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폭풍 전 고요 (1)
피구.
가히 한국 체육 시간의 꽃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스포츠였다.
단순한 룰.
장소와 장비에 구애받지 않는 게임.
적당한 공 하나만 주어지면 어디서든 할 수 있기에, 만사 귀찮은 체육 교사는 늘 피구를 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 중 하나가 바로 피구였다.
‘승부욕.’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본능적인 감정에 충실한 녀석들이지.’
육체와 지능.
양립한 학생들, 그리고 암암리에 매겨진 서열.
나눠진 팀에 공 하나.
승부욕이 불타지 않으면 이상한 환경이다.
예상한 것처럼 연무장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에밀라는 문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괴성과 기합 소리에 놀랐기 때문이다.
“……대체 학생들에게 뭘 시키신 거죠?”
“말했잖아. 보면 알아.”
에단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에밀라는 한숨을 내쉬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연무장의 문이 열리자, 후끈한 열기가 먼저 느껴졌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공을 집어 던진 학생 하나.
학생의 눈에는 살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죽어!”
“개소리를! 너나 뒈져! 이 근육 머저리들!”
공을 받은 지식파 학생이 공중에 피구 공을 띄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순하고 빠른 영창.
“마나여, 내 의지에 응해라! 매직 볼!”
우웅!
공중에 떠 있던 피구공이 마나에 진동했다. 마나에 둘러싸인 공이 공성 병기처럼 쏘아졌다.
콰앙!
“이런 미친!”
무투파 학생이 몸을 날렸다. 공이 지면을 부술 것처럼 바닥에 튕겼다.
“쳇!”
공을 집어 던진 지식파 학생 하나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저 자식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거야……?”
“무슨 헛소리야? 뇌도 근육으로 차 버렸냐? 그 정도로는 안 죽어.”
“그래……. 죽지는 않겠지…….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죽는 건 아니니까. 그치?”
“잘 아네.”
“저 자식이!”
에단이 예상한 대로 분위기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거칠게 공을 주고받았다.
형평성도 괜찮았다. 무투파, 즉 육체적 능력이 우월한 학생들은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이 뛰어나 게임에서 전반적인 우위를 가져갔다.
하지만 마법파, 즉 지식파들은 벌써 포지션을 나누고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무투파를 압도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지.’
협동심과 승부욕, 그리고 팀에게 느끼는 동료애.
‘그것도 그거고, 사실 귀찮은 게 제일 크지.’
교수 노릇에 진심인 것도 아니고, 에단은 구태여 매 수업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밀라는 입을 떡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재밌어 보이지 않아?”
“재미요? 재미보다는 위험해 보이는데…….”
에밀라의 반응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위험하기는. 위험이야 목검 들고 싸우는 게 더 위험하지.”
“…….”
에단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다.
에단이 공수해 온 피구공 자체는 위험한 물건이 아니었다. 설령 과열된 분위기 탓에 위험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대련에 비해서는 위험도가 현저히 낮았다.
‘적당히 위험해야 재미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한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자, 학생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 교수님?”
그와 동시에 이글거리며 눈빛을 불태우던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이 룰은 너무 비겁합니다!”
“맞아요! 반장, 너도 말 좀 해 봐!”
“아니 나는…….”
학생들이 앞다투어 입을 벌리자, 순식간에 귀가 아플 정도로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 입 안 다물어?”
“…….”
에단이 인상을 구기며 읊조리자,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공평이 어디 있어? 그건 내가 정해. 불만 있어? 그럼 너희가 교수하든가.”
에단의 거친 언행에 반박하는 학생은 없었다. 이미 요 며칠 사이에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를 깨달은 탓이었다.
리사가 한껏 표정을 구기며 에단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에밀라 교수님은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죠?”
리사의 물음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어? 그러게 에밀라 교수님은 무슨 일이에요?”
여러 학생들이 묻자, 에밀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에밀라의 어깨를 밀었다.
“너희들,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당연히 피구 한 게임 하려고 온 거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지만 그녀는 거부 의사를 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엄청났기 때문이다.
“와, 진짜요?”
“교수님! 저희 팀으로 오세요!”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양심 없냐?”
“야, 솔직히 너희들한테 유리한 룰이잖아. 에밀라 교수님이 누구야, 검술 담당이시지? 그러면 우리 팀에 오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옳소!”
“이 자식들이 단체로 뭘 잘못 처먹었나!”
거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과열된 분위기 속에 에밀라는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었고, 에단도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쩔 수 없지.’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다들 조용. 확실히 에밀라 교수만 참가하면 형평성에 어긋나겠지?”
에단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나도 참가해 주지.”
오랜만에 한번 즐겨 볼까?
* * *
“……야.”
“……어.”
“내가 뭘 본 거지?”
“나한테 묻는다고 아냐?”
“……같은 사람이 맞을까?”
“……나한테 묻는다고 내가 아냐고.”
에밀라와 에단의 피구 대결.
