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불량 교수 (1)
갑작스러운 무단결근.
떠날 때야 월차라고 말했지만, 출근 하루 만에 월차가 생길 리가 전무했다.
변명할 것도 없이 에단의 완벽한 실수였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철면피를 깔아야 한다는 사실을.
“와아…….”
아카데미의 내부에 들어온 다비가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군.’
휴고는 선망의 눈빛으로 아카데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다비를 데려온 것도 같은 맥락이지.’
검은 도끼 사미라.
원작에서 몇 번 언급은 된 걸로 기억한다.
‘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비와 사미라가 어떤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딸인지, 친인척인지, 아니면 남인지.
하지만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용병이니까 빨리 찾겠지.’
붉은 곰.
에단이 용병들을 찾는 데에는 레벨린의 수족을 자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지.’
원작 주인공은 세계수를 복구할 때 성검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성검은 선택받은 자만이 뽑을 수 있는 검.
‘내가 그걸 뽑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희박한 확률이었다. 더군다나 뽑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뽑으면 얼마나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
벌써 머리가 아파 왔다.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수인을 모아야 해.’
먼저 휴고는 조건을 충족했다. 비록 반쪽이기는 했으나 웨어울프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그리고 붉은 곰. 그곳의 용병대장도 수인이었다.
‘그리고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카데미였다.
정체를 숨기고 아카데미에 다니는 수인.
‘원래라면 한참 뒤에 알게 되겠지만.’
에단은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짜증 나는군.’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서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이미 사태는 상당히 진전이 되었을 터.
에단이 다비를 옆구리에 안아 들었다.
“……?”
“시간이 없어서.”
에단이 지면을 박차자, 다비가 비명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레벨린의 집무실 앞.
땅에 내려선 다비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다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집무실의 문만 바라봤다.
“저기,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이는데요…….”
지나가는 학생과 아카데미의 직원들이 에단과 다비를 힐긋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관계야?’
‘모르겠는데? 누구지?’
‘설마 딸인가……?’
‘그럼 무단결근도 그것 때문이야?’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다비가 주눅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돌아오시긴 하셨군요.”
레벨린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가갔다.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게 됐어.”
“말뿐인가요?”
레벨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의 에단이라면 들이박고 보겠지만, 이번 일의 책임 소재는 어디까지나 에단에게 있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군. 사과하지. 네 말대로 말뿐이면 조금 그렇고……. 뭘 해야 하지?”
에단이 레벨린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큰 건 바라지 않습니다. 한 번, 딱 한 번만 제 지시를 따라 주시죠.”
레벨린의 말을 들은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 여우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미 전제 조건이 달라졌다. 원작 주인공은 사라지고 원작 주인공이 해결해야 할 일들을 에단이 떠안게 됐다.
이 사건으로 어떠한 나비 효과가 벌어질지 에단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레벨린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명분은 레벨린에게 있었으니까.
에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지시는 거절할 테니 알아 두라고.”
“설마요. 제가 그 정도의 무뢰한으로 보이십니까?”
“어. 그래 보여.”
레벨린의 가식적인 미소에 금이 쩍 갔다.
하지만 금세 가식의 가면을 쓴 레벨린이 다비를 바라봤다.
“그쪽 분은 누구신가요?”
“얘를 아카데미에 입학시켰으면 하는데.”
레벨린이 에단과 다비를 번갈아 바라봤다. 레벨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설마…….”
“그런 거 아니니까 넘겨짚지 말고. 아는 녀석일 뿐이니까, 대충 아래 학년 진도부터 교육이나 시켜 줘. 물론 숙식도 처리해 주고.”
“……이번 일도 대가가 따르는 건가요?”
레벨린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왜? 교육 한번 개판으로 해 줄까?”
에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렇게 말하자, 레벨린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좋습니다. 대가는 받지 않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저희 아카데미는 엘리트들만 모이는 곳입니다만…….”
에단이 주눅이 들어 있는 다비를 바라봤다.
“자신 없어?”
“…….”
다비는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일자리야 구해 줄 수 있으니까.”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그깟 하녀 자리 하나쯤은 쉽게 구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비는 고개를 저었다.
‘잡아야 해.’
다비는 멍청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다가온 기회가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할 수 있어요!”
다비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여기서 포기했다면 에단은 다비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는데?”
“뭐……. 그러면 좋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에 나이 제한은 별도로 없으니까요. 다만, 시험을 통해 적절한 반과 학년을 배정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건 상관없어.”
거기에까지 에단이 개입하면 그것은 월권이었다. 오히려 다비가 힘들어질 확률이 높았다.
