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정보 길드 (1)
“흐흐, 만일 그 말이 거짓말이면 모가지를 비틀어 주겠어.”
“모가지도 안 보이는 돼지 새끼가 모가지 운운하니까 거참 신기하네.”
“…….”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되게 솔직하네?”
“그래,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주마. 돈은 죽이고 나서 가져가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권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에단의 조롱이 기폭제가 되어 남자가 성난 황소처럼 뛰어들었다.
에단을 그대로 밟아 죽일 기세였다.
“뭐 하고 있어!”
잭슨이 다급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잭슨과 다르게 에단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비켜 있어.”
― ……또 뭔 짓을 하려고…….
페온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었다.
황소같이 달려든 남자가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에단을 밟아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쿵!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나 먼지구름이 걷히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거한의 발은 에단을 짓밟지 못했다.
에단의 다리가 남자의 발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 상태로 다리에 힘을 주자, 남자의 신형이 기우뚱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개수작을!”
남자의 몸이 쓰러졌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조여 왔다.
“주, 죽기 싫으면 당장 놔, 이 새끼야!”
“방금까지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자, 잠깐.”
“싸움에 잠깐이 어딨어.”
에단이 그립을 확고하게 잡았다. 에단의 근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초월했다.
남자의 힘도 덩치에 걸맞게 강한 편이겠지만, 블란테의 혈통이며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한 에단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힐 훅(Heel Hook).
에단이 거한의 다리를 비틀었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무릎 연골이 종이 찢어지듯 찢어졌다.
“끄아아아악!”
연골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그 시각, 휴고와 가토는 여관 앞 작은 공터에서 가벼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둘의 실력은 비등했다.
마나 수련 이전까지는 휴고가 조금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토가 마나를 깨우친 이후로는 오히려 가토가 우위를 점했다.
쉬익!
가토의 목검이 휴고의 뺨을 스쳤다.
휴고가 발을 내디디며 흐름을 바꾸려고 하자, 가토가 몸을 빙그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에 휴고가 몸을 크게 낮추며 공격을 피한 뒤 거리를 벌렸다.
“우와……. 오빠들 엄청 강하구나…….”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다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익숙지 않은 칭찬에 휴고가 머리를 긁으며 민망해했다.
“헤, 헤헤……. 고마워.”
그런 휴고를 가토가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목검을 정리했다.
땀은 충분히 흘렀다. 휴고와의 대련은 언제나 큰 양분이 되었다. 휴고의 공격은 매우 변칙적이고 동물적이었다.
그와 대련을 할 때면 마치 짐승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예측하기 힘든 타이밍과 공격.
덕분에 휴고와 매일 대련하며 자연스럽게 임기응변도 크게 늘었다.
임기응변은 실전을 통해서만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휴고와의 대련은 실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괜찮겠지?”
휴식을 취하던 도중 휴고가 가토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설마 에단 도련님을 걱정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도련님을 걱정하겠어? 도련님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이 또 뭔가 일을 벌일까 봐 걱정하는 거야. 시비 걸리면 어떻게 될지 빤히 예상이 가잖아.”
“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또 일이 생겼겠어?”
“……그렇지?”
“…….”
가토는 휴고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거한의 십자인대를 찢어 버린 에단이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끄아아악! 주, 죽여 버릴 거야!”
거한이 비틀린 다리를 부여잡으며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에단이 발을 높이 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의 발이 거한을 몇 차례 짓밟았다. 처음에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지만, 거한은 얼마 안 가 잠잠해졌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만족스럽다는 듯이 에단이 웃었다.
‘미, 미친.’
에단을 바라보던 용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거한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존재였다.
포악하고 잔혹한 성격 탓에 늘 사건 사고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한 앞에서 싫은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우악스러운 성격만큼 실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용병들에게는 힘이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거한의 다리를, 마치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이 가볍게 비틀어 버렸다.
인간 같지 않던 거한이 바닥에 뒹굴며 순식간에 전투 불능이 됐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무심하게 확인 사살까지 끝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히 분노를 토해 내던 용병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른 놈들은 안 와? 내가 가?”
에단이 한 걸음 내딛자, 용병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기세라는 게 있다. 기세는 한번 형성되기 시작하면 거스르기 어려웠다.
에단의 기세는 이미 저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야, 너. 이쪽으로 와 봐.”
에단이 사람 하나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돈을 걷던 남자였다.
“저, 저요……? 저는 왜…….”
