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96화 (96/398)

◈ [96화] 리치 베오드라도 (2)

동굴의 심층부.

몬스터, 인간, 동물들의 뼈로 이루어진 의자 위에 베오드라도가 앉아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안구 대신 붉은 안광이 타오르는 것처럼 흔들렸다.

베오드라도는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편한 옷이군.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본신의 힘을 모두 끌어낼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는 힘의 제약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감안할 수 있는 것이다. 베오드라도는 이곳에 현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벌레 같은 것들.’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동굴을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인간들의 기운이.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터져 죽을 가련한 생명체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본능에 자리 잡은 혐오감만이 스멀거렸다.

‘아니지, 지금은 오히려 훌륭한 오락거리구나.’

현신했다는 사실에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 해소책이 바로 저 벌레들이었다.

‘같잖은 경고는 들었으나…….’

레벨린이라는 이름의, 말을 잘 듣는 벌레가 한 조언.

한 인간을 조심해라.

‘주제넘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베오드라도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평소의 그라면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벌레를 터트려 죽였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는 않았다.

‘건방지긴 하나…… 쓸 만한 녀석이니까.’

온전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만한 실행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순조로운 모양이군.’

던전 곳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베오드라도가 안배해 둔 것들이다.

‘더욱 큰 절망을 주기 위해서는 적당한 희망도 필요한 법이지.’

무료함을 달래 줄 오락거리를 허무하게 망가뜨리면 재미가 없을 터.

‘슬슬 하나 더 준비를 해 주마.’

베오드라도가 손을 들자, 불길한 검은 기운이 손에 밀집되었다.

그는 손에 모인 죽은 마나를 빚어 무언가로 만들어 냈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라.”

빚어낸 것에 명령하자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듯 자취를 감췄다.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해 줬으면 좋겠군.”

베오드라도의 안광이 흔들렸다.

* * *

“전방에 고블린 두 마리. 후위는 마법의 영창을 준비하고, 한 명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세요. 전위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순식간에 지시 사항들을 내뱉은 드레이가 검을 들었다. 그의 검에는 푸른 피가 묻어 있었다. 코볼트의 혈흔이었다.

리사도 검을 뽑아 고블린을 처리할 준비를 마쳤다.

‘이 녀석 진짜 뭐지?’

평소에는 맹한 인상을 주던 드레이는 실전에 돌입하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망설임 없는 지시에 동급생인 학생들도 드레이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반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드레이의 리더십에 매료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눈이 좋다고 평가할 게 아니야.’

라이트가 주변을 밝히자 미약하게 보이는 몬스터의 윤곽.

솔직히 구분할 수 없었다.

형체는 흐릿하게 보였으나,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리사는 시력이 좋은 편이었다. 검을 다루는 게 주특기였지만, 뛰어난 시력으로 활도 곧잘 다뤘다.

‘밤눈이 밝다는 말은 이상하잖아.’

그것도 밝은 달이 뜬 날, 달빛에 의존할 수 있을 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드레이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추궁할 수도 없고…….’

밝히지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리사는 추궁 대신에 검을 들었다.

* * *

좌측 통로로 입장한 학생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앞줄에는 겁에 질려 몸을 떠는 학생들이 있었고, 후위에는 로만과 그의 무리가 있었다.

로만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리는 좌측으로 이동한 학생들 사이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에단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팔짱을 낀 채 따라갔다.

로만이 힐끗 뒤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놈.’

에단을 흘겨본 로만이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아카데미를 노릴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오늘이 너의 마지막일 테니까.’

블란테의 후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레벨린에게서 전해 들은 계획은 그런 사소한 일들을 모두 무마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방향에 따라 계획이 달라진다고 생각했겠지만, 잘못 생각했어.’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거만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완전히 뒤바뀔 것을 상상하니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툭.

그때 앞 사람이 멈춰서며 로만과 부딪쳤다.

앞을 바라보니 먼저 나아가던 학생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만이 얼굴을 구겼다.

“뭐 해? 앞으로 안 가고!”

“하, 하지만…… 앞이 어두워서…….”

“그러면 마법을 써! 머저리같이 머뭇거리지 말고.”

“하지만 마력을 아껴야 하잖아…….”

“내 말 못 들었어? 몬스터는 우리가 처리한다고.”

“…….”

겁박하는 말투로 으르렁거리는 로만의 말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에단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권력에 취해 있군.’

원작에서 로만은 던전 탐사에서 큰 사고를 치고, 그 사고를 권력으로 덮으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사고가 아니겠지.’

적어도 그 사고는 로만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성향과 안일한 행동이 겹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로만의 행동을 보면 그 상황과 달랐다. 무언가 특별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감추지도 않고 노골적이란 말이지.’

