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불량 교수 (2)
수업을 기다리던 로만은 턱을 괸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큭큭, 크러쉬 교수님을 쓰러뜨렸다길래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잖아?’
로만은 감히 귀족에게 대항하던 에단을 응징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준비한 것들을 채 다 보여 주기도 전에 에단은 도망쳤다.
그것도 수업 도중에 아주 꼴사나운 모습으로.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평민 교수님, 정말 안 오시는 거 같은데? 큭큭.”
“로만,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말한 대로 바로 도망가게 만들어?”
“크러쉬 교수님을 이긴 사람인데 그렇게 순식간에…….”
로만이 주축으로 있는 무리가 하나같이 그를 칭송했다.
덕분에 로만의 콧대는 끝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글쎄? 생각보다 싱거워서 실망했어.”
“그러게. 큭큭.”
“크러쉬 교수님도 별거 없는 거 아니야? 하핫.”
“그래도 평민들이랑 비교할 건 아니지.”
친구들의 말을 듣던 로만이 힐긋거리며 한 여자를 바라봤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의 여학생.
‘평민 주제에 오늘도 봐줄 만한 얼굴이군.’
리사.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성이 없다는 것은 리사가 평민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로만은 리사를 가볍게 여겼다.
어쨌든 평민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리사는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에도 굴하지 않고 뛰어난 성적을 보여 줬다.
교양, 검술, 지식, 마법까지.
모든 수업에서 리사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로만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리사에게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리사는 객관적으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로만은 입맛을 다시며 리사를 바라봤다. 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반면 리사는 고민에 빠진 듯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전에 찾아온 신임 교수, 에단.
낯익은 이름이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에단 블란테. 패악질을 일삼는 가문의 망나니이자 문제아.
아카데미로 떠나온 데에도 그 망나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아니겠지.’
리사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냈다.
그녀가 기억하는 에단은 푸짐한 지방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최근 찾아온 같은 이름의 교수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련된 몸과 그 푸짐한 지방 덩어리의 돼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녀석은 눈빛부터 글러 먹었으니까.’
음욕과 시기와 질투.
온갖 나쁜 감정들로 물들어 있던 에단의 눈빛.
하지만 이번에 교수로 부임한 에단의 눈빛에선 날카로우며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엿보였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같은 게 조금 특이하지만.’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대륙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희귀한 편에 속했다.
‘……설마, 방계?’
에단이라는 이름은 꽤나 흔했고, 블란테는 오래된 명문가답게 수많은 방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그리고 그중에 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애초 블란테의 본가는 방계와 그리 많은 교류를 갖지 않았기에, 리사로서는 신임 교수가 방계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닐 거야.’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가문에 편지까지 보냈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라면 굳이 아카데미에 사람을 붙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가문이 블란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름대로 생각을 마친 리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애초에 소문 때문에 도망간 녀석이기도 하고.’
일을 벌여 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 에단이다.
그 정도로 나약할 줄이야.
‘그것만큼은 내가 아는 에단과 똑같은 것 같네.’
리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귓가에 여러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그 교수님 돌아왔다던데?”
“누구?”
“왜, 그 새로 오신 교수님 있잖아. 수업 도중에 나가신 분.”
“아……. 그 무섭게 생긴 분.”
“어, 그래. 크러쉬 교수님 입원시킨 분.”
“뭐야? 그 교수님, 실체가 탄로 나서 도망친 거 아니었어?”
“글쎄 오늘 그 교수님 본 사람들이 꽤나 있더라고.”
“정신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리사는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를 엿들었다.
‘사실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리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어린아이랑 같이 있다던데?”
“뭐야? 유부남이야?”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지.”
“헐, 대박이네. 교수님도 어려 보이던데. 동안인 건가?”
학생들의 수다는 로만의 귀에도 들어갔다.
‘뭐야? 진짜 돌아왔다고?’
이렇게나 구체적인 말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사실인 듯했다.
‘겁도 없네.’
안타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손쉬워서 아쉬웠으니까.
‘돌아온 걸 후회하게 해 주지. 큭큭.’
로만이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곁에 있던 동급생이 찔끔거리는 표정으로 멀어졌다.
‘또 시작이네.’
‘저럴 때마다 정떨어진다니까.’
때마침 강의실의 문이 덜컥 열렸다. 이전과 같은 요란한 등장이었다.
“반갑다, 애들아.”
에단이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저마다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전에는 미안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지.”
에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만이 손을 들었다.
“급한 용무 때문이 아니라 도망친 거 아닌가요?”
순식간에 시선이 로만에게로 쏠렸다. 로만은 쏠리는 시선을 즐기는지 오히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도망가? 내가 왜 도망을 가지?”
‘뻔뻔하기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로만은 에단이 어떤 자세를 취하기로 정했는지 깨달았다.
