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오만의 대가 (8)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건가.’
능구렁이 같은 녀석.
빠득.
레벨린은 업무실에 홀로 앉아 이를 갈았다.
이건 협상이 아닌 통보였다. 그것도 일방적인 통보 조치.
‘나를 고립시키려고 하는군.’
이전부터 느껴졌다. 명백한 적의와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머저리일 터.
어째서인지 에단은 레벨린을 적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에단은 의도적으로 레벨린의 팔다리를 자르고 있었다.
‘시작은 에밀라부터.’
에밀라를 에단에게 보낸 이후부터 그녀의 태도가 달라졌다.
‘암시가 풀린 건가? 어째서?’
레벨린이 에밀라에게 건 암시는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레벨린을 이 위치까지 올려 주었다.
‘죽은 마나.’
하사받은 힘과 권능, 레벨린은 이 힘들로 수많은 것들을 일궈 냈다.
그 암시도 같은 맥락이었다. 씌워 둔 검은 마나, 큰 계기가 없다면 풀릴 이유가 없는 세뇌였다.
‘헨리도 그렇고…….’
헨리는 다루기 쉬운 직원이었다.
처음부터 헨리가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유인했다.
예상대로 헨리는 레벨린의 손 위에서 춤을 췄고, 헨리의 의지는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헨리는 심증뿐이니까. 하지만…….’
헨리의 정체가 과연 레벨린이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수의 시험에도 별다른 반응이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계획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헨리가 특별한 존재가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절대적으로 필요하진 않았다.
‘뿌려 둔 도적들도 자취를 감췄고.’
심지어 아카데미까지 노리고 있었다.
‘대체 나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지?’
과도하고 노골적인 적대.
레벨린의 기억상 에단에게 원한을 살 만한 기억은 없었다.
‘이 전의 조우에서는 오히려 우호적이었지.’
블란테의 망나니로서 모두에게 외면을 받을 때, 레벨린은 오히려 에단에게 호감을 샀다.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을 텐데.’
욕망에 충실하고 단순한 인간이었다.
물욕이 강하고, 여자를 탐하며, 권력을 원하고, 대우받기 좋아하는.
정말 추악한 인간이었다. 레벨린은 추악하고 욕심 많은 인간을 좋아했다.
‘단순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에단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속을 알지 못했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적대한다는 사실 하나.
심지어 그 적대를 숨기지 않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수정구를 통한 대면에서부터 드러낸 강한 적의.
‘……상관없어.’
아카데미를 빼앗겨?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다.
계획이 진행되면서 그분이 생각보다 일찍 나오게 됐다.
‘제물은 충분해.’
명분만 만들면 그만이다. 때마침 시기도 적절하다.
적당한 던전이 발견된 것이다. 그분이 나선다면 던전을 종속시키는 것은 단순한 일이었다.
‘……녀석들도 같이 처리하면 되겠군.’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하지 않았다.
* * *
“아무나 들어오도록.”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의 목소리.
밖에 있던 수행인 하나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첸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첸 단장님은 지금 훈련 중에 있습니다.”
“지금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해 낸 수행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빈센트는 첸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같은 검을 수행하는 기사로서 수련 시간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훈련을 중단시키면서까지 명한 호출이다. 필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 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수행인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첸이 찾아왔다. 훈련 도중 급하게 찾아온 터라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훈련 중에 미안하군.”
“저는 기사입니다. 주군께서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빈센트와 오랜 기간을 함께한 첸은 빈센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빈센트는 지금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일이 벌어지긴 하겠군.’
평소 빈센트는 화를 자주 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번 분노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고는 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추적하는 사자를 부르도록.”
“……그 녀석들을 말입니까?”
첸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빈센트가 무언가 일을 벌이리라 예상했지만, 추적하는 사자를 호출할 정도의 일일 줄은 몰랐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추적하는 사자는 블란테에서도 손속이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실력은 확실했지만 그만큼 확고한 결단 없이 소집해서는 안 되는 녀석들이었다.
‘끝을 보는 놈들이지.’
그들에게 명예나 자비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명칭 그대로 적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물고 늘어지는 게 바로 추적하는 사자들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잠잠히 있었던 것 같더군.”
“…….”
“아무리 블란테가 숨을 죽이고 있다고 한들 이런 취급을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그게 무슨…….”
“습격이 있었다더군.”
뒤이어 빈센트는 얘기를 간략하게 전달했고, 그걸 들은 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지금 호출하겠습니다.”
이런 일에는 첸이 이끄는 흑사자 기사단보다 추적하는 사자가 제격이었다.
그들의 잔학무도함은 훌륭한 무기이자 경고였으니까.
* * *
“녀석들이 늦군.”
밝은 달의 단장은 와인을 홀짝이면서 창문을 바라봤다.
달이 밝았다.
밝은 달이라는 전설적인 어쌔신 길드를 이끄는 만큼, 그는 달을 볼 때면 많은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놈이 사라졌을 때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지.’
길드 이름의 바탕이 된 ‘밝은 달’이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어쌔신.
곁에서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자는 괴물이었다.
