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94화 (94/398)

◈ [94화] 폭풍 전 고요 (2)

‘당장 다음 날이라. 조급한 모양이군.’

그녀가 늘 유지하고 있는 포커페이스.

조만간 레벨린의 가면을 완벽히 부숴 줄 생각이었다. 대화를 끝낸 에단은 돌아섰고, 레벨린은 묘한 눈으로 에밀라를 흘겨봤다.

“에밀라 씨.”

“……네.”

“부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글쎄요? 과거의 에밀라 교수님이었다면 이런 조언도 불필요했겠지만……. 스스로 고민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레벨린이 몸을 돌렸다.

홀로 서 있던 에밀라가 레벨린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의미지?’

그녀답지 않은 조언이었다.

에밀라가 우두커니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단은 기숙사로 돌아와 개인 운동을 시작했다.

상의를 탈의하고, 물구나무서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후욱, 후욱.”

전반적인 신체의 기량이 워낙 높아져 웬만한 운동으로는 별다른 자극이 오지 않았다.

몸을 지탱하던 손바닥의 모양이 점점 바뀌었다.

다섯 손가락, 네 손가락, 세 손가락, 두 손가락, 이윽고 검지 하나.

후욱!

에단이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굽혔다가 일으켰다. 신체를 고르게 유지하는 균형 감각과 코어, 그리고 손가락에 집중하는 집중력과 전신의 협응력.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의식했다.

수차례 반복하던 에단이 반대 손으로 땅을 짚었다.

플란체를 시작으로 고난도 맨몸 운동들을 수행하던 에단이 운동을 끝내고 폴짝 뛰어올라 바르게 섰다.

“후우.”

그는 흥건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에단의 몸은 아직 성장하고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다.

― 많이 좋아졌구나.

페온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에는 에단도 동의했다. 잠재력이 높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한계를 모르고 좋아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운동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게 아쉽군.’

장비만 충분하다면 하고 싶은 운동이 많았다.

바벨, 덤벨, 케틀벨, 로프, 체인.

가문에서는 야장들에게 부탁해 적당한 기구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좁은 공간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 맨몸 운동 위주의 단련을 하고 있었다.

‘뭐, 신체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마법사와 기사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까.

에단도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검도 수련을 해야 하고.’

맨몸의 한계는 분명하다.

익숙하지 않은 공격들과 변칙들로 순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리치와 살상력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상대가 마나를 다룬다면 더더욱.’

마나의 경지.

원작 스토리는 주인공의 히든 피스와 재능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구체화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페온을 통해 나름대로 구체적인 체계를 습득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구분법과 명칭이 다르다고는 하나, 블란테에서 규정한 규칙은 따로 있었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마나 유저의 경지를 나누는 구분법.

‘누가 소설 아니랄까 봐.’

하지만 나누는 방법은 나름대로 구체적이다.

검에 두른 마나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벨 수 있는 금속의 두께.

블란테에서는 그 두 가지로 수준을 판별한다.

경지에 오른 기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판가름할 수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해 나눌 수도 있었다.

― 너의 수준은 잘 쳐 봐야 상급이다.

마나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단에게는 어마어마한 경지였다.

마나를 느끼고 마나 유저로 입문하게 되면 못해도 수년의 수련을 거듭해야 다음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다.

하지만 에단은 평범한 길을 걷지 않았다.

‘죽은 나무.’

죽은 마나라고 불리는 사기(死氣)를 흡수하는 불길한 힘.

왕도를 벗어난 힘을 빌려 에단은 단숨에 엄청난 경지를 도약했다.

죽은 마나만이 아닌, 죽은 생명체의 특성까지 흡수했다.

‘주인공은 수많은 축복과 갖가지 히든 피스들로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했지만.’

에단은 아직 가지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목에 걸린 세계수의 목걸이, 그리고 왼손에 흡수된 타이탄의 장갑. 마지막으로 원작과 다른 룬어 ‘절망’.

‘이게 제일 거슬린단 말이지.’

원래 주인공이 가지게 될 룬어는 ‘희망’이었다.

‘능력도 단순했고.’

빛의 발산, 치유와 마나의 회복, 그리고 사특한 존재의 정화.

맞서야 할 적들을 생각하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사라졌고, 팔에 새겨진 룬어는 ‘절망’이라는 전혀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로 바뀌었다.

‘슬슬 시험해 보긴 해야 하는데.’

절망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불길하고 부정적이었다.

‘레벨린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라진 룬어라…….’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 이 에피소드에서 적의 난이도는 크게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룬어 때문일 테고.’

처음 등장하는 흑막의 세력, 그와 상반되는 주인공의 룬어 희망.

그 힘으로 동료를 구하며 손쉽게 흑막을 저지한다.

하지만 룬어의 단어가 바뀐 상황.

그렇다고 해도, 에단에게는 다른 무기가 존재했다.

죽은 나무.

주인공이 스토리의 중반부를 넘어가서야 얻게 될 힘.

