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의심의 씨앗 (2)
황급하게 학장실로 뛰어간 로만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학장실 안에는 개인 물품들을 정리하고 있는 마크가 있었다.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로만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마크는 아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짐을 옮기고 있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로만이 다가가 마크의 손을 붙잡았다.
마크가 시선을 돌리자, 빛바랜 그의 눈동자에는 로만이 비쳤다.
“로만……?”
“맞습니다, 접니다! 학장님의 아들 로만이요. 이게 대체……!”
초췌한 마크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물들었다.
“로만,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마크가 로만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만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버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크를 바라보는 로만.
빠득.
마크는 이를 갈며 로만을 노려봤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 녀석에게 차마 손찌검을 할 수는 없었다.
“하아……. 너 때문에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주세요!”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지? 재산까지 털어서 도시로 갔더구나. 거기서 또 일을 벌였고.”
“그걸 어떻게…….”
“이유가 뭐지? 왜 그런 짓을 벌인 게야?!”
천둥소리 같은 마크의 호통에 로만이 몸을 떨었다.
“……그 건방진 평민 놈이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 위치를 모르는 놈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 머저리 같은…… 하, 됐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밀려오는 현기증에 마크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둔한 아들놈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내 친히 설명해 주마. 주제 파악을 시킨다고? 좋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 대상이 잘못됐다.”
“그 평민 교수 말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하찮고 천박한 녀석이 왜 신성한 아카데미에…….”
“평민? 허,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도 그 편협한 사고를 고치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의심을 할 줄 모르는 게냐?”
힘껏 움켜쥔 마크의 주먹은 붉게 물들었다.
“……그 교수는 평민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디 촌구석의 몰락 귀족이라도 됩니까? 하지만 그까짓 작위뿐인 신분은…….”
“허, 몰락 귀족이라고 멸시하는 것이냐? 그것참, 웃기는구나. 변방에 있는 작위뿐인 귀족이라면 흡사 우리를 말하는 것 같지 않으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버지와 저는 아카데미에…….”
“그깟 아카데미, 허울뿐인 울타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느냐? 그렇기에 조심히 몸을 사렸어야 했거늘……. 네 녀석 때문에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
계속된 질타에 분개한 로만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알 수 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해 달란 말입니다!”
“오냐, 그 설명 지금 해 주도록 하마. 주제를 파악 못 한 건 그놈이 아니라 네놈이다. 에단 교수의 가문은 고작 변두리의 몰락 귀족이 아닌, 국경을 호령하는 사자다.”
“사자……? 설마…….”
로만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변방의 사자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브, 블란테?”
“이제야 네놈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이해가 된 거냐?”
“그, 그럴 리가! 그 천박한 놈이 어찌!”
짜악!
마크는 아직도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로만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라!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로만이 멍한 얼굴로 뺨을 붙잡고 있었다. 마크가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얼굴로 로만을 바라봤다.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만일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곧바로 군대를 출전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도발 행위였다.”
“……어째서 가문을 숨긴 거죠?”
“나도 모른다. 어째서 가문을 숨겼는지…….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군.”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다가왔는지.
그랬다면 이해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카데미를 집어삼킬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허탈함이 더해졌다. 학장이라는 직책에 느꼈던 자부심이 민망했다.
자신은 그저 쓰기 좋은 장기 말에 불과했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으니까.
“그, 그럼 저희는 이제…….”
로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 학장실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또각또각.
단정한 구두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레벨린이었다.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죠?”
마크의 말투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미 마크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였다.
“표정 푸시죠. 기회를 드리려고 찾아온 거니까요.”
“기회? 지금 기회라고 하셨습니까? 이 상황에서 어떤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이시죠? 제게 당신의 개인 시종 노릇이라도 하라는 소리인가요?”
마크가 비꼬는 말투로 레벨린에게 말했지만, 레벨린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요. 시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기회는, 이곳 아카데미의 학장이라는 신분으로 남아 있게 해 드린다는 말이었습니다.”
마크의 눈은 의심으로 가늘어졌지만, 옆에서 대화를 듣던 로만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맴돌았다.
로만은 레벨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과 맥락을 짚어 낼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는 잡아야 해.’
로만은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문으로 돌아가 별 볼 일 없는 삶을 영위하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권력의 달콤함을 맛봤다. 권력이란 한번 맛을 본 이상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함이다.
“아버지!”
로만이 크게 소리치자, 마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들이라도 이럴 때만큼은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마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결국 질문했다.
