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오만의 대가 (6)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
페온은 유흥거리를 지켜보듯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 어찌할 거냐?
‘글쎄요?’
딱히 별생각 없었다.
수틀리면 가족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만 아닌가. 설마 가족 사이를 스캔들로 의심할 리도 없을 테고.
‘그건 그렇고, 쟤는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거지?’
딱히 찾아올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에밀라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오해 살 만한 그런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니까요.”
에밀라의 말을 듣던 에단은 기가 찼다.
‘그런 의도가 뭔데?’
도대체 무슨 의도가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리사가 에단을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문 연다?’
‘자, 잠깐……!’
이 대치가 재밌긴 했지만, 지속해 가는 건 귀찮았다.
리사는 급하게 말리려 했지만, 에단의 손이 더 빨랐다. 결국 리사는 결단을 해야 했다.
휘릭!
리사가 침대 위에 올라가서 이불을 뒤집어썼고,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역시나 에밀라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에밀라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수업에 관해서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니까요.”
“수업? 너랑 내가 수업에 관해서 나눌 얘기가 있나?”
“비록 분야는 다르나 서로 교육 방침을 보완하여…….”
“네가 생각해도 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건 알고 있지?”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에밀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진짜 수업 때문에…….”
“네가 정말 내 수업을 참견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고 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이미 네 윗사람과도 얘기가 끝난 일을 가지고 네가 뭔데 왈가왈부하고 있는 거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이 쏘아붙이자, 에밀라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에밀라를 바라봤다.
“한 번 더 묻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야? 그것도 남자가 사용하는 층에.”
“…….”
에밀라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저 머저리 같은 놈이…….
하지만 에단은 페온의 말 따위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에밀라가 계속해서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 에단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가지?”
“……학생들한테 들은 게 있습니다.”
“들은 거?”
수업이 지랄 맞다,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밀라가 말을 이었다.
“혹시…… 리사 학생과 특별한 관계이신가요?”
“……뭐라고?”
에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밀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단이 눈을 끔뻑이며 잔뜩 긴장한 표정의 에밀라를 바라봤다.
“평범한 관계는 아니지?”
피가 섞인 가족이니까.
에단이 대답한 직후, 에밀라의 고운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
순간적으로 에밀라의 몸이 휘청였지만, 에단은 비틀거리는 그녀를 말없이 지켜봤다.
“학생과 교수 간 불미스러운…… 일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에밀라가 말을 중얼거리자, 리사가 이불을 집어 던졌다.
“더는 못 들어 주겠네!”
에밀라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리사에게로 옮겨졌다.
리사를 바라보던 에밀라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곧이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지금 기숙사에서 무슨 짓을……!”
에밀라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에단이 에밀라를 붙잡았다.
에단의 돌발적인 행동에 에밀라도 당황하며 대응하려 하였지만, 수 싸움은 에단이 한 수 앞섰다.
에밀라의 다리를 걸어 중심을 흩트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안는가 싶더니, 에단의 다리가 뱀처럼 에밀라의 복부를 휘감았다.
처음 겪는 백 마운트 자세의 압박감에 에밀라의 입이 벌어졌다.
에밀라가 비명을 지를 것처럼 보이자, 에단의 팔이 그녀의 목을 타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리어 네이키드’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에밀라를 기절시킬 생각이 없던 에단은 그립을 완성시키지 않고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 * *
“그러니까 지금 하신 말씀이…….”
에밀라가 리사와 블란테를 번갈아 보았다.
“……두 분이 가족 관계?”
에밀라가 그렇게 말하자, 리사가 혀를 찼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리사의 대답을 들은 에밀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까지 왜 관계를 숨긴 거죠?”
에단이 에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안 물어봤잖아?”
“…….”
“그것도 있고, 애초에 둘 다 블란테인 것을 숨기고 있는데 뭣 하러 알려? 그리고 숨기는 거로 따지면 너도 새벽의 다…….”
“새벽의?”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순간 에밀라가 에단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에단은 고개를 젖히고는 상체를 낮췄다. 그러고는 발바닥으로 에밀라의 골반을 밀고 그대로 스윕(넘기기)했다.
철푸덕.
바닥에 엎어진 에밀라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 ……박정한 놈.
‘쟤가 뭘 할 줄 알고 당해 줍니까.’
이윽고 멍한 에밀라의 표정에 서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교수님, 괜찮으신가요?!”
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이내 리사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당연히 철면피를 차고 있는 에단에게는 타격이 없었고, 결국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라 교수님은 왜 이런 녀석을…….’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자란 것 없는 아카데미의 꽃 에밀라와 모자란 것투성이인 파탄 난 인성의 에단.
그런데 입장은 정반대라니.
