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협상 (2)
에단은 원래 정보 길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고 했었다.
블란테는 지금 에단의 소유가 아닐뿐더러,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힘을 과신하는 만큼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단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사건들은 주인공이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원래라면 에단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마련하면 그만이었다. 그 과정 중에 주인공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 주고 많은 것을 가져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주인공이 사라졌다.
당연히 이미 해결되어 있어야 할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
‘룬어의 내용도 바뀌었어.’
이번에 얻은 룬어가 주인공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할지도 의문이었다.
에단은 자신의 왼손을 힐긋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
떡밥이 풀리려면 한참이나 남은 고대의 산물.
게다가 레벨린과 붉은 곰까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이 엉키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단에게는 세력이 부족했다. 뒷배와 권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가문의 것이었다.
블란테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그들은 움직이겠지만, 에단의 독단으로는 이끌 수 없었다.
그래서 에단은 과격한 행보를 결심했다.
‘호구처럼 넘어가 줄 생각도 없었고.’
애당초 명분은 에단에게 있었다. 그들은 에단이 블란테라는 신분을 밝혔음에도 이빨을 드러냈다.
힘이 부족했다면 오늘 죽는 쪽은 에단이었을 터.
당한 게 있다면 배로 갚아 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바로 에단이다.
에단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메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블란테가 저희 따위를 탐낼 줄은 몰랐군요.”
“착각하는 게 있군. 블란테가 아니라 내가 탐내는 거야.”
“이유가 뭐죠?”
“해야 할 일이 많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빌어먹을 세계수, 붉은 곰, 아카데미. 귀찮기는 하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여기서 모든 미래를 늘어놓을 순 없었다.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해시킬 수도 없는 일.
‘그럴 시간도 아깝고.’
그렇다면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해야 했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내 밑으로 들어와.”
“……무엇을 믿고요?”
“이미 나한테 깨졌잖아?”
에단이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하늘 높은 자신감으로 무장한 정보 길드원이 오늘 에단에게 쓴맛을 봤다.
그래서 지금 메이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강압적으로 데리고 간들 따를 자들은 없을 겁니다.”
“강압적으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내가 묻는 것에 대답만 해 주면 돼. 장담하지. 내 말을 따라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아직 실패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에단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바쁜 몸이라 당장 움직일 수가 없어. 나 대신 수하들을 보내도록 하지.”
“그 정도로는…….”
말을 이으려던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네이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대체 누구시죠?”
“내 집사야.”
“…….”
에단에게 대답할 의사가 없어 보이자,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왜 자꾸 간을 보지?”
에단이 턱을 괬다.
“너희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지금 세계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프지 않나?”
머리가 아픈 건 에단도 다르지 않았지만.
“우리가 해결한다. 그리고 아직 말하기엔 이르지만 조만간 사건이 하나 더 생길 거야.”
“그게 무슨…….”
“궁금하면 결정해.”
내 밑으로 들어올지.
에단의 번들거리는 눈이 메이를 응시했다.
* * *
대화를 끝낸 에단이 계단을 내려왔다. 아래에는 네이드와 휴고, 가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자.”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네이드가 물어오자, 에단은 피식 웃었다.
“이제 표정 좀 풀지?”
에단의 말이 대답이 되었는지 네이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또 일 좀 해야겠다.”
에단의 말에 네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아닙니까?”
“여행지니까 휴양이나 하다가 와. 너한테도 익숙한 장소니까.”
“무슨…….”
“세계의 중심.”
에단이 가토를 바라봤다.
“들어 본 적 있지?”
“……엘프들의 숲 아닙니까?”
“그래, 우리 영지랑 맞닿아 있는 산맥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지. 우리 영지에는 몬스터들만 득시글거리잖아.”
에단이 농담조로 말하자, 가토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거기로 가 있어. 안내해 줄 사람도 붙여 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도련님은 아카데미로 복귀하시는 건가요?”
“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말이야.”
아직 아카데미에서 얻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제기랄, 학교 생활 좀 즐기나 했더니.’
그럴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헨리는 어딨어?”
“아.”
* * *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과 다비를 따라서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다비의 표정은 어두웠고, 여관 주인도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뭐라 변명해도 할 말이 없군요.”
여관 주인은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었다.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과 다비를 뒤따랐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의 사정이지, 괜한 사람을 말려들게 한 건 사실이죠.”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사미라.”
“……설마 그 사미라이신가요?”
“알고 있나 보군요.”
“모를 리가요! 검은 도끼 사미라를…….”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세상에는 괴물이 많더군요.”
사미라가 쓰게 웃었다. 헨리는 네이드의 살벌한 표정을 떠올렸다.
