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전설의 어쌔신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슬슬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 말인즉, 사건이 벌어질 순간이라는 것.
‘일이 꼬여 버려서 짜증이 나는군.’
주인공이 없어지게 되면서 상황이 꼬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세계수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했는데.’
미래가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제 조건이 달라졌다.
주인공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나비효과가 일어났다.
주인공이 치워야 할 똥들이 에단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급한 대로 일행들을 먼저 보내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에단이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해.’
장소만 정확히 특정할 수 있다면 에단이 독단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얻게 되는 아이템과 기연 중 당장은 그게 가장 필요했으니까.
‘룬어도 습득했고.’
에단이 팔을 바라봤다.
완전히 팔에 흡수되어 문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뭔가 불길하단 말이지.’
바뀐 단어, 사라진 주인공.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골치가 아프다. 골치 아픈 것은 질색인데…….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두 번째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여기서 학교생활을 다 해 보는군.’
에단은, 아니, 류태신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없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운동에 전념하며 살았으니까.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학창 시절은 누구에나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이었으니까.
‘뭐, 이렇게라도 해 보긴 하네.’
에단이 아카데미의 정원을 거닐자,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정말 바뀐 게 없군.’
자신을 향한 시선.
시선에서는 감정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호의를 가지는지, 아니면 적의를 가지는지.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류태신의 삶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달라졌다.
상대에 따라, 국적에 따라, 흥행에 따라.
흥행을 위해서 악인이 되기도 했고, 선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삶을 살면서 류태신은 결국 무패의 절대자로 옥타곤에 군림했다.
수도 없이 그런 과정을 겪었기에 에단은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과 말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어느덧 강의실 앞까지 당도한 그는 덜컥 문을 열었다.
거칠게 문을 연 에단이 터덜터덜 걸어서 교탁 앞에 섰다.
“자, 힘세고 강한 아침.”
“…….”
“너희들은 교수가 좋은 아침이라고 하는데 대답도 안 하냐?”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반응이었다.
학생들의 반응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아직도 내 과목이랑 수업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수.”
“…….”
“좋아, 만족스러운 반응이군.”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학생들을 스캔했다.
“너희들은 반장 같은 게 있나?”
“없습니다!”
한 학생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흠…….”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묘하게 거슬리는 학생이 보였다. 갈색 머리의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묘하게 신경 쓰였다.
“이름이 뭐지?”
“드레이입니다.”
‘드레이?’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아, 그 녀석이군.’
기억을 더듬던 에단은 한 인물이 떠오르자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기억해 두지.”
“……네?”
“자, 그러면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반장을 뽑으려고 한다. 그럼 공평하고 민주주의적으로 투표부터…… 아,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겠군.”
이 세계관은 왕과 황제와 귀족이 있는 봉건주의였으니까.
“그럼 권력을 좀 휘둘러 봐야겠군. 반장은 지금부터 드레이 너다.”
에단의 손가락이 드레이에게로 향하자, 드레이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앞으로 목소리는 크게 내고. 그래야 내가 편하니까.”
학생들의 시선이 일순간 드레이에게로 향했다. 드레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리사는 에단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 막무가내 교사네.’
하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어제 보여 줬던 박투술, 그리고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투 방식.
에단이 본신의 힘을 드러냈다면 승부는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웠다.
기라성 같은 검사들이 즐비한 가문에서도 에단 같은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 역겨운 오빠랑 이름이 같은 것도 신기한데.’
리사가 턱을 괸 채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리사를 힐긋 바라봤다.
‘어제랑 표정이 딴판이군. 왜 저래?’
에단의 눈이 이번에는 로만에게로 향했다.
‘……저게 더 심하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로만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나 지켜보겠어.’
이미 암살자들은 움직였다.
건방을 떨고 있는 저 표정이 절망으로 점철되는 모습이 상상되자, 로만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흐흐흐.’
로만이 음흉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자, 에단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저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니 정말 기분이 나빠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단이 교탁을 쾅, 하고 두드렸다.
에단의 손에는 작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닌, 학생들 명부만 들어 있는 얄팍한 책자였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당장 조급하게 움직인다고 한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이 학생들을 바라봤다.
“자, 그럼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묻겠다.”
학생들이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전 수업과 달리 학생들은 에단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수업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지?”