“빨리 안 와?”
에단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잔뜩 기가 죽은 남자가 에단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낚아챘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 돈은 내가 가진다.”
“네, 네? 하지만 배분을.”
“왜? 100골드 때는 아우성치더니 불만이야? 나도 내가 느낀 서러움과 슬픔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거한을 순식간에 박살 내 버린 에단의 말은 단순한 억지로 치부할 수 없었다.
“불만 있으면 나오든가.”
“……대, 대체 정체가 뭐지?”
어느 용병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그 식상한 질문은. 좀 참신한 걸로 해 보지 그랬어? 불만 있으면 ‘질긴 가죽’으로 와. 며칠간은 머무를 생각이니까.”
“질긴 가죽?”
“질긴 가죽이면 소문의…….”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질긴 가죽이라는 여관에 대해 따로 아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보를 캐내고 싶지만.’
에단이 힐긋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에단이 잭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내 말대로 끝났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갑자기 경어 쓰니까 어색하잖아.”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용병들은 뒤끝이 강해,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겁니까? 저명한 귀족가의 자제라도 되나 본데 여긴 페르나니엄입니다. 용병과 상인의 도시란 말입니다.”
“뭐, 저명 비슷한 거긴 하지. 그러는 너는 억지로 용병들 사이에 들어가려는 거 보니까. 정보 길드인가?”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에단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단의 입가가 크게 휘었다. 잭슨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보 길드라니, 넘겨짚기가 과하군요.”
“큭큭, 그래? 용병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쟤네들한테 화두를 던지면서 물어볼까?”
“……하,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왜 이렇게 방해하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너희들을 찾아다니던 중이었거든.”
“우리를? 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부터 묻는 게 참 많네. 정보 길드라는 놈들이 너무 정보를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여기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당신 덕에 내 계획도 모두 허사가 돼 버렸습니다.”
“뭘 어떡해. 그냥 가는 거지.”
에단이 잭슨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지나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순간 고민했다. 여기서 에단을 그냥 놓아줘도 되는가.
에단의 행동은 분명 도를 넘었다. 검을 뽑아도 규율에 어긋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면?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들은 에단이 상대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단순히 패배가 끝이 아니었다. 저 정도의 부상이라면 복귀는 힘들지도 모른다. 용병의 삶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병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원한도 많이 사게 된다. 그러니 큰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돈 몇 푼에 목을 걸고 싶지 않았다.
원래 용병이라는 족속은 돈에 목숨을 베팅하는 직업이었지만, 에단에게 대항하는 것은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병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뒤를 노리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단이 풍기는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어.
완벽한 피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랙 오우거를 흡수하면서 얻은 부가 효과.
에단이 살기를 끌어올리자, 자연스럽게 피어가 강해졌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
피어에 노출되면 대항이라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홍해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를 에단이 태연하게 지나쳤다.
* * *
에단은 질긴 가죽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미 체념한 잭슨은 축 늘어진 건어물처럼 에단에게 질질 끌려왔다.
여관에 휴고와 가토는 없었다. 다비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 함께 나간 것 같았다.
‘잘됐군.’
적어도 둘만 있는 게 대화하기는 수월했다.
때마침 여관 안도 조용했다. 사람도 딱 한 명뿐이었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취기가 잔뜩 올라서 엎드려 있는 헨리.
“……한심하군.”
한숨을 내쉰 에단이 잭슨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용건을 말해 보시죠.”
“좀 기다려. 성급하기는.”
하지만 급하기는 에단도 다르지 않았다.
에단이 여관 주인에게 말해, 마실 것 두 잔을 준비했다.
“붉은 곰, 그리고 곰 발. 아는 거 있지? 용병이랑 산적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아카데미.”
“말을 잘못했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원하는 건 없어. 얘네가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궁금한 건 바로 너희들이야.”
“……그걸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뭘 하기는, 협력하려고 하는 거지.”
“하, 협력? 대체 당신의 뭘 믿고요?”
“왜 그걸 네가 판단하는 거지? 더 위가 있잖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글쎄, 여기부터는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은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연스레 풍기는 압도감에 잭슨이 움찔 몸을 떨었다.
“……대체 뒤에 누가 있는 거죠? 당신이 무슨 블란테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오, 드디어 정답이군.”
“그게 무슨…….”
에단이 품에서 휘장을 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사자.
블란테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없어.’
촉박한 시간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잭슨의 부릅뜬 눈을 보며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감이 와?”