‘우둔한 평민 놈이 철면피를 깔기로 마음먹었구나.’
같잖았다. 그래 봐야 진실은 머지않아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크러쉬 교수님 일 말이에요. 제대로 된 대련이 아니라 비겁한 방법으로 쓰러트렸다고 하던데요?”
로만의 말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왜, 할 말 없지? 그게 사실이니까.’
로만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평민이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찌그러질 모습을 상상하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아무렇지 않았다.
‘질린다, 질려.’
이따위 도발성 질문.
류태신이었던 선수 시절, 기자들에게 수도 없이 시달렸었다.
에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게 베스트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건방진데 조금 끌어내 볼까?’
도발은 상대가 먼저 했으니, 에단도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비겁한 수라……. 그거참 신선한데? 혹시 그 비겁한 방법이 뭔지 알 수 있나?”
에단이 역으로 되묻자, 당황한 것은 로만이었다.
그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로만은 에단이 비겁한 방법으로 크러쉬에게 승리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겁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거야……. 방심을 유도한다거나…… 전투 중에 상대를 속여서…….”
한껏 작아진 로만의 목소리를 듣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전투 중에 상대를 속이는 게 잘못된 행위인가?”
“…….”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침묵했다. 침묵한 학생들을 바라보던 에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심은, 방심한 상대 탓 아닌가? 본인이 정신 안 차리고 있던 걸 왜 남 탓으로 돌리지? 혹시 머리에 매직 미사일이라도 맞았나?”
어이없다는 어조로 말하는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이 얼굴을 붉히며, 모멸과 치욕에 몸을 떨었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나를 조롱해?!’
에단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로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지금 로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진즉에 눈치챘다.
“참 머릿속이 꽃밭인 애들이 많다니까? 거기 그 미안한데 아직 이름은 모르겠고, 출석을 불러야 하니까 앉아 주겠어?”
“…….”
빠득.
로만은 이를 갈면서 자리에 앉았다. 에단의 조롱에 꼭지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에단은 태연하게 단상에 팔을 걸쳐 놓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레벨린에게 미리 자료를 인계받았기에, 출석을 부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출석 확인을 마친 에단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내 소개는 이미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내 이름은 에단이고, 성은 없어. 자 이제 질문을 받아 보지.”
에단이 칠판에 이름 두 글자를 써 놓고 말했다.
여자 학생 중 하나가 손을 치켜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
“오늘 정원에서 어린 여자아이와 같이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혹시 딸인가요?”
예상 못 한 물음에 에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방금 전 일인데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돌았나?”
“여기 소문은 10분이면 전부 돌아요! 대답해 주세요!”
“상황상 불가피하게 맡게 된 아이니까 신경 쓰지 말도록.”
에단의 대답에 흥미가 깨진 학생이 손을 내렸다.
출석 확인을 끝마친 에단이 학생들을 스캔하듯 둘러봤다.
개중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고, 흥미 어린 눈빛들도 있었다.
그중 압권은 역시 로만이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귀여운 놈.’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에단은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옮겨진 대상은 리사였다.
― 저 녀석이 네 여동생이냐? 정말 판박이로구나.
‘그렇습니까?’
에단으로서는 떨떠름한 감정이 들었다.
리사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카론과 모룬도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그들과는 처음부터 대립했다.
하지만 리사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리사는 에단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고, 에단은 리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하나 지켜봐야겠군.’
기회가 되면 적당히 골려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남은 주요 인물들은…….’
에단은 시선을 돌려 대략적인 원작 인물들을 체크했다.
‘처음에는 너겠구나.’
로만은 원래라면 주인공에게 깨지게 되는 엑스트라 악역이었다.
‘나랑 비슷한 케이스지.’
하지만 주인공이 없어진 관계로 로만의 타깃은 에단으로 정정된 모양이었다.
‘가문이 밝혀지면 아주 자지러지겠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겼다. 어디까지 기어오를지가 궁금해졌다.
스캔을 마친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질문은 없는 걸로 알고 수업을 시작하겠다. 불만 없겠지?”
에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만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그래, 매직 미사일. 질문하도록.”
푸하핫!
에단의 말에 곳곳에서 폭소가 터졌다. 로만이 이를 악문 채 에단을 노려봤다.
“……제 이름은 로만입니다.”
“아, 그랬지. 미안하다. 내가 아직 이름을 전부 못 외워서. 첫 수업이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로만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억눌러 냈다.
로만이 꿈틀거리는 볼을 진정하며 에단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어떤 수업을 하시나요?”
“어떤 수업을 할 것 같은데?”
에단이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평민에게 배울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교수님이 저희에게 뭘 알려 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적의가 가득한 로만의 말.
학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로만과 에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있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거.”
“……뭐죠?”
“너같이 건방진 새끼에게 정신 교육 제대로 해 주는 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