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오만의 대가 (5)
에단이 미묘한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봤지만, 리사는 애써 빈센트가 비치는 수정구만 노려보았다.
‘원래 아빠라고 불렀나? 원작에서는 못 본 거 같은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에단이 빈센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알긴 아는구나. 교수 노릇은 할 만하더냐? 그리고 리사 너는, 가문에서 도망치더니 그곳은 좀 만족스럽고?
‘이 아저씨 많이 서운하셨네.’
서운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빈센트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이 썩 정감 있게 느껴졌다.
“교수 노릇도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교수란 사실을 알았을 때 리사의 표정은 정말 장관이더라고요.”
에단의 말에 리사가 째려보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수정구 너머에 있는 빈센트가 에단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 호오…… 그렇단 말이냐? 대체 어떤 반응이었지?
“아빠, 이 망나니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거죠?”
― 그건 나도 의문이구나. 하지만 달라졌다고 해서 망나니가 아닌 것 같지는 않던데…….
예상 못 한 빈센트의 반응에 이번에는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뭐라도 했습니까?”
“…….”
― …….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는 리사와 빈센트.
그리고 왠지 모르게 페온의 시선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크흠.”
에단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바꿨다.
“바쁘실 텐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시죠.”
― 그래. 이유도 없이 연락할 녀석들은 아니지. 할 말이 뭐지?
“제가 아카데미의 교사로 부임하고 난 뒤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 ……사건? 내가 거기서 벌어진 사건까지 알아야 하나?
“그냥 들어 보시죠. 리사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 …….
“리사와 같은 반에 로만이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학장의 아들이죠. 그런데 로만 그 녀석이 리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 뭣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빈센트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에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 계속 말해 보거라!
“……뭐, 아무튼 그게 전부라면 상관없을 텐데, 리사한테 접근을 하더라고요.”
― 뭣이?!
‘뭐야, 이 아저씨.’
에단이 빈센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재차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 진정하시고……. 그런데 리사 이 녀석이 평민인 줄 알고 자꾸 같잖은 짓을 하더라고요.”
― 같잖은 짓이라고?
“학장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외적으로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은 교칙에 어긋나지만, 제 나름대로 세력을 만들었더라고요.”
― ……그래서 그놈들이 뭘 한 거지?
“리사를 겁박하던데요?”
― 감히!
빈센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수정구 너머였지만, 빈센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이런 딸 바보 캐릭터였어?’
조금 깨는데…….
에단이 리사를 바라봤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리사의 팔뚝을 에단이 툭툭 치며 속삭였다.
“뭐 해? 말 안 하고.”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자리에 앉은 빈센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리사에게 물었다.
― 리사, 확실히 말하거라. 그 말이 사실이더냐?
“……응, 사실이야.”
― 빠드드득!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들이 대체 무슨 겁박을 한 거지?
에단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교수로서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 ……말해 봐라.
“원래라면 귀족의 권위로 찍어 누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리사가 그런 짓에 겁먹을 녀석입니까?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자, 놈들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 ……손?
“어쌔신을 고용해서 리사를 납치하려고 하더군요.”
― …….
‘뭐야? 이번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네?’
하지만 그 순간, 빈센트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갔다.
― 지금 기사단을 소집하겠다. 전면전을 준비해야겠군. 당장 가문으로 복귀하거라. 감히 블란테를 능멸한 자들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아, 아빠! 잠깐만!”
― 더 들을 것도 없다!
“아버지, 리사 말대로 잠깐 얘기 좀 들어 보시죠.”
― …….
“리사가 꿈에 그리던 생활입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가문으로 복귀를 할 텐데, 그걸 박탈하면 가엾잖습니까.”
―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감히 블란테를 능멸한 놈들을 좌시하란 소리야?!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죠. 먼저 어쌔신들의 신상은 모두 파악해 놨습니다. 구체적인 보고는 네이드가 할 겁니다. 그 괘씸한 놈들은 씨를 말려 버리죠.”
― ……좋다. 이번 기회에 그 쥐새끼들을 박멸시켜야겠군.
“학장이랑 그 아들놈은 저한테 맡겨 주시죠. 아버지께서는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 그게 무슨 말이지?
“‘학장 직위를 내려놔라’라고 말이죠.”
에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툭툭.
레벨린이 노트를 두들겼다. 슬슬 그분들을 만날 시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계획이 어그러졌어.’
그녀가 만든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헨리, 용병, 산적, 그리고 아카데미까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에단 블란테.’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이가 갈렸다.
에단만 아니었어도 벌써 많은 계획이 진전됐을 것이다.
‘괜찮아. 세계수 쪽에서는 순탄히 진행되고 있으니까.’