에단의 물음에 학생들이 침묵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단은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조금 바꿔서 묻지. 에밀라 교수는 뭐를 가르치지?”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검술을 지도해 주십니다.”
“검술은 왜 배운다고 생각하나?”
에단의 물음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너무 당연한 일을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만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런 당연한 걸 묻는 겁니까? 이래서 평민이란…….”
“그래서 그렇게 쪽도 못 썼냐?”
비아냥거림에 비아냥거림으로 응수하는 에단 때문에 로만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평민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검술은 자기방어 수단이자, 명예와 직결되는…….”
“자, 거기까지.”
에단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에단의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철검.
그는 검집을 흔들며 말했다.
“이건 장식품이 아니잖아? 결국 검은 무기야. 본질은 바뀌지 않지. 명예니 뭐니 운운해 봤자, 경지가 낮다면 하등 쓸모가 없다.”
에단이 싸늘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을 다루지 못하는 검사 따위, 아무도 좋은 취급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이지.”
에단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차별과 멸시는 에단이 몸소 겪은 것들이었으니까.
에단은 검술 가문의 자제였다. 모두가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검술 가문에서 검을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은 치명적이었다.
모두가 에단을 경멸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검을 쥐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만이라면 그 정도의 취급까지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열등감을 이기지 못한 에단은 더욱 엇나갔고,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안 좋아졌다.
“결국에는 ‘검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인정하나?”
에단의 말에 학생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었다.
“반장, 에밀라 교수의 검술 수업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지?”
에단이 부르자 드레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이론을 시작으로 전체적인 기본기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공용 검술을 가르쳐 주시고 각각의 자세를 교정해 주십니다.”
“알겠다. 앉아도 좋아. 나쁘지 않은 교육 방법이군.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하나 물을 게 있다. 혹시 검술을 제외하면 따로 훈련을 받는 게 있나?”
학생들이 모두 침묵하자, 리사가 입을 열었다.
“특정한 날 하는 구보 외에는 없습니다.”
“최악이군.”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구보가 전부라.
에밀라의 수업 방식도 이해는 됐다. 수업 시간은 정해져 있고, 학생들의 숫자는 많았다.
에밀라가 할 수 있는 교육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교수 노릇이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나는 대충 봐도 알 수 있어. 너희들은 지금 운동 부족이다.”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눈을 깜빡였다.
“……운동 부족이라고?”
“우리가? 우리만큼 바쁘게 훈련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텐데…….”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 너희들이 혼자서 검을 몇 번 휘두르든, 마법을 얼마나 연구하든 그런 것엔 별로 관심 없다.”
“그래서 어떤 수업을 하신다는 거죠?”
“어제도 몸소 보여 줬지? 전투에 있어서 지구력과 근력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들이다. 의문이 있다면 내가 다시 상대해 주지.”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학생들이 샐쭉한 표정으로 에단의 눈을 피했다.
“그럼 첫 수업을 시작하지. 밖을 보니 산책로가 넓고 괜찮던데.”
학생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먼저 뛰자고.”
물론 멀쩡하게 돌아올 생각은 말고.
* * *
에단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학생들이 강의실을 나섰다.
건물 내에 있는 연무장으로 가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수업 시간에 달리기라니…….”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곁을 따라오는 동급생 율리의 한탄에, 리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제 내가 이겼으면 안 뛰어도 됐을 텐데…….”
“뭐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원망하는 것 같잖아!”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고. 아마 많이 뛰지는 않을 거야. 수업 시간은 대충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겠지?”
“걱정 마.”
하지만 리사의 예상과 달리 에단의 수업은 일찍 끝나지 않았다.
“다들 다리가 보인다. 더 빨리 뛰어!”
에단의 호통에 학생들은 모두 죽을상을 지으며 다리를 움직였다.
‘이, 일찍 끝난다며!’
학생들의 체력은 약한 편이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30분 달리는 것도 버거워했을 테니까.
하지만 선두에 있는 에단이 상당히 빠른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학생들은 처음 겪은 지옥 같은 달리기에 모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자 희망이 있었는데.
‘이, 이제 곧 다음 수업 시간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구나.’
저런 앙큼한 것들.
에단이 씨익 웃으며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멀쩡히 돌아갈 생각이라면 꿈 깨라!”
에단에게는 다른 교수들이 가지지 못한 권력이 있었다.
바로 수업의 자율성.
거기에는 시간 배정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곧, 학생들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