“어떤 기회를 주신다는 말이죠?”
변변찮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는 그 또한 매한가지였다.
레벨린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별것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것만 해 주면 돼요.”
이전처럼.
레벨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쟤는 뭐 갑자기 나가냐. 버릇없게. 아, 급하게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건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에단이 교탁에 손을 걸친 뒤 학생들을 둘러봤다.
“다들 표정이 봐줄 만하네.”
“……정말 그래 보여요?”
“응, 그래. 다들 죽어 가는 것 같은데.”
각양각색의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래, 말해 봐.”
“……오늘도 이전 같은 수업인가요?”
순간 퍼지는 정적,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왜? 또 하고 싶어?”
“아니요!”
에단의 물음에 학생들이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여 줬다.
“걱정 마. 오늘은 안 할 거니까. 나도 또 그 짓 하기 싫어.”
귀찮거든.
에단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분홍색 공이었다.
에단이 공을 바닥에 튕겼다.
“오늘은 팀전이다.”
에단의 말에 학생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었다.
“설명은 밖에 나가서 해 주지. 복잡한 룰은 아니니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거야.”
씨익 웃으며 내뱉는 말에 학생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 맞아?”
리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 * *
이제 익숙해진 연무장.
에단이 단상에 올라 공을 들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룰은 간단했고, 전반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어 이해 못 한 인원은 없어 보였다.
“내가 반장에게 받은 성적표다. 대충 형평성 있게 팀을 구성했으니 불만은 가지지 말도록.”
에단의 호명에 학생들이 갈라졌다.
검을 주로 수련하는 무투파, 마법과 그밖의 학식을 수행하는 지식파들로 나눠졌다.
“단순한 피구라면 한쪽이 너무 유리하니까 제한을 두마. 기사를 진로로 정한 녀석은 마나를 일절 사용하지 못한다. 반면 마법이나 학술을 배우는 이들은 ‘적절히’ 구사해도 된다.”
그때 안경을 쓴 여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 적절히가 정확히 어떤 수준이죠?”
“뭐, 대충 이 정도면 안 뒈지겠다, 정도로 조절하라고.”
씨익.
에단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여학생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뭐, 뭔가 위험할 거 같은데?”
“위험하기는 뭐가? 체력 검증 때 그렇게 우리를 개무시하더니 잘 걸렸다.”
지식파 학생들이 독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무투파를 노려봤다. 무투파에 속한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자, 슬슬 시작해.”
한마디를 내뱉은 에단은 학생들을 방치한 뒤 훌쩍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래서 피구가 편하다니까.’
대충 공만 던져 주면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논다.
어지간한 수업보다 피구를 시키는 것이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연무장 밖으로 나온 에단은 앞에 서 있는 에밀라를 바라봤다.
“……너 많이 한가하냐?”
에단이 이제 한심함을 넘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에밀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놀러 오라고 한 것은 당신 아닙니까?”
“내가 쉬는 시간에 놀러 오라고 했지, 언제 아무 때나 오랬어?”
“……사실 최근에 수업을 배정받지 못했습니다.”
에밀라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단은 대충 예측할 수 있었다.
‘슬슬 에밀라에 대해 눈치를 챘나 보군. 그런데 왜 나한테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거지?’
아무리 에단이 수업의 자율을 보장받았다고 한들, 레벨린 정도라면 뒤에서 여러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움직인 것은 학생 측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물고기.
로만 그 녀석 덕에 쉽게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명분을 바탕으로 아카데미까지 빼앗는다면 그녀에게는 정말 남은 것이 얼마 없게 된다.
‘이제 ‘그때’가 다가오기도 하고.’
아카데미에서 얻는 두 번째 히든 피스.
사실 이건 에단이 탐내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검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에단이 아닌, 원작 주인공이 반드시 얻어야 할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행방불명된 지금, 에단이라도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세계수를 치유하는 데 성검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성검을 얻을 에피소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 문제야…….’
세계수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왔다. 사실 에단은 이렇게 늦장을 부리고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도발을 하고 있으니 슬슬 입질이 오겠지.’
에단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든 피스인 성검을 얻게 되면 곧바로 세계수로 떠날 생각이었다.
고민에 잠긴 채 걷던 에단이 옆을 바라봤다. 옆에는 에밀라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너 많이 한가하지?”
“…….”
“구경이나 해.”
에단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무장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시끌벅적한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호기심이 들었는지 연무장을 힐긋 바라봤다.
“그럼…….”
에밀라가 무언가 홀린 듯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