아카데미와 블란테는 초석에 불과했다. 중심이 되는 것은 세계수.
‘더 이상 미꾸라지가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곧 시기가 다가온다. 그분을 영접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레벨린이 보고서를 바라봤다. 에단을 처리할 계획이 머릿속에서 수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계획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만연한 계획들이다.
‘망나니 녀석이…….’
단숨에 처리하기에는 큰 먹잇감이다.
원래라면 천천히 놈의 목을 조여 가며 무너뜨릴 생각이었고, 용병들과 도적들은 그를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돌발 행동 때문에 그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할 수도 없었다.
블란테는 숨죽인 맹수.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더욱 큰 화를 맞이할 게 분명했다.
에단을 회유할 생각도 했었다. 과거의 에단은 다루기 쉬운 망아지에 불과했으니까.
에단같이 감정적이고 권위적인 상대는 원하는 먹잇감만 던져 준다면 충분히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때 꼭두각시로 만들어 뒀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의 에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본신의 힘도, 정신력도.
지금의 에단에게는 목줄을 채울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레벨린이 끌려다니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불안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레벨린은 결국 혼자 판단하지 않고, 의견을 묻기로 결정했다.
서랍 안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아 빠진 목함을 꺼냈다.
레벨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레벨린만 사용하는 개인 집무실인 데다가 누군가의 방문 일정도 없었다.
원래라면 별도로 마련한 장소에서 진행해야 했으나, 마음속에 자리한 초조함이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
레벨린의 입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는 천천히 흘러 목함을 둘러쌌다.
목함이 삐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크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깊은 어둠이 올라왔다.
어둠은 조금씩 형체를 갖춰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 무슨 일이냐.
“존안을 뵙습니다.”
― 시기가 이르구나.
“죄송합니다.”
― 나무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 그만해라…….
“아닙니다. 다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레벨린이 머리를 바싹 조아리며 저자세로 말했다.
연기로 이루어진 형상은 그 태도가 싫진 않은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 필히 이유가 있어서 나를 부른 거겠지……. 이유가 뭐지?
“다름이 아니라…….”
레벨린은 진행되고 있는 계획과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검은 연기가 목소리를 내었다.
―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나 지금 상태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 한데 계획을 방해하는 애송이라…… 지금 처리하는 게 좋겠느냐?
“그랬으면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 요컨대 표면상으로 드러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 그러면 내가 나서지.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 적당한 제물만 있다면 언제든지 현신할 수 있다. 꽤나 계획을 잘 진행했더군.
“감사합니다!”
―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나, 인간 놈을 꼭두각시로 만들 정도로는 충분하지. 거기에 추가적인 제물이 있다면 원래 힘을 복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검은 연기가 내뱉는 말에 레벨린이 고민하다 말했다.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말해 보거라.
레벨린은 떠오른 계획을 설명했고, 검은 연기는 그 계획에 만족을 표했다.
― 그럼 준비를 해 두도록…….
검은 연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뒤이어 목함도 자연스럽게 닫혔다.
‘……됐어.’
골칫덩이를 제거할 때가 왔다.
* * *
“고생했다.”
에단이 리사를 향해 말하자, 리사가 뾰족한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아니면 어쩌려고?”
“……하아, 부탁이야. 난 지금이 너무나 소중해.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진심 어린 리사의 부탁에 에단이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리사를 바라봤다.
“……너, 남자 친구 있냐?”
“그게 무슨 소리야?!”
리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하기야……. 그럴 일은 없지. 그 녀석도 없어졌는데…….”
“그 녀석?”
“있어, 그런 게.”
리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지만, 에단은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원래 너는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까.’
주인공이 감쪽같이 사라진 지금, 제대로 된 설명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놈이 처리해야 할 일을 내가 떠안았잖아.’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는데, 일이 귀찮아지고 말았다.
“야, 너 이제 돌아가.”
“안 그래도 돌아갈 생각이었어. 누구한테 가라 마라…….”
똑똑.
순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리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리사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당황하기는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야?’
리사가 입 모양으로 에단에게 물었다. 하지만 에단도 리사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몰라.’
‘아니, 네가 모르면…….’
리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 이 현장이 발각당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것이 빤했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방에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얼굴 좀 보시죠.”
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에단에게도, 리사에게도.
‘에밀라? 에밀라가 무슨 일이지?’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나 떠올려 봤지만, 딱히 볼일은 없었다.
리사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매섭게 노려봤다.
‘에밀라 교수님이 여길 왜 와?!’
벙긋거리며 격렬한 분노를 토해 내는 리사.
그 모습에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모르면…….’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아…….’
리사가 입을 벌렸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