그 대결은 두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경이롭고, 또 격렬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하던 피구도 살벌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경기와 비교하면 애교일 정도였다.
“……마나 안 쓴 거 맞지?”
“응……. 너도 봤잖아.”
“내 눈이 안 믿겨서 그렇지…….”
“……그러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학생들.
에단과 에밀라의 페이스에 따라가기 급급했을 뿐인데 어느새 모두 바닥에서 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안 그럴 거라더니…….”
리사가 마지막으로 처절한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 * *
에단이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막상 하니까 할 만하지?”
“확실히 다방면에서 운동은 되는 것 같습니다. 순발력과 동체 시력 등이 중요한 훈련이군요.”
“그래, 열심히 훈련하라고.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잖아.”
빠득―
“초심자 상대로 너무 전력을 쓴 것 아닙니까?”
이를 악문 에밀라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전력이래? 나는 가진 힘의 반도 쓰지 않았어.”
“웃기지 마십시오! 절반도 안 쓴 사람이 공을 던질 때 ‘뒈져!’ 같은 기합을 씁니까?”
“어. 난 쓰는데?”
유치한 대화를 하면서 에단이 연무장을 나섰다.
“아, 반장.”
에단이 뒤를 돌아보며 반장을 호출하자, 드레이가 시체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당장에라도 얼굴이 흘러내릴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여기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드레이의 몸도 축 늘어졌다.
에단이 연무장 밖을 나서자, 이번에는 에밀라가 아닌 더욱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은 잘 끝냈습니까?”
레벨린이었다.
특유의 속내를 알기 힘든 미소를 띤 채 에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눈웃음 사이로 서늘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에밀라를 흘겨봤다.
시선을 느낀 에밀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에밀라 씨도 계셨군요?”
“……네.”
에밀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더니 앞으로 나섰다.
“여기는 무슨 일일까? 수업에 참견이라도 하려고?”
“참견이라니, 그럴 리가요. 단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던 레벨린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저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죠?”
많은 의도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 안에는 레벨린 개인의 궁금증이 가장 크게 자리해 있었다.
레벨린이 에단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봤다.
“내가 왜 너를 적대하지?”
하지만 에단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적대한 적 없어.”
“그럴 리가요. 지금까지의 행동 모두가 저를 노리고 한 것 아닙니까?”
“글쎄,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거 아닌가? 그렇다면 반대로 묻지.”
에단이 한 발짝 다가갔다.
에단의 얼굴이 레벨린과 가까워졌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뭔가 찔리는 게 있을 텐데? 감히 블란테를 상대로 수작질을 한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도 잘 모르겠거든. 너를 적대하는 이유? 나는 딱히 너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원래 내 성격이 그런 거지.”
블란테의 망나니.
에단은 그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았다. 망나니 취급을 받기에 그 취급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뭐, 개인적으로 적대감이 있는 건 아니니까 틀린 말도 아니지.’
단순히 에단의 목적과 필요 때문에 적대적인 포지션을 취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후, 레벨린의 가식적인 미소에는 미세한 금이 그어졌다. 그녀는 볼을 꿈틀거리며 서늘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좋습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잘 생각했네.”
“수업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방금은 참견 안 하겠다며.”
“참견은 아닙니다. 아카데미의 방침이자 규정이죠. 정기적인 던전 탐사가 있습니다.”
‘왔구나.’
에단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시기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슬슬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했다.
던전 탐사.
레벨린이 말하는 건 일반적인 던전 탐사가 아니었다.
바로 학생들의 실전 경험을 높여 주고 위기 대처 능력을 키우기 위한 예행연습이자 훈련이었다.
사전에 준비된 던전과 몬스터, 그리고 보상.
전형적인 소설 클리셰였다.
원작에서는 예상치 못한 몬스터의 등장과 담당 교수의 실종으로 스토리가 흘러갔다.
악재가 겹치게 되었고, 주인공이 나서 상황을 해결한 뒤 보상을 얻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이걸 네가 말하니까 더 구리네.’
원래라면 레벨린은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 흑막이었다.
자연스레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아랫사람들을 즐겨 이용했다.
에밀라, 마크, 그 밖의 교직원들.
손과 입이 되어 줄 사람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직접, 그것도 구린내를 풍기면서 직접 전달한다라…….
“싫다면?”
“예정된 수업입니다. 에단 교수님이 거부해도, 다른 교수님이 위탁을 받겠죠. 안 그런가요? 에밀라 씨?”
“……맞습니다.”
에밀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레벨린을 바라봤다.
레벨린은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에단을 마주 봤다.
“뭐, 좋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애초에 이걸 기다렸으니까.
― ……조심하거라.
페온이 구린 냄새를 맡았는지, 조용히 있다가 말을 더했다.
에단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설마 쫄리십니까?’
― 괘씸한 놈.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냐?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제 곁에는 페온 님이 계신데.’
― 큼, 크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에단은 조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위험이 닥쳐오면 도망치는 게 아닌, 들이박고 보는 성격이니까.
“언제 가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