에단이 다비를 바라봤다. 다비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단이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늘부터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럼 일정을 맞춰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연하지.”
에단이 웃었다.
* * *
수업을 끝낸 에밀라가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에밀라를 힐긋거렸다. 하지만 함부로 다가가는 학생은 없었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스타나 다름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어려운 교수였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에밀라라는 사람을 더욱 선망하고 동경하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념에 잠겨 있는 에밀라의 모습은 그림 같았고, 학생들은 더욱 에밀라라는 인물에 대한 환상을 키워 갔다.
하지만 에밀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일은 저질러 놓고 대체 어딜 간 거야?!’
에단 블란테.
블란테 가문의 문제아이자 망나니로 에밀라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 준 사람이었다.
충격이었다.
처음 패배를 마주했을 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에밀라는 천재였다. 자만에 빠진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자신을 인지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능했고, 실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재능도 충만했다.
물론 그간 패배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밀라가 패배한 상대들은 모두가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에밀라는 그들에게 패배할 때마다 확신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하지만 에단과의 결투는…….
분명 경지로 따지면 에밀라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둘의 역량 차이는 확연했다.
에단은 에밀라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도 에단은 에밀라의 속을 간파하고 압도했다.
결과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에밀라의 이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에단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언급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하지만 에단은 그 뒤로 에밀라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애가 탔다. 일을 벌인 쪽은 에단인데 정작 에단은 유유자적 사라졌다.
갑자기 두통이 느껴진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건지…….’
“여기서 뭐 하냐?”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라가 고개를 들자 멀리서 에단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 여자아이와 같이.
순간 에밀라의 볼이 꿈틀거렸다.
“이제 오신 겁니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에도 에단은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지금 왔어. 그런데 기분이 안 좋나 본데?”
“……옆에는 누구죠?”
에단은 다비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다비를 설명하기가 꽤나 난처했다. 다비가 에단을 올려다봤다.
“아빠?”
“재미없어.”
에단이 그렇게 말하자, 다비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
순간 에밀라가 몸을 일으켰다. 에밀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너 왜 그러냐?”
“……딸입니까?”
순간 에밀라가 비틀거렸다. 에단은 헛웃음을 지었다.
“딸로 보이냐?”
“설마…….”
“애먼 사람 애 아빠로 만들지 말지?”
에단이 다비를 바라보며 딱밤을 날렸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다비가 울상을 지었다.
“그냥 아는 애 맡아 준 거야. 아카데미에 오고 싶다길래 데려온 거고.”
“……월권입니다.”
“그렇긴 하네. 그래서?”
뻔뻔하게 나오는 에단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야, 너 온 김에 얘 좀 데리고 가라.”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내가 데리고 다니니까 다들 수군거리더라고.”
“하아……. 알겠습니다.”
에단이 에밀라를 향해 턱짓했다. 하지만 다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빠, 나 저 아줌마 싫어.”
“……아줌마?”
에밀라의 낯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에단이 이마를 찌푸리며 다비의 등을 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힝……. 진짠데…….”
다비가 울상을 지으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
에밀라가 말없이 다비를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작은 이목구비가 꽤나 귀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북했다.
“그럼 난 간다.”
다비를 보낸 에단이 훌쩍 사라졌다.
에밀라가 다비를 바라봤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갈까?”
“……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길을 걸었다.
“에단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니?”
먼저 입을 연 건 에밀라였다.
그녀의 물음에 다비가 눈을 깜박거리며 에밀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다비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언니, 그 오빠 좋아해요?”
“지금 무슨 소리를……!”
에밀라가 발끈하자, 다비가 피식 웃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발끈하세요?”
“……그래, 발끈할 일은 아니지.”
에밀라가 먼저 앞서 나갔고, 다비가 히죽 웃으며 따라나섰다.
다비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여관의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는 도가 텄다.
말투, 표정, 행동, 눈빛.
하나하나가 다비에게는 훌륭한 정보였다.
“앞으로 저한테 잘하세요.”
“…….”
기가 찬 에밀라가 다비를 바라봤다.
‘……진짜 딸인가?’
말하는 투가 에단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 순간, 다비가 고개를 들어 에밀라를 응시했다.
“지금 제가 진짜 에단 오빠 딸인가 고민했죠?”
“……아니야.”
“거짓말.”
“아니라니까.”
“네에, 그런 걸로 할게요.”
다비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에밀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편 다비는 겪어 보지 못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도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지만, 다비의 또래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아카데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으니까.
“빨리 가요!”
한껏 들뜬 다비가 에밀라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