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리치 베오드라도 (3)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은 갑주의 기사.
데스 나이트.
원작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몬스터다.
언데드 계열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녀석.
― 평범한 데스 나이트가 아니니 방심하지 마라.
페온이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데스 나이트 정도 되는 녀석이 지금 시점에 등장하다니.’
레벨린과 로만.
그 둘의 의도가 느껴지는 노골적인 함정.
무언가 준비를 해 뒀으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데스 나이트였다니.
데스 나이트는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뛰어난 경지에 오른 기사의 시체가 준비물이라 재료 준비부터 난이도가 높다.
심지어 경지에 이른 기사의 정신력은 강철과도 같아 언데드로 만들기 더욱 어려웠다.
하여 뛰어난 경지에 올랐으며, 원한을 품은 채 목숨을 잃은 기사가 필요했다.
‘심지어 제련 과정도 보통이 아닐 텐데……. 뭐 가능하기야 하겠군.’
레벨린의 뒷배가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시기에 데스 나이트가 나타났다는 게 놀라울 뿐.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풍기는 분위기와 느껴지는 압박감.
― 그 칼쟁이 교수보다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눈앞에 데스 나이트는 에밀라보다 강했다.
에밀라를 상대로 얻어 낸 승리도 페이크와 허초, 그리고 가진 아이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무기들로 에밀라의 흐름을 끊어 얻어 낸 승리.
물론 그 역시 에단의 실력이었지만, 경지와 역량만 놓고 본다면 에단이 밀리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뭐 언제는 쉬웠나?’
에밀라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
주인공이라면 어렵지 않은 상대일 수도 있었다.
용사의 축복과, 언데드와 상극인 ‘희망’이라는 룬어.
아이러니하게도 에단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뜻하는 룬어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군.’
당장은 아껴 둬야 할 패였다. 룬어는 그 반작용이 상당히 강하니까.
‘다른 무기도 있지.’
하지만 에단도 언데드와 상극인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데스 나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탐색전은 여기까지만 하지?”
에단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그가 애용하는 투박한 철검이었는데, 사실상 연습용 검이었다.
‘명색이 검술 가문 아들내미인데, 검 하나 바꿔야겠군.’
뭐, 여기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검이 자연스럽게 딸려 오겠지만.
통통.
에단이 가볍게 스텝을 뛰며 검을 왼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손은 허리춤에 가져갔다.
마치 펜싱을 하는 듯한 자세.
‘훈련 캠프 때 펜싱하던 애한테 심심풀이로 배운 걸 써먹게 됐네.’
배웠다고 하기도 민망한,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 하는 정도였지만, 에단의 재능은 한 번 본 것도 그럴싸하게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펜싱은 일반적인 검술이랑은 궤를 달리하는 현대의 스포츠다.
‘하지만 탐색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잽과 같은 펀치보다 월등히 긴 사정거리라면 초반의 탐색전으로는 충분할 터.
검을 뽑아 든 데스 나이트가 검을 지면에 대고 끌면서 에단을 향해 걸었다.
기기기긱.
바닥에 닿아 끌리는 검에서 불쾌한 소음이 나며 불똥이 튀었다.
데스 나이트의 행동은 마치 에단을 비웃는 것 같았다.
“분위기 더럽게 잡네.”
에단이 웃었다.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탓!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단련을 거듭한 에단의 몸은 신속했다.
쐐액!
에단의 검이 데스 나이트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근접한 에단의 검에도, 데스 나이트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 흉포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 조심해라!
쿠구구구!
“옘병!”
왼손에서 압도적인 반발력이 느껴졌다. 에단의 신체 능력은 범인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뛰어난 육체적 재능, 블랙 오우거의 특성, 더불어 마나의 컨트롤.
모든 걸 적절히 조합할 줄 아는 이가 에단이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가 뿜어낸 기운은 그런 에단의 일격을 밀어낼 만한 것이었다.
당혹감에 젖은 듯 보이는 에단의 얼굴.
“큰일 났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에단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런 건 너만 쓸 수 있어?”
스스스스스!
데스 나이트가 뿜어낸 검은 기운. 에단에게는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데스 나이트는 언데드였고,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은 죽은 마나였다.
에단은 죽은 마나를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죽은 나무.’
벨몬트, 블랙 오우거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포악하고 강렬한 기운. 그 위압적인 기운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에단이 뒤를 힐긋 바라봤다. 학생들이 몸을 벌벌 떨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기절한 학생들도 보였다.
유일하게 웃고 있는 한 명.
바로 로만이었다.
“너는 끝나고 보자.”
아주 뒈질 줄 알아.
에단이 다시 상대에게 집중하며 내면에 있는 힘을 끄집어냈다.
키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자신의 양분을 발견하자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무형의 기운이 번져 나갔다.
― ……무슨 무모한 짓을.
‘일단 지켜보고 있으시죠.’
자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이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아?’