하지만 에단은 조기에 그 힘을 손에 넣었다. 이 능력 또한 언데드와 상극인 힘이었다.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곧 일행이 세계수에 도착할 시간이다. 더욱 지체되면 일이 복잡해질 터.

에단은 머릿속에서 잡념을 지워 냈다.

* * *

다음 날 오전, 갑작스러운 던전 탐사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로 건물 밖에 정렬했다.

“던전 탐사? 원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이 나오나?”

“……그러게. 하지만 뭐 나쁘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지……. 에단 교수님 수업은 더럽게 빡세니까…….”

“왜, 난 그래도 재밌던데?”

“확실히 재미는 있지.”

“그래도 던전 탐사는 또 다르잖아. 진짜 실전이라는 느낌?”

“진짜 실전이니까 그렇지, 멍청아.”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시끌벅적 떠들던 학생들 앞에 에단이 나타났다.

“어제는 잘 쉬었나?”

“네!”

에단이 학생들을 둘러봤다. 딱히 빠진 인원은 없는 것 같았으나,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귀찮게 출석을 불러야 하나? 빠진 인원은 없겠지?”

에단이 말하자, 그때 드레이가 손을 들었다.

“로만이 없습니다.”

“로만?”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에단이 내건 타협안이자 협상 내용.

학장이라는 직위의 반납, 하지만 급진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마크가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한들, 어쨌든 학장의 자리에는 마크가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학장 교체는 혼란만 야기할 뿐이었다. 하여 에단도 충분한 준비를 갖춘 뒤 행동할 생각이었다.

‘설마 벌써 자리를 떴나?’

그런 생각을 하는 때, 로만이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한 로만이 대열에 합류했다. 로만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벌한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보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이상한데.’

하지만 추궁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했다. 에단은 로만에게서 시선을 떼고 학생들을 둘러봤다.

“다들 사전에 고지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겠지?”

“던전 탐사 말인가요?”

“그래.”

그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사가 손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수업 아닌가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알다시피 나는 직원에 불과해서 말이야. 위에서 까라니까 까는 거야. 그러니 불만 있으면 학장한테 따져.”

에단이 내뱉은 말의 속내를 눈치챈 로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개자식이…….’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자신과 아버지를 우롱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리를 빼앗는 외지인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좋아, 우리를 같잖게 본다 그거지?’

로만이 화를 억눌렀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블란테라는 이름이 오늘도 너를 지켜 줄 수 있는지 보자고.’

저 방약무인한 태도도 오늘까지일 테니까.

로만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채비를 갖춘 학생들과 에단이 움직였다.

아카데미의 본질은 결국 전투 가능한 자들의 양성이었다.

현재 대륙은 평화로웠으나, 언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력은 결국 힘이 결정했고, 힘은 곧 강자의 숫자와 직결된다.

뛰어난 기사와 마법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되기 마련이니까.

아카데미의 설립 이유도 결국 그것 때문이다.

학식의 수행, 소양 등은 명분에 불과하다.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시되는 수업은 전투 마법과 검술이었다.

그러다 보니 던전 탐사나 몬스터 토벌은 위험했으나, 배운 것들을 적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실전 경험을 쌓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학생들은 간만의 실전에 긴장했다. 전투복을 착용하고, 날 선 진검을 쥐자 더욱 실감이 났다.

에단을 필두로 학생들이 뒤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이쪽인가?’

사전에 들은 지리와 손에 쥐어진 약도를 통해 탐사를 진행했다. 에단으로서는 익숙지 않은 지리였지만, 이번 던전 탐사에 배정된 교수는 에단 혼자였다.

‘더럽게 노골적이야.’

함정의 냄새가 풍기다 못해 진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꽤나 긴 시간 동안 숲을 헤치고 지나자,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저는 동굴이랑 인연이 깊네요.’

―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구나.

페온이 에단과 같은 감상을 느꼈는지 달갑지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잠시 휴식.”

에단의 말과 함께 학생들이 정렬한 뒤 자리에 앉았다.

행군 같은 이동이 끝나고 휴식이 주어지자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험난한 숲인 탓에 대열을 유지하며 걷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긴장한 상태였기에 피로도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죽겠다. 너는 괜찮아?”

“나도 힘들지.”

율리가 한숨을 내쉬며 리사에게 물었다.

말로는 힘들다고 대답한 리사이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땀 흘린 거 안 보여?”

리사가 이마를 가리켰다. 송골송골 맺힌 작은 땀방울이 보였다.

“……너한테 물은 내가 바보다.”

결국 체념한 율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 체력 괴물에게 공감을 구한 것이 잘못되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구를 말하는 거야?”

율리가 턱짓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로만이 있었다.

“어제 급하게 나갔잖아.”

“아…….”

리사는 일련의 사건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로만이 무슨 일로 교실을 박차고 나갔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실상을 알고 있는 리사는 로만에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하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언급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로만과 리사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치자 로만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지금 쟤가 웃을 상황인가?’

앞으로 닥칠 상황을 알고 있는 리사는 로만의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다.

‘……기분 나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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