“……거기는 워낙 괴물밖에 없어서 그래요.”
“전설이니 뭐니 해 봤자, 한낱 용병 나부랭이라는 거겠죠. 진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
헨리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새 여관에 도착했다.
“잘 생각 없죠? 그럼 먹을 거나 좀 준비해 드리죠. 사과의 의미라고 하긴 뭐하지만……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헨리가 고개를 까딱하면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런데…… 나를 버리고 그냥 간 거야?’
워낙 분위기가 살벌했기에 말을 걸지도 못했다.
묘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아카데미에서도, 여기에서도 성과를 내기는커녕 짐만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음식이 나왔다. 헨리의 옆에 다비가 걸터앉았다.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먹음직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순식간에 음식을 완성한 사미라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돈 안 받을 거니까 같이 먹어도 괜찮겠죠?”
“그럼요.”
그때 여관의 문이 열렸다.
“나도 맛 좀 봐 볼까?”
에단이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휴고와 가토가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헨리 씨…….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요.”
“음식을 더 준비해야겠군.”
일행들의 식사량을 알고 있는 사미라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에 들어갔던 사마리는 아예 거대한 솥을 들고나왔다.
헨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사미라를 바라봤다.
“이걸 다 먹을 수는…….”
사미라를 바라보던 헨리가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 먹겠네요.”
헨리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순식간에 전투적으로 식사를 끝낸 에단은 사미라를 바라봤다.
“이걸로 입 닦을 생각은 아니지?”
“……원하는 게 있습니까?”
“어, 일 하나 해 줘. 염치가 있으면 거절하진 못하겠지?”
에단의 말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죠?”
“붉은 곰, 걔네 좀 방해하고 있어 줘.”
“이유는…… 물은들 대답하지 않겠군요.”
“물론 공짜는 아니야. 다비 때문에 신경 쓰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에단이 다비를 바라봤다.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은 생각 있어?”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비가 사미라를 바라봤다.
당황한 건 사미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카데미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이래 봬도 아카데미 교수거든.”
“당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사미라의 반응에, 에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잘 어울리나?”
“아니, 블란테의 적자가 왜 교수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건 영업 비밀이고. 어때? 다비를 여기서 평생 종업원이나 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잖아?”
“…….”
정곡을 찌른 에단의 말에 사미라가 잠시 침묵하다 다비를 바라봤다.
“아카데미 다니고 싶어?”
다비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결정됐네.”
멀뚱거리며 바라보던 휴고도 입을 열었다.
“저도…….”
“너는 안 돼.”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휴고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이제 얼추 정리도 됐고.
속으로 중얼거린 에단이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날이 밝으면 바로 이동하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 * *
날이 밝자 에단은 곧바로 게이트를 이용했다.
요금이 상당했지만, 에단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비를 떠나보내는 사미라의 표정은 복잡했다.
하지만 다비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단이 떠나기 전에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내 던졌다.
“통신 수정구.”
정보 길드에서 뜯어 온 것들이다.
“이용법은 그쪽 애들한테 물어보고, 너희들 것도 있으니까. 놀지 말고 일하고 있어.”
에단이 휴고에게도 수정구 하나를 던지고는 다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간다.”
“……다녀올게요, 엄마.”
다비가 사미라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내 게이트가 빛을 내뿜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네이드는 남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움직일까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드가 축 처진 휴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막상 그곳에 가 보면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휴고가 반색하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프와 정령의 도시니까요.”
“그래,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어.”
“네, 맞아요. 세계의 중심……. 이름처럼 아름다운 도시예요.”
헨리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휴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럼 가시죠.”
가토가 쓸쓸하게 서 있는 사미라를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하하, 살다 보니 동정을 받아 보는 일도 있군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요.”
기지개를 편 사미라가 몸을 돌렸다.
“그럼 고생들 하시죠.”
대충 인사를 한 사미라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토가 입을 열었다.
“강한 분이군요.”
“그러게요.”
헨리의 대답을 끝으로 일행은 여행길에 올랐다.
* * *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자 에단의 앞에는 거대한 방벽과 문이 보였다.
“와…….”
다비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못 챙겨 준다.”
“네, 괜찮습니다!”
다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방벽을 바라봤다.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지만, 설렘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거대한 문을 향해 다가서자, 문지기가 에단을 바라봤다.
문지기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안녕?”
에단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문지기는 뒷걸음치기 바빴다.
“나 바쁜데 문 좀 열지?”
“아, 알겠다.”
― 완전히 겁에 질렸군. 쯧쯧.
페온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문지기가 다급하게 문을 열자, 이내 아카데미의 경관이 훤히 드러났다.
‘자, 또 움직여 볼까.’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