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오만의 대가 (3)
아침이 밝자 에단은 식사를 하기 위해 기숙사 아래로 내려왔다.
언제 올지 모르는 통신을 대비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군.’
밤을 새운 것치고는 몸 상태가 썩 괜찮았다.
이제 에단의 몸은 수면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에단이 적당히 음식을 받아 식사를 하고 있자, 에밀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침부터 상당한 양의 음식을 담은 채 에단의 앞에 앉았다.
수북하게 쌓인 음식들.
에단은 멀뚱거리며 접시와 에밀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침부터 안 부담스럽냐?”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요.”
에단은 자신의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수긍했다.
“그건 그렇군. 그래서 이번엔 내 앞에 앉은 이유가 뭐지?”
“……상당히 독특한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식한 수업을 한 겁니까?”
“무슨 생각이긴. 나는 체육 교수라고. 대충 제자들 수준은 알아 둬야 할 것 아니야?”
“그런 방식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식사를 하던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봤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널 이긴 거지.”
“…….”
에밀라가 침묵했다. 식사를 재개하던 에단이 입 안의 음식을 삼킨 뒤, 어딘가 풀 죽어 보이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부터는 그런 식의 훈련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믿어도 되는 겁니까?”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당신은 정말……!”
에밀라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린 에단이, 접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접시 위는 깨끗했다.
에단이 막 자리를 옮기려 할 때 크러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크러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의 시선을 피했다. 에단이 작게 코웃음을 치며 크러쉬를 지나갔다.
“꽤나 상큼한 짓을 저질렀네?”
“……!”
에단이 지나가면서 내뱉은 말에 크러쉬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발뺌하지는 않아도 돼. 어차피 추궁할 생각은 없거든. 나도 선물을 준비해 뒀으니까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에단이 빙그레 웃으며 크러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 *
“오늘 수업도 에단 쌤이야?”
“어…….”
“설마 어제 같은 수업을 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러면 난 진짜 죽을 거야.”
강의실 안에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날 겪은 에단의 수업. 단순한 달리기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은 거의 지옥을 경험했다.
체력의 한계는 생각보다 쉽게 바닥을 드러냈고, 일찍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드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에단이 들어섰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들하지? 뭐 잘못 먹었나?”
“…….”
에단의 물음에 학생들은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고,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출석을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석을 부르는 순서가 조금 달랐다.
“마지막으로 리사.”
“네.”
리사의 이름이 불리며 출석이 끝났다. 학생들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출석 순서 기준이 궁금하나?”
과반수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이 대답했다.
“어제의 성적순이다.”
에단의 대답에 학생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왜, 불만 있나?”
학생들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꼬우면 너희들이 교수하든가.”
당연히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불만도 이해한다. 아카데미에 온 목적은 다양할 테니까. 누구는 기사가 되고자 해서 아카데미에 왔을 테고, 누구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누구는 지식과 교양을 위해, 누구는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내 수업을 듣는 순간에는 모두 똑같아. 어떤 분야에서든지 체력은 가장 중요하니까.”
“…….”
“자, 그러면 수업을 시작하지. 오늘은 어제처럼 무작정 뛸 일은 없어. 어제는 대충 수준을 알아보려고 시킨 거니까.”
말을 하던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희들 너무 심각한 거 아니냐? 여기서 나는 기사가 목표다, 거수.”
과반수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기사는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에단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기사가 목표라는 것들 수준이 고작 그따위란 말이야?”
학생들이 고개를 숙였다. 에단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에단이 직접 증명을 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학문에 대한 조예만큼 체력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오늘 수업은 뭐일 것 같나?”
학생들은 당연히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고, 에단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었다.
에단이 미소를 지었다. 학생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학생들의 고통을 즐기는, 소악마같이 섬뜩한 미소였다.
“오늘은 근력 운동이다.”
근육은 언제나 옳으니까.
* * *
끄으으윽!
아침부터 교내 연무장에서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에단이 학생들에게 시킨 운동은 팔굽혀펴기였다.
일명 푸시업.
어제 수업의 의도가 달리기를 통한 심폐 지구력을 측정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푸시업을 통한 근력의 측정이었다.
‘어제보다는 봐줄 만하군.’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제보다는 나았다.
“그럼 잠깐 휴식.”
아직 측정이 남아 있으니 여기서 퍼지면 안 됐다.
