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89화 (89/398)

◈ [89화] 오만의 대가 (7)

허탈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대답.

하지만 그렇기에 에밀라는 오히려 후련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만약 노력을 들먹이거나, 의지력을 말했다면 더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한 대답.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납득은 하였다.

“……그렇군요.”

허탈한 듯 보이면서도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에밀라가 웃자,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네.”

에단이 에밀라를 내려다봤다.

에밀라의 표정은 이전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넌 어디에 붙을 거지?”

그녀의 대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의외네? 주인님처럼 따르던 레벨린을 택할 줄 알았는데.”

원작에서는 그만큼 그녀의 고뇌가 깊었고, 선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에밀라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에단을 쏘아봤다.

“지금 비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왜 날 믿고 택했지? 이번에는 속는 걸 수도 있잖아?”

에단의 물음에 가만히 생각하던 에밀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더럽게 세니까요.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나요?”

에밀라의 대답에 에단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 충분해.”

그녀가 한 말을 통틀어 봐도 가장 시원한 답변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에단은 곧바로 레벨린의 개인 업무실을 찾아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연 에단은 휘파람을 불며 건들건들 레벨린에게 다가갔다.

“전부터 느꼈는데 말이야. 학장도 아닌 주제에 개인 업무실은 과분한 거 아니야?”

레벨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뜸 찾아와서 트집을 잡는 겁니까?”

“대뜸은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지.”

“할 말? 무엇이죠?”

레벨린의 물음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동료 교사가 나를 시해하려고 하더라고.”

“……설마 크러쉬 말씀인가요?”

“오, 알고 있나 보네?”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으니까요. 어찌, 파면하면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쉽게 대답이 나왔네? 너무 인정머리가 없는 거 아니야?”

“그걸 원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 아닙니까?”

“사실 크러쉬는 별로 상관없어. 주범은 따로 있거든.”

“주범? 설마…….”

레벨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왜, 누구 같은데?”

“아닐 겁니다.”

“걔 소문은 안 들렸어? 갑질이 심하던데.”

빠득.

레벨린은 이를 갈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죠?”

“일단 학장 불러. 즐거운 삼자대면을 시작하자고.”

* * *

갑작스러운 레벨린의 호출에 학장 마크는 투덜거리며 레벨린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내가 상급자 아닌가? 이렇게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 거야?’

불만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레벨린에게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마크는 주제를 아는 자였고, 그렇기에 지금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대부분의 전달 사항은 대리인이나 수정구를 통해 전달했다. 레벨린이 직접 호출하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다.

마크가 부랴부랴 레벨린의 업무실에 도착했다.

“크흠.”

업무실 앞에 선 마크가 헛기침과 함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마크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똑똑.

“마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셔도 됩니다.”

레벨린의 대답과 함께 마크가 문고리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곳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에단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마크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마크를 향해 에단이 손짓했다.

“뭐 해? 일로 오지 않고.”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크는 주제를 알고 있는 소시민이었다.

눈치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바로 마크였다.

마크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마크의 얼굴은 불안감에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맴돌았다. 마크는 이 정적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다지 좋지 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책망받고 있다는 건 알아차렸다.

하지만 원인이 짚이지 않았다. 마크가 눈알을 굴리다가 레벨린을 힐긋 바라봤다.

‘제기랄.’

마주친 레벨린의 시선이 싸늘했다. 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여기에 부르신 이유가 혹시?”

마크가 입을 열자, 에단이 얼씨구나 하고 마크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이봐, 학장.”

“……네, 에단 씨.”

“학장은 잘못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이 있더라고.”

“무슨 말 말입니까……?”

“자식의 죄는 부모가 짊어진다고.”

“……설마.”

“당신 아들이 상큼한 짓을 벌였더라고.”

마크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충격이 가득한 얼굴의 마크는 떨리는 입을 벌리며 물었다.

“호, 혹시 제 아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궁금해?”

“……무엇인지는 모르나 제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들놈도 훈계하겠습니다.”

“…….”

에단이 마크를 바라봤다.

떨리는 동공으로 에단의 눈을 마주 보던 마크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에단이 레벨린을 바라봤다. 레벨린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다 말한다?”

“제 잘못은 아니니까요.”

“하, 여기서 이렇게 꼬리를 자른다고? 좋아.”

“……대체 제 아들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당신 아들이 블란테를 적으로 돌렸어.”