하지만 에단은 그것에 응했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보도록 할까.’

값은 그 뒤에 치르고.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 * *

로만 패거리의 강요로 선두에 선 힘없는 학생들은, 처음과 다르게 점점 더 발걸음이 과감해졌다.

몬스터들이 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학생들이 빛을 거둬도 매한가지였다. 한참을 걸어도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고 긴장한 학생들은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리가 길을 잘 선택했나 봐…….”

“와……. 다행이야…….”

“아니면 우측으로 간 녀석들도 우리랑 같은 상황인 거 아니야?”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뭐야, 괜히 긴장했잖아.”

긴장이 풀리자, 학생들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에단의 생각은 학생들과 달랐다.

― 뭔가 이상하구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생각한다면 이 지역에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흔적’도 존재해서는 안 됐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었다.

‘죽은 나무’라는 능력을 얻고, 죽은 마나를 흡수한 에단은 남들보다 밤눈이 밝았다.

하여 얼마 전까지 몬스터가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들이 그의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미세한 발자국, 털, 머리카락, 바위에 새겨진 상흔, 체액.

그런 흔적들이 눈에 밟히고 거슬렸다.

‘찜찜하군.’

에단의 감각은 예민했다. 그리고 예민한 감각은 언제나 얼추 맞았다.

쿵, 쿵.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동굴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만나 메아리치듯 공명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학생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모, 모르겠어…….”

“라이트라도 비춰야 하는 거 아니야?”

“……로만, 어떡하지?”

선두에 서 있던 학생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만을 바라봤다. 로만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너희가 먼저 확인해야 우리가 움직일 거 아니야. 안 그래?”

로만이 고개를 돌려 패거리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희들 여기 놀러 왔어? 아니면 날로 먹으려고 하냐? 우리가 처리해 준다고 하잖아. 그러면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이 다르잖아.”

“뭐라고? 미쳤냐?”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총체적 난국이군.’

권위 의식에 찌든 로만의 모습에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이 문제가 아니네.’

에단이 정면을 응시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갑주가 움직이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경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투구 사이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사특하고 음험한 기운.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마나와 흡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이질적인 기운.

에단이 앞으로 나아갔다.

“빨리 앞으로 안 가?!”

에단은 동급생에게 살벌한 협박을 하고 있는 로만의 뒤통수를 후렸다.

빠악!

“크윽! 어떤 개…….”

로만이 고개를 돌렸지만, 뒤에 있는 사람이 에단인 것을 알아채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했지. 꼬우면 교수하라고.”

에단이 로만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로만의 얼굴에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짜증과 분노로 점철된 얼굴이었다.

‘얘는 아닌가 보군.’

눈앞에 저 살벌한 녀석은 아무래도 로만이 준비해 둔 놈이 아닌 모양이었다.

― ……조심하거라.

‘전 언제나 조심하죠.’

에단이 몸을 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에 가 있어라. 다친다.”

피식 웃은 에단이 앞을 바라봤다. 흐릿하던 녀석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났다.

소름 끼치는 기운을 뿜어내는 묵빛 갑주.

― ……데스 나이트.

페온이 침음을 삼켰다.

‘역시 원작이랑 다르군.’

원작에서 등장한 언데드는 데스 나이트처럼 고위 언데드가 아니었다.

주인공의 양분이 될 만한 적당한 수준의 녀석들.

‘후반에나 등장할 새끼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어. 짜증 나게.’

피부가 저릿했다. 에단의 감은 예리했고, 하여 저 갑옷덩어리가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주의해라. 쉬운 상대가 아니야……. 만일 위급하다면…….

‘설레발놓지 말고 지켜보시죠.’

에단이 웃었다.

그는 강자와의 대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의 싸움은 에단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에단은 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왔다.

카론, 모룬, 벨몬트, 야수화한 휴고, 블랙 오우거, 에밀라.

모두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한 적들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늘 승리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데스 나이트의 힘.

에단은 그 감각이 좋았다.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자살행위를 하는 취미는 없거든.’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결과를 알 수 있는 싸움은 시도하지 않는다. 그건 오만이고 만용이었으니까.

네이드, 첸, 빈센트.

아직 에단이 넘보기에는 과분한 거물들이었다.

에단은 욕심이 많았으나, 후일을 도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정도 급은 아니거든.’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것.

그건 본능의 영역이었다. 에단이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는 손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에단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휘었다.

“준비됐어? 난 준비됐는데.”

― …….

“아, 대답을 기대하고 한 소리는 아니야. 어차피 말도 못 하잖아.”

― …….

죽음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칠흑처럼 검은 검신에 어두운 마나가 넘실거렸다.

“……화났냐?”

쪼다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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