그야말로 어쌔신의 전설.
애초에 밝은 달이라는 이름도, 아무리 밝은 달이 떠 주변이 환해도 결코 임무를 실패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붙었다.
암살 대상이 그 누구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그 모습에는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괴물 놈에게도 마지막 임무는 만용이었지.’
블란테 가주의 암살.
그때나 지금이나 황당한 임무였다.
의뢰자가 제시한 착수금은 역대급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블란테였고, 실패가 확실시되는 임무였다.
누가 봐도 미친 의뢰.
의뢰를 수락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수락했지. 큭큭큭.’
만용이었는지, 혹은 그저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었다.
밝은 달이 그 임무를 수락하자, 많은 말이 나왔다.
― 가능할 리가 없어.
― 이건 그냥 자살행위야.
― 밝은 달의 전설도 끝이 나겠군…….
― 제정신인 건가?
― ……그래도 밝은 달이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미쳤어? 상대가 블란테야. 전쟁의 악마이자 흑사자의 왕인데 그놈을 어떻게 죽여?
― 그래도 지금까지 밝은 달의 업적을 생각해 봐.
― 아무리 그래도…….
― 나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 나도. 아무리 흑사자라고 해도 목에 칼 하나 안 박히겠어?
― ……그렇게 말하니까 또 일리가 있군.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신이라 칭송받는 블란테의 가주를 상대로 ‘가능성이 있다’라는 평을 받는 어쌔신은 밝은 달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날 밝은 달은 종적을 감췄지.’
암살에 나선 그날 이후로 밝은 달은 종적을 감췄다.
‘무서워서 잠적했다, 도망갔다’ 등 많은 말이 나왔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었다.’
‘실패했다.’
‘밝은 달도 어쩔 수 없구나.’
전설의 어쌔신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
그 임무를 끝으로 밝은 달의 전설은 막을 내렸다.
‘멍청한 녀석.’
결국 밝은 달이 사라지고, 자신은 밝은 달이 일궈 낸 모든 것을 독식하는 데에 성공했다.
‘실력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결국에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밝은 달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자, 세력을 일궈 내기가 정말 수월했다.
‘밝은 달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니까 보수도 크고 말이야.’
어차피 일은 밑에 있는 애들이 도맡아 한다.
다루기 쉽고 멍청한 녀석들이지만 실력은 확실했기에 임무에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너무 위험한 의뢰는 적당히 거르고 있으니까.’
실패는 리스크가 컸다. 밝은 달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나는 건 너무나도 큰 손해였다.
‘이번 임무는 정말 꿀 같단 말이야.’
평민이 대상이라니.
이 정도 수준의 의뢰면 어쌔신 길드까지 올 게 아닌, 시정잡배나 도적단들도 옳다구나 하고 받을 수준의 의뢰였다.
그런데 그런 단순하고 간단한 임무에 거금의 착수금을 선뜻 던졌다.
이상한 의뢰는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별거 아닌 일이어도 확실한 처리를 원하는 졸부들이 간혹 있기에 그는 착수금을 그대로 받았다.
‘안 받으면 병신이지.’
거액을 가볍게 넘기는 것을 보아하니, 졸부 상인이거나 알부자 귀족인 것 같았다.
‘돈 많은 녀석들 손에 잘못 걸렸군. 큭큭.’
가끔 이런 노다지 같은 의뢰가 들어오고는 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녀석들 또 일 끝내고 놀고 있나 보군.’
분명 술집에서 여자나 끼고 놀고 있겠지.
난이도가 높은 임무가 아닌 만큼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밝은 달의 단장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였다.
한가로운 여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그 여유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콰광!
강렬한 파공성.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지?”
밝은 달 단장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 아무도 없나?!”
단장이 사람을 불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수하가 들어왔다.
“다, 단장님……!”
쐐애액!
퍽!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이 수하의 머리를 관통했다.
수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자리에 엎어졌다. 눈을 감지 못한 수하의 얼굴은 아직도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이처럼 보였다.
“이, 무슨……! 감히 누가 우리를 습격한 거야?!”
이제야 흘러가는 사태를 파악한 단장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하지만 일선에서 물러선 지 오랜 시간이 흐른지라 단장의 단검은 초라하기만 했다.
밝은 달빛이 창문을 지나 단장을 비추고 있었다. 단장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밖은 밝았으나, 문 너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두웠다.
깊은 심연과 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밝은 달 단장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단장의 고요한 외침에 어둠 너머에서 짐승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큭큭큭, 알다마다. 도시에 숨어 사는 쥐새끼들 아니신가?”
사람 같지 않은 목소리.
그리고 풍겨 오는 누린내.
밝은 달의 단장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자, 괴물이다.
크르르.
마치 웃음소리 같은 으르렁거림.
그들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흑색의 가죽 갑옷과 그 위를 감싸고 있는 투박한 사슬.
사슬은 피로 뒤덮였고,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허리춤에는 보기에도 흉악한 수많은 무기가 걸려 있었고, 한 손에는 역수로 쥔 검이 들려 있었다.
휘어 있는 한 손 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찾았다.”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