마크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턱이 빠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체 로만이 왜……?”

“좀 귀여운 짓을 벌였더라고. 나름대로 괜찮은 어쌔신들을 구했던데?”

“어, 어쌔신?”

“어. 의뢰 대상도 참 넓어. 내 주변 사람들을 납치, 감금, 살해. 아, 내 주변이 누구겠어? 다 가문 사람들이지.”

에단의 말을 들은 마크가 크게 휘청했다.

우당탕.

의자가 엎어지고 마크가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자, 잘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부디 목숨만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마크를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목숨을 구걸해? 누가 죽인대?”

에단의 말에 마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 말은…….”

“나는 너한테 손 안 댈 거야. 귀찮게 뭐 하러 그래? 가문의 기사단이 몰려올 텐데. 블란테를 모욕하고 겁박한 책임을 물으러.”

“아아…….”

마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끝났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이번에 아들이 저지른 실수는 무마할 수가 없을 정도로 컸다.

‘미리 언질을 했어야 했어.’

아들의 심성이 착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별달리 훈계하지 않았다. 귀족의 세계에서 착하고 유악한 심성은 약점을 잡히기 좋았다.

오히려 적당히 이기적이고 오만한 성정은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머저리 같은 녀석이…….’

하지만 이번에는 그 표적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버렸다.

사슴이나 잡으라고 쥐여 준 활로 사자 무리를 겨눴다.

돌이키기에는 늦어 버렸다. 명분은 상대에게 있고, 곧 블란테의 정규 기사단이 마크와 로만의 죄를 묻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블란테는 원한을 잊지 않을 테니까.

마크 같은 평범한 귀족 가문은 대응할 수조차 없었다.

마크가 레벨린을 바라봤지만, 그녀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레벨린은 마크라는 장기 말을 망설임 없이 도려냈다.

‘나는 버려졌구나.’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이 치솟았다.

지금껏 충실한 개가 되어 보여 준 충성심은 의미를 잃었다.

마크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에게 물었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물음이었다.

“누가 너를 잡아먹는대?”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들어 봐. 아직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게 무슨…….”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여기로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 말이 사실이었다.

에단이 가문에 말을 전했다면 벌써 기사단이 출발했을 테고, 그랬다면 귀찮게 마크를 호출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마크의 눈에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레벨린이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그렇다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좋아, 살고 싶나 보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놈의 퇴학을 원하시면 지금 바로…….”

“아니, 아니, 그 녀석은 퇴학시키지 않아도 돼. 걔가 뭘 알겠어.”

마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방금도 말했잖아? 책임은 아버지가 져야 한다고. 그러니 학장직 내려놓자.”

“……!”

방금 에단이 내뱉은 말에 마크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나도 가문 측에 뭔가 할 말이 필요할 거 아니야.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 가문에서는 분명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하, 하지만…….”

방금 뭐든지 하겠다고 말한 마크였으나,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장이라는 자리는 마크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크의 가문은 보잘것없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마크는 빠르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마크가 레벨린을 바라봤지만, 레벨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 사람도 이 제안은 예상하지 못했구나.’

명목상 학장의 직위는 마크가 맡고 있었지만, 마크는 레벨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크가 학장직을 내려놓고 블란테 측의 사람이 학장의 직위를 수행한다면, 레벨린의 팔다리는 모두 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블란테가 레벨린 따위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 사람도 당황이라는 것을 하는구나.’

늘 사람 머리 위에서 남을 조종하는 데 도가 튼 이가 바로 레벨린이었다.

레벨린의 뒤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던 마크로서는 그녀를 전능하다고까지 여겼다.

마크에게 있어 레벨린의 당황하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결단을 할 수 있었다.

마크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레벨린의 눈이 마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조금 기다리세요.’

싫습니다.

당신이 저를 먼저 버리지 않았습니까?

마크가 레벨린에게 충의를 보여 줄 이유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크의 입이 열렸다.

“학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마크!”

레벨린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단은 레벨린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저와 아들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것뿐일까. 학장직에서는 물러나도 일선에서는 일할 수 있을 게 해 줄게.”

부학장이니 뭐니 많잖아?

시킬 거 하나쯤은 있겠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에단이 고개를 숙여 마크의 귀에 속삭였다.

“어, 그게 쟤를 엿 먹이기 수월할 것 같거든.”

레벨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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