입맛이 쓰다 못해 떫었다. 누워 있는 에밀라를 앉힌 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할 얘기는 끝났지? 그럼 난 이제 돌아간다.”
“그래, 들어가라.”
“……경고한다. 에밀라 교수님 조심히 보내라.”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봤다.
“여자 층은 바로 위거든? 근데 네가 나한테 경고할 짬이 되냐?”
“짬? 알 수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난 이제 진짜 갈 거야.”
에단이 휘휘 손을 휘젓자, 미간을 좁힌 리사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에단이 리사를 흘겨보며 불러 세웠다.
“야.”
“왜?”
“창문으로 뛰어내려.”
“……뭐라고?”
“어차피 높지도 않잖아. 지금 나가면 백 프로 걸릴걸?”
“이 개자…….”
“또 이런 오해받고 싶어?”
에단이 턱 끝으로 에밀라를 가리키자, 에밀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하아, 내 신세가 어쩌다…….”
결국 리사는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창문에 발을 걸친 그녀는 에밀라를 힐긋 바라봤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교수님을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소리 없는 응원을 마친 리사가 그대로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런 리사를 에밀라가 말없이 바라봤다.
“왜, 옛날 생각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너도 처음엔 내 방에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그게 무…… 그건 당신을…….”
“아무튼 그게 그거지.”
얼이 빠진 얼굴로 한참 동안 에단을 주시하던 에밀라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 봤자 소용없겠군요.”
“자, 그럼 본론을 얘기하자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정말 수업 방침 때문이야? 그건 신경 꺼. 네 상사와 학장이랑도 얘기가 끝난 문제야. 아, 그리고 학장 직위도 이제 곧 끝물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에단에게 일련의 사건을 간략하게 들은 에밀라의 턱이 점점 벌어졌다.
“그런 멍청한…….”
“너도 겁 없이 남의 침소에 들어왔잖아?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아주 상습범이야.”
에단이 음흉한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떨었다.
에밀라의 반응을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에밀라가 큰 눈을 깜빡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한 표정이다.
“……너 원래 이렇게 멍청했냐?”
“그게 무슨 망발이시죠?”
에밀라가 쌍심지를 켜자,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설마 아직도 레벨린 그년을 믿고 따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에밀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벨린은 그녀에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믿고 의지할 존재 하나 없이 기계처럼 살아가던 그녀를 이끌어 준 존재가 바로 레벨린이다.
하지만 그 관계에 의심이 싹트자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레벨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게 무엇이었지?
에밀라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할 수준은 되었다.
“나는 선택권을 너한테 줬고, 선택은 네 몫이야. 나는 레벨린의 팔다리를 조금씩 끊어 먹고 있어. 이제 레벨린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도 곧 삼킬 수 있겠지.”
“저는…….”
“새벽의 달이라고 했나?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야. 너는 그냥 에밀라 교수님이 어울려. 학생들한테도 제법 진심인 것 같던데?”
“…….”
에밀라의 메마른 감정은 학생들을 통해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수업을 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고,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에밀라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새벽의 달.
밝은 달의 재림이라는 위명에는 짙은 고독함이 서려 있었다.
에밀라는 뛰어났고, 강했으며, 혼자였다.
‘……하지만 이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언사와 행동.
망나니라는 오명을 쓰든 말든,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가문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에단은 가문이 아닌, 본인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에밀라는 스스로를 혐오했지만, 자신의 힘은 믿었다.
하나 변명의 여지 없이 에단에게 패배했다.
지금 싸우면 그때보단 승산이 높겠지만, 패배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실전이라면 에단의 변칙 공격을 쉬이 장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죠?”
툭 던진 에밀라의 질문에는 많은 의도가 섞여 있었다.
에단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강하냐고?’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질문이기도 했다.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류태신은 수많은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죠? 훈련 비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엄청난 재능과 신체 조건을 가진 선수들이 쏟아지는 격투판에서, 류태신은 동양인이라는 불리한 신체 조건으로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 줬다.
‘무적.’
말도 안 되는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분석하여 계획과 플랜을 짜게 되면 결국 약점은 드러나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류태신에게는 그런 약점조차 없었다.
언젠가 금메달리스트의 레슬러와 붙은 적이 있었다.
류태신은 그를 레슬링으로 바닥에 굴려 버리며 자신의 레슬링 실력을 증명했다.
블랙벨트의 주짓떼로들은 하위 포지션에서 류태신을 농락하려고 했다.
하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파운딩과 순간적인 서브미션 캐치 능력은 블랙벨트의 주짓떼로도 압도했다.
‘무적의 투신.’
류태신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그렇기에 지금 에밀라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아마 모두 같은 대답을 했지?’
그때 류태신은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에밀라가 진지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고,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존나 쎘어.”
류태신이, 아니, 에단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