 발휘하는 신성력은 마나와는 궤를 달리하는 힘이었다.
꽝!
드레이가 방벽이 되었다. 불똥이 튀면서 검은 화구가 터져 나갔다.
까드득.
드레이가 이를 악물자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리사가 그런 드레이를 바라봤다.
‘나, 나는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그녀는 검사였다.
비록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으나, 검술 명가의 혈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드레이의 정체가 누군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사실은 리사가 지금 보호받고 있다는 것.
그녀의 뒤에서는 학생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리사는 사명감과 동시에 책임감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포가 리사의 발을 잡았다. 지금 그들을 지키는 이는 드레이였다.
그때 드레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베오드라도를 도발했다.
“고작 이 정도입니까?”
드레이는 두려웠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이겨 내기 위해 공포를 짓눌렀다.
‘내가 지켜야 한다.’
드레이는 반장이었다. 에단의 독단으로 떠맡은 자리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드레이는 반장으로서 동급생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나만으로도 벅차던 검은 구체인데, 이번에는 수십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드레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절망스러웠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사는 자신의 손바닥을 검으로 그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렀다.
덕분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도와줄게.”
“……리사 씨, 위험합니다.”
“리사 씨가 뭐야. 우리는 동급생이야.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뒈지는 건 똑같아.”
맞는 말이었다. 드레이는 저 많은 화구를 혼자서 막아 낼 수 없었다.
“……교수님이 올 때까지 버티자.”
리사는 평생을 혐오하던 에단에게 희망을 걸었다.
아카데미에서 본 에단은 늘 자신감이 넘쳤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에단이 온다고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을 테다. 하지만 어쩐지 에단이 오면 이 절망적인 상황조차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베오드라도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귀가 밝았다.
“너희들이 말하는 자가 그 녀석을 가리키는 건가? 하하, 이거 어쩌지. 희망을 짓밟아서 미안하구나.”
베오드라도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금쯤이면 아마 다 죽었을 테다. 너희가 길을 선택한 것처럼 나도 길을 택했지. 너희들은 나를 만났으니, 반대쪽은 내 기사를 만났겠군. 아끼는 데스 나이트를 그쪽으로 보냈거든.”
리사와 드레이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하지만 리사는 이내 그 감정을 지워 냈다.
“글쎄다?”
“흐음, 애써 강한 척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텐데 말이야.”
베오드라도의 비아냥에 리사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교수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야.”
숨을 들이마신 리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최악의 망나니 새끼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