마른하늘에 단비 같은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학생들이 곡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블란테의 피가 대단하기는 한가 보군.’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리사를 바라봤다. 리사는 이번 수업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남성과 여성은 신체 조건이 달랐다. 특히 푸시업 같은 종목에서는 남성이 훨씬 유리했다.
그러나 리사는 보란 듯이 동급생을 압도해 버렸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의 합작품인 것이다.
“이번 수업에서도 리사가 제일 잘했군.”
에단이 그렇게 말하자,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리사에게 쏠렸다.
리사가 쏠리는 시선을 피하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잠깐 따라오지. 할 말이 있다.”
“…….”
리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 * *
영지를 나선 잭슨의 허리춤에는 새로운 검이 매달려 있었다.
잭슨은 설레는 표정으로 검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슬쩍 뽑아 봤다.
스르릉.
맑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잭슨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검을 꺼내서 바라봤다.
“와…….”
아름다운 자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잭슨은 본디 검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검사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잭슨은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명검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안목이 없지는 않았다.
‘……이런 검을 툭툭 주다니.’
잭슨이 블란테의 영지를 힐긋 바라봤다. 놀라웠다.
아무리 검술 명가로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나, 이 정도 되는 검을 그냥 주다니.
‘직접 온 보람이 있군.’
날밤을 새워 가며 급하게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잭슨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착검했다.
철컥.
착검되면서 들리는 소리마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잭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건너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지?’
수정구를 블란테의 가주에게 전달하라는 임무 말고도 또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산맥을 오르라고?’
에단의 말을 토대로 작성된 약도.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정말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보고 길을 찾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잭슨은 명색이 정보 길드의 간부.
“에휴, 까라면 까야지.”
잭슨이 산을 오르려고 할 때 지나가던 남자가 잭슨을 불러 세웠다.
“설마 저 산을 오르려고 하는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문제라고 하면 문제지…….”
나무꾼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젓자, 잭슨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몬스터가 출몰합니까?”
블란테의 산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는 흉포하기로 악명 높았다.
하지만 나무꾼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는 아닐 거요. 최근 대대적인 토벌이 있어서 근방의 몬스터는 씨가 말랐으니…….”
“그럼 대체…….”
나무꾼은 주위를 경계하다가 잭슨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악령이 있는 것 같소.”
“……악령이라고요?”
쉽사리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악령이라니, 잭슨은 귀신이나 악령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꾼의 표정은 장난기 없이 진지했다.
“최근에 이 근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소. 곡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한 게 미약하게 들리더군.”
“산짐승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에이, 답답한 사람아. 평생을 여기서 살아온 우리가 산짐승 소리랑 사람 소리를 구분 못 할 것 같소? 그건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었소……. 마치 몬스터의 신음 같은…….”
“저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말을 하는 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 아무튼 그래도 올라간다고 하면 조심하길 바라오…….”
나무꾼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지?’
방금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막상 이런 소리를 들으니 이유 모를 불안감이 치밀었다.
‘하필 그 녀석이 준 임무라 더 불안한데…….’
잭슨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에단의 모습.
에단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잭슨의 경험상 그런 사람이 가장 위험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하아.
잭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블란테에서 받은 검.
‘……그래, 너만 믿는다.’
잭슨은 침을 삼키고 산을 올랐다.
* * *
갑작스러운 에단의 부름에 리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따라나섰다.
연무장 뒤편에 선 에단이 묘한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봤다.
“무슨 일로 저를 여기까지 부른 거죠?”
“체력이 꽤나 좋던데?”
“칭찬 감사합니다.”
“혹시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나? 검도 꽤나 잘 다루는 걸 보니 귀족 가문인 것 같기도 하고.”
― 짓궂은 놈 같으니라고.
페온이 떨떠름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에단은 지금 리사를 꾀어내고 있었다.
“……저희 부모님은 평민입니다.”
“그래? 의외로군. 혹시 고향이 어디지?”
“그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합니까?”
리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야. 여기 학생들 모두가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편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더 위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말에 어폐가 있군요. 그런 교수님도 저를 가볍게 제압하지 않았습니까? 본 실력을 드러내지도 않고. 교수님도 평민이지 않습니까?”
“아, 그거? 그거 구라야. 우리 가문이 좀 잘나가.”
에단의 말에 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구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에서의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에단은 수습하기보다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있어.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데 학생이라는 녀석이 유행도 못 따라가서 어째.”
“……재수 없어.”
“우리 가문 블란테거든. 내가 네 오빠야.”
“……!”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내뱉자, 리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오랜만이다, 리사 블란테.”
에단이 리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