에단이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쿠구구구구―
죽은 나무의 기운이 마치 올가미처럼 데스 나이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데스 나이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힘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늦었어, 새끼야!”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 마음껏 먹어 치워라.’
데스 나이트의 검이 에단의 목을 노리고 그어졌다.
에단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곤두서 있었다. 붉게 충혈된 에단의 눈이 데스 나이트의 검을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에단이 목을 젖히며 피하는 대신 몸을 숙였다.
타앙!
에단의 몸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절묘하게 들어간 타이밍 태클이었다. 양쪽 다리를 붙잡는 투 레그에서 원 레그로 물 흐르듯이 옮겨졌다.
데스 나이트가 빠르게 반응하며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에단의 목적은 데스 나이트를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에단이 뱀처럼 움직였다.
중심을 잡기 급급하던 데스 나이트는 순식간에 등을 내줬다.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백 포지션을 잡고 등 위에 올라탔다.
“위험한 물건은 먼저 내려 두지?”
손에는 아직 검이 들려 있었다.
콰직!
에단의 검이 데스 나이트의 팔을 찍어 냈다.
이때도 반발력은 느껴졌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쭈, 버텨? 그래 한번 계속 버텨 봐!”
콰직! 콰직!
등에 올라탄 채 수차례의 공격을 지속하자, 데스 나이트의 갑옷이 넝마가 되며 그가 결국 검을 놓쳤다.
이를 본 에단이 망설임 없이 검을 집어던졌다. 넝마가 되기는 에단의 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은 이미 제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꽈아악!
에단의 팔이 데스 나이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초크야 먹히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뒈지는 건 똑같잖아?’
에단이 달라붙자, 죽은 나무의 기운이 기회를 포착한 듯 더욱 게걸스럽게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리어 네이키드 초크(Rear Naked Choke).
본래라면 상대의 경동맥을 압박해서 기절시키는 기술이었지만, 상대는 데스 나이트였다.
피가 흐르지 않고, 숨을 쉬지 않는 죽음의 기사.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경동맥을 조르는 대신 죽은 마나를 흡수하면 그만이다.
데스 나이트가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에단을 떼어 내기는 쉽지가 않았다.
‘단순히 힘만 세다고 풀 수 있을 것 같아?’
제대로 걸린 백 초크는 블랙 벨트의 주지떼로도 풀기 힘들었다.
아니, 완벽하게 그립이 완성되었다면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반면 에단은 블랙 벨트의 주지떼로도 압도하는 주짓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블랙 오우거 수준의 근력을 지녔고, 죽은 나무의 힘으로 데스 나이트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상황은 에단에게 유리하게끔 반전되었다.
“어때, 다리가 풀리는 기분은?”
에단이 데스 나이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성이 없는 언데드였지만, 마치 몸을 떠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꽈악!
데스 나이트의 손이 에단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에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발버둥 쳤지만, 허사였다.
죽은 나무는 여전히 데스 나이트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고, 데스 나이트의 생명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를 약 올리는 에단의 상황도 악화되어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에단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죽은 마나로 인해 내장이 짓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에단이 치아가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내가 질 것 같아?”
어디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어 봐.
죽은 마나는 쉴 새 없이 힘을 흡수했고, 마침내 데스 나이트의 기운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모든 힘을 잃고 텅 비어 버린 갑주가 된 데스 나이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쿵!
묵빛의 갑주가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진 갑옷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에단이 자연스럽게 그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엎어지지 않고, 한쪽 무릎과 팔로 지면을 짚었다.
에단의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허용치를 넘어서는 기운을 억지로 흡수한 반작용이었다.
눈과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에단의 팔이 벌벌 떨렸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빨리 몸을 추슬러야 한다!
페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에단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시끄럽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과식해서 체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에단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교, 교수님……. 괜찮으신 건가요?”
“다들 비켜 있어.”
“……네?”
에단은 맹렬한 눈빛을 하고는 비틀거리면서 로만을 향해 다가갔다.
로만의 몸이 굳어 있었다.
‘괴, 괴물이야…….’
로만은 거만하고 오만했지만, 안목이 없지는 않았다.
방금 에단의 모습.
데스 나이트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쓰러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육박하는 괴물이 바로 데스 나이트였다. 아무리 에단이 블란테의 적자이며 일신의 무력도 대련을 통해 증명했다고 한들, 데스 나이트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데스 나이트가 나오는지도 몰랐어!’
레벨린을 통해 대략적인 언질만 들었을 뿐이다. 마크와 로만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계획 또한 완벽에 가까웠다.
데스 나이트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며 등장할 때 로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순식간에 에단을 쳐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반대로 흘러갔다.
에단은 데스 나이트를 정면에서 깨부쉈다.
게다가 지금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은 마치 무저갱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모습 같았다.
눈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로만에게 다가간 에단은, 로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들 비켜.”
에만의 말이 떨어지자, 얼어붙어 있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로만 곁에서 떨어졌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패거리도 거리를 벌렸다.
“내가 이